# 151-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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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에서 일렁이던 빛이 확장되며, 허공중에 다른 진을 만들었다. 다시 그 진에서 빛이 이어지며 진을 만들었다. 진과 진이 이어지며, 광대한 3차원의 영역에 진이 만들어졌다. 그것들은 모두 각자의 운동을 하며 막대한 힘을 수용하고, 수용한 힘을 목적에 맞게 운동에 운용했다. 진의 연결이 이루어내는 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또 다른 우주 같았다. 중중무진. 겹쳐지고 포개지고 관통하고 뚫려있는 세계. 그리고 세연이 서 있는 진의 중앙 부분으로 빛의 기둥이 발생했다. 그렇지 않아도 비정상적인 이질감에 충만해 있던 주변공간이 더해진 신기에 압도되었다.
-(누가 나를 불렀는가?)
일본어로 구성된 관념이 그 일대의 사람들의 뇌리로 전달됐다. 듣는 이를 황홀경으로 채찍질하는 관념이었다. 성공. 그래서 미즈하라는 혀를 찼다.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애니미즘의 전통이 남아있는 한국에서, 일본의 카미를 이끌어 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늘 그는 이토록 간단히 해 냈다.
"(이래서야 따라잡긴 글렀군.)"
어쩌면 진으로 기호를 다루는 능력이라면, 그는 과거보다 한층 더 발전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의 하나를 생각한다고 해도, 이런 정도의 신성이면 위험하지 않을까? 저 세연이라는 소녀의 몸은 확실히 뛰어나서, 카미가 빠져나가지 않으며 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수행의 생각을 읽기는 어려웠다.
“(존귀한 분을 뵙습니다. 그대의 힘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수행은 단도직입적으로 요청했다. 불러들인 카미의 정체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급에서 중급 사이의 힘이 느껴지는 카미였고, 그 정도라면 충분히 원했던 수준의 힘을 품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의 힘을 이용함으로서 은결과 쿠로사카라는 소녀를 구해내는 일이었다. 필요하다면--- 카미가 관념을 전개했다.
-(이 그릇은... 상관없겠지. 좋다.)
무언가 묘한 표정으로 관념을 전개하던 카미는 그 관념을 접고 수행에게 힘의 사역을 허락했다. 수행은 할아버지와 미즈하라와 시선을 교환했다. 두 사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행이 진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가며 기호를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 반응해, 거대한 우주가 움직이는 것처럼 진이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앞으로 3차원적으로 모든 진에 연결되어 있는 2차원적인 복잡한 기호의 연합이 나타났다. 수행은 그 가운데 손을 올렸다.
“파(破).”
고요하게 읊조림. 중앙의 세연이, 정확히는 세연의 몸에 깃든 카미에게서 엄청난 힘이 흘러나와 진 전체를 통해 퍼져나갔다. 그리고 연못에 던져진 돌맹이가 파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 일대는 이상한 일그러짐에 휘말렸다. 일순, 세계가 야릇한 다채색의 허수공간에 돌입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것은 그 허수공간이 수행이 전개한 힘에 의해 파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점차 휘말림이 옅어지며, 해변가 일대는 다른 종류의 기운데 휩싸였다. 카미의 신기조차 없는 것조차 용해해 버리는 압도적인, ‘무언가’의 느낌이었다.
“으음...”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할아버지는 거멓게 죽은 얼굴로 막 드러난 장면을 바라봤고, 미즈하라는 당혹한 얼굴로 혀를 찼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한 명의 소년과, 한 명의 소녀. 그러나 소녀는 소녀이되, 소년은 소년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특정한 세계에 속해 있는 사물이라기보다 세계 그 자체의 기색이었다.
소녀는 그런 소년에 대해 검을 잡고 멀리서 공격했는데, 그녀의 공격은 어느 것 하나 강맹하고 위협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어느 것도 소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나운 태풍도 대기를 없애지 못하고, 아무리 거대한 해일도 바다를 없애지 못하고, 아무리 거대한 지진도 대지를 없애지 못하듯, 그녀의 공격은 단지 끝없이 본질로 회귀하고 있었다.
다만 그 공격이 있을 때 마다, 소년은 도무지 판별할 수 없는 눈빛으로 움찔거리며 소녀를 바라보곤 했다. 그 움찔거리며 바라보는 동작, 소년에게 인간성이란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 동작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인지한다는 것. 인지될 수 있다는 것. 거기에는 주체와 객체의,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미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소녀는, 무척이나 지쳐있는 것으로 보였다.
“(쿠로사카! 그만둬라.)”
“(아저씨!)”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아무리 키리야미라도, ‘저것’을 당할 수는 없다. 아니, 세계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세계 내에 존재하는 이상, 세계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이상, 저것을 상대할 수는 없다.)”
미즈하라도 저런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전승되는 각종 문헌에 통달한 미즈하라는 단박에 저것이 세계와 동화한 ‘인신(人神)’의 힘임을 알았다.
“(......)”
놀란 표정으로 미즈하라를 바라보던 쿠로사카는 그의 냉엄한 말을 듣고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미즈하라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그리고 처음처럼 키리야미를 쥐고, 서릿발 같은 기운을 흘리며, 은결을 공격해, 은결과 세계 사이에 ‘차이’를, 어떻게 해서든 ‘차이’를 만들어 놓고자했다. 미즈하라가 언짢은 목소리로 외쳤다.
