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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149화 (149/300)

#   150-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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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선 기색에 불편함을 느끼며, 세연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고 다시 자리에 누워볼 생각이었다. 한데 눈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복합적인 감상이 공포와 뒤섞여 폭발하는 화산처럼 치솟으려고 했다. 하나, 그녀가 깜짝 놀라며 입을 열기 전에, 그림자 쪽에서 먼저 말했다.

“은결 아버지란다. 놀라지 마렴. 갑자기 깨우게 되어 미안하구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세연의 긴장이 전율과 더불어 한풀 진정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그녀는 수행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찾아온 걸까? 세연은 분명히 심상치 않은 일이리라 생각하며 수행에게 물었다.

“아- 예? 그런데, 어떻게?”

“은결이가 위험에 처했구나. 네 힘을 빌려주지 않겠니?”

“에, 으, 은결 씨가요?”

세연은 허둥지둥하며 눈을 크게 떴다. 수행은 그녀의 모습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것이 은결을 향한 마음이기에 더욱 그러한 것이다. 누군가를 걱정하는 마음은 언제나 존중받아야 하는 고결한 것이지만, 은결의 아버지로서, 가족의 범주를 벗어날 때, 은결의 세계는 언제나 쓸쓸했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하, 하지만 저는 아무런 힘도 없는데 어떻게...”

“괜찮단다.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되니까. 같이 가주겠니?”

“예.”

수행의 설명에 세연은 아무런 주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별장의 문을 나서자마자, 그녀는 어떤 이질감에 몸을 움츠렸다.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지만, 이 일대는 이미 다른 공간이었다. 세연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수행을 따랐다. ‘은결의 위기’라면 이런 종류의 일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곧 두 사람은 노인 두 명이 서 있는 앞에 도착했다. 한쪽은 모르지만 다른 한 노인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은결의 할아버지였다. 세연은 얼른 꾸벅 인사했다.

“반갑구나.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하지만, 너 외에 적임자가 없구나.”

할아버지는 안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무얼... 하면 좋은가요?”

“저 곳에 앉아 있으면 된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아.”

칼칼한 목소리로 다른 노인이 말했다. 다급하고 위압적인 목소리라 그녀는 흠칫, 몸을 좁혔다가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밝지는 않지만 은은한 빛이 어린 그림이 해변에 넓게 그려져 있었다. 과거 은결이 보여주었던 진식이랄까? 그런 것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 그림의 중앙은 어울리지 않게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아마 그 안에 들어가라는 말인 것 같았다. 주춤거리는 모양새로 그쪽으로 움직이던 세연이 갑자기 뒤돌아보며 물었다.

“저, 그림을 밟을 것 같은데요?”

“괜찮다. 네 몸무게가 코끼리만 할리도 없는 거고, 그 정도에 뭉개질 정도로 엉성한 물건은 아니다.”

다시, 노인이 칼칼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능숙하지만 조금 어색한 한국어였다. 세연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었다. 빛을 머금은 기호 내부의 흙은 밟아도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두터운 유리 밑에 그려진 그림 인 것 같았다. 곧 그녀는 그림의 정 중앙에 들어설 수 있었다. 거기서 세연은 다시 세 사람을 바라봤다.

“그대로 있어주렴.”

수행이 말했다.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세연을 중심으로 삼각형을 형성했다. 기호가 머금고 있는 빛이 강렬해졌다.

쿠로사카는 은결처럼 보이는 것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이제 적의도, 호의도 보이지 않았다. 뱀파이어가 재가 되어 스러진 다음, 그는 동작을 멈추고 처음 그러했던 것처럼 주변을 둘러봤다. 쿠로사카는 본능적이라 말할 만한 감각으로 그것이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는 눈길이라는 것을, 세계를 단지 인식되는 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쿠로사카는 타오르는 것 같은 갈증을 느꼈다. 잘은 알 수 없었지만, 은결이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은결의 모습은 감각차단결계를 생각나게 했다. 비교도 할 수 없는 고차원적 상태이지만, 은결의 분위기가 주변과 차이를 서서히 제거해가며 융합되는 모습은, 그것을 생각나게 했다. 그래서 저대로라면 은결은 저 미증유의 힘과 함께 ‘사라질’것이라고, 그녀는 느꼈다. 쿠로사카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다급하게 외쳤다.

“은결! 정신 차려!”

은결처럼 보이는 것이 멈췄다. 쿠로사카는 그것과 눈을 마주쳤다. 너무도 맑은 눈길에 오한이 돌았다. 그 눈은, 그냥, 무감각한 표정으로, 아무런 개체성을 드러내어놓지 않은 채, 그냥, 세계를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은결처럼 보이는 것이 입을 열었다.

“은결...이, 누구-지?”

돌아온 대답은 충격이 되어 쿠로사카의 뇌리를 강타했다. 혹시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은결을 은결로서 유지하는 것들이, 스러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 인식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대로라면 결코 은결이 이전과 같이 상태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놓아둘 수는 없었다.