“(내 말을 들어라! ‘저것’을 그냥 놓아둬라! 놔둔다면 ‘저것’은 세계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무의미한 위험을 감수하지 마라! ‘저것’은 위험하지 않아! 네가 자극한다면 오히려 위험해진다! 저것이 마음먹는다면, 그 무엇도 저것의 '포섭'을 막아내지 못한다!)”
쿠로사카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자, 미즈하라는 답답하게 외쳤다. 쿠로사카가 자신의 하는 일에 신념을 가진 아이라는 건 잘 알지만, 저렇게 무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상했다. 그녀는 결코 멍청하지 않다.
“저 아이는 은결을 막고자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키고자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수행이 끼어들며 말했다. 미즈하라는 엄격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수행의 표정은 고마움에 물들어 있었다. 미즈하라는 칼칼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인가?”
“저 아이는... 자신의 공격으로 은결에게 ‘외부’를 인식시켜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것은 승리를 염원하는 검이 아닙니다. 저는 저 소녀에게 정말로 큰 빚을 졌군요. 그녀가 아니었다면 은결이에겐 기회가 없었을 겁니다.”
미즈하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말을 하나! 저기까지 동화가 진행되었다면 이미 늦었어! 네가 어떤 것을 가르쳤기에 저 나이에 저런 짓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오진 못해! 자칫하다가는 인류가 사라진다! 저것은 그런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네가 그런 정도도 모르진 않을테지!”
수행은 서늘한 표정으로 미즈하라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다음, 근처의 기호를 손으로 찍었다.
“미안합니다.”
“큭!”
그러자 미즈하라가 서 있는 곳의 기호가 반응하며 그를 옥죄였다. 미즈하라는 자신이 아는 모든 종류의 술법을 검토해 그 구속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아무 것도 통하지 않았다. 수행의 기호에 카미의 힘. 지금 눈앞에 떠올라 있는‘ 저것’이 아닌 이상, 이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늦지 않았습니다. 아직 은결과 세계가 완전히 융합되지 않은 이상, 그걸 분리할 수단 정도는 있습니다.”
수행이 말했다. 그의 주변으로 복잡한 기호가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고, 조합되었다. 그것은 둘을 가두고 있던 결계를 파괴하기 위해 시전 되었던 진과는 격을 달리하는 고차원적인 진식이었다. 심지어, 미즈하라조차 그 의미를 읽어낼 수 없는 초고차원의. 그제야 미즈하라는 어째서 굳이 수행이 한국의 지역신이 아니라 ‘카미’를 강신시켰는지 알 수 있었다. 저런 진을 감당할 힘을 가진 존재는 흔치 않다.
“-그래서 일부러 필요이상으로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를 끌어들인 거군!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미 알고서!”
“예.”
미즈하라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아무런 말도 소용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행은 시선을 돌려 세연-카미-를 바라봤다. 카미는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소녀와 소년의, 쿠로사카와 은결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행이 요청했다.
“(저 소녀를 도와주십시오.)”
-(저 소녀를 돕는다고? 같이 싸워달라는 말이냐? 하지만 저것은 이미 ‘세계’다. 세계와는 아무도 싸우지 않는다. 아니, 싸울 수 없다.)
가소롭다는 듯이 수행을 바라보며, 카미가 말했다. 수행은 간결하게 답했다.
“(‘저것’도, ‘세계’도 아닙니다. 단지 제 아들, 은결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다.)
카미는 딱 잘라서 답했다. 그의 답이 끝나자마자, 무지막지한 힘이 카미를 옥죄였다. 수행이 근처의 기호를 조작하자마자 발생한 힘이었다. 어차피 인간의 가소로운 술책이라 생각하고 떨치려던 카미는 그 힘의 구속에서 자신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이 힘은 단순히 자신을 구속하는 것을 넘어, 본질을 파괴하기 위한 음험한 용틀임을 하고 있었다. 카미는 ‘공포’라는 생경한 관념을 떠올렸다.
-(너는... 대체?)
“(이런 수단을 사용하게 되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입씨름을 할 수 있을 만큼 상황은 여유롭지 않습니다. 카미라고는 하나 당신도 어차피 사념이 집결된 존재. 나의 영역 안에서 그런 존재를 소멸시키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저 소녀를 도와주십시오. 이것은 명령입니다.)”
수행은 서늘하게 말했다. 그의 눈은 단호했고, 그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수행이라는 인간은 카미를 위협할 수 있다는, 믿기 힘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카미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은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간이 진동하며 은결을 향해 굉장한 힘의 덩어리가 짖쳐들었다. 꾸웅! 하지만 그 힘은 은결의 앞에서, 쿠로사카의 검에서 뻗어나온 힘이 그러했듯, 없는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은결은 공격이 이루어진 방향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나도 최선을 다해 도우마.”
부자는 그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수행이 시전한 진에 구속된 미즈하라는 복잡하고 언짢은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수행이 바쁘게 기호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낮은 중저음이 주변을 진동시켰다.
세계가 세계에서 격리됐다.
*이번 챕터 끝내면 이글은 좀 쉴 생각입니다. 무척 힘드네요. 출판도 해야 하고.(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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