쿠로사카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자신을, 믿는다, 고 말했다. 자신은, 그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믿음에는 답해야 하고, 하지 못한 말은 전해져야 했다. 그것을 위해, 은결은 은결이어야 했다. 그녀는 키리야미를 쥐었다. 뱀파이어의 죽음과 함께 위맹한 신의 힘이 키리야미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후우-”

손에 잡힌 키리야미가 웅웅 떨었다. 설령 키리야미를 완전히 다룬다고 해도 지금의 은결에 비한다면 자신이 한 마리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제까지 보아온 장면을 되새길 때, 이것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성공하더라도, 돌아오는 보상은 하잘 것 없었다.

그래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은결처럼 보이는 것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힘이 반월 같은 형상이 되어 날았다. 원래대로라면, 그 앞에서 선 모든 것이 두 동강 나고야 말 힘이다. 하지만 그것은 은결처럼 보이는 것의 앞에서, 바닷물에 떨어지는 한 방울 물처럼, 가소롭게 사라졌다. 은결처럼 보이는 것은 자신을 향하는 공격이 있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결!”

그리고 쿠로사카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은결처럼 보이는 것은, 그녀를 보면서 희미하게 ‘저것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했다. 어딘가 익숙하고, 어딘가 달랐다. 그 역시도 자신의, 확장일 것임은 분명했지만, 그 자신의 조각이 자신을 향해 내미는 힘과 살기는, 흐려져 가는 기억과 뒤엉켜 어떤 기호의 조각을, ‘쿠로사카’라는 조각을 떠올리게 했고, 그래서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주춤거리다니? 누가? 어떻게? 왜? -이것들은 뭘까?)

“내가 네 타자가 되어주지!”

쿠로사카는 외쳤다. 은결처럼 보이는 것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아아, 그녀답구나. 라고 생각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금세 ‘그녀’가 누구인지, 은결처럼 보이는 것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란 대체 무엇인걸까? 그것은 금세 생각한다면 거기 ‘나’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며, 그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여기게 됐다. 애당초, 이러한 기묘한 부글거림을 끓어오르게 하는 일련의 조각난 사고들, 그러니까, ‘언어’라고... 이름 붙여진 것들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시, 압도적인 세계의 전체성이 사고를 덮쳤다. 해변에 그려진 그림이 해일에 지워지듯, 은결의 조각들이 이루어낸 사고의 모습도 희뿌옇게 지워졌다.

“-그러니까, 정신차려!”

이어서 쿠로사카는 외쳤고, 은결을 공격했다. 무의미한 공격이라는 것은,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검이 아니기에 상관없었다. 은결이 은결로서 유지되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씨발, 이런 니기미 좆같은!

푸른 이빨은 초조하게 지껄였다. 갑자기 주변이 시끄러워진다 했더니 생각지도 않던 불청객이 들어올 모양이었다. 한 백이십만 걸음 정도 양보해서, 불청객이 들어오는 것 까지는 양보할 수 있었다. 세연의 몸은 정말로 뛰어나서 그런 정도의 수용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들어오려는 녀석은 심상치 않았다. 주변을 그윽하게 감싸는 서기가, 지금 이 계집 안에 들어오려는 존재가 자신과 ‘동류(同類)’라는 사실을 고하고 있었다.

-골치 아픈데.

이 계집의 몸은 완전히 자신의 권역화 되어 있고, 고로 은신도 자유롭지만, 같은 등급의 ‘카미’ 앞에서까지 그 권능이 완벽할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자신이 이 계집 안에 있다는 것이 이제 들어오려는 불청객 덕분에 들킨다면, 꽤나 고생을 할 각오를 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소멸’ 될 수도 있다.

-어떻게 한다...

겨우 얼마 전 꼬맹이와 담판을 지어 땡중의 게송이 무의식 가운데 울려 퍼지는 걸 해결해 편안한 주거지로 돌아왔다 했더니, 이런 위기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운이 나빴다. 푸른 이빨은 헛웃음을 지었다. 운이 나쁘다고 투덜거렸지만 기억하기로, 수백 년간 운이 좋았던 일이 없었다는 게 떠오른 탓이다. 봉인이 풀릴 때 이미 주변이 오물에 더럽혀져 힘을 억제 당했었다. 덕분에 도망쳐 나와야 했었고, 도망쳐서 쓸 만한 안식처를 구하니 파리들이 들러붙어 요 꼴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끝내주는 몸을 하나 발견하긴 했는데, 이게 까탈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먹기는커녕 먹힐 뻔 했다. 그러니까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일단은 숨어야겠지.

푸른 이빨은 자신의 무력함에 치를 떨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카미라도 현실적으로 힘이 없는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들어오는 놈이 좀 둔하거나 상대의 사정을 잘 파악해 주길 기대할 뿐이다.

그때 어떤 생각이 푸른 이빨을 스쳤다.

푸른 이빨은 음산하게 킬킬대며 중얼거렸다.

-아니, 이게 봉인에서 풀리고 최초로 운이 좋은 걸지도 모르겠군.

그는 깊이깊이 세연 속으로 침잠했다.

*teller님의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별로 이것저것 기대하고 적는 글이 아닌지라, 성원해 주시는 분들이 가장 큰 힘입니다. 근래에 안 좋은 일도 있었고. 후.

*저는 텔레파시 종류의 소통이라도 언어의 현식으로 정보가 교환된다면 그것이 완전한 소통일 이룰 수 없다고 봅니다만, 실증되지도 않은 능력으로 소통하는 건데, 작가가 그렇다고 설정한다면 그런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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