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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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허공에 떠 있는 채 해변을 바라봤다. 평범한 해변의 한 장면이다. 고요함을 파고드는 파도 소리가 바다 위의 은결과 함께 이 여름밤의 운치를 더한다. 희미한 사람의 그림자가 쓸쓸하게 보였고, 아늑한 랜턴 빛이 곳곳의 텐트에서 새어나왔다.
“역시 늦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업혀 있던 수행이 말했다. 옆에 서 있던 다른 노인이 본래 그런 것처럼 딱딱하고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될 것은 알고 있었지.”
“방법을 생각해 둔 것이 있는 모양이시군요.”
수행이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저으면서 그를 바라봤다. 적을 바라보는 것처럼 강한 눈빛이었다. 그는 입을 열어, 눈빛처럼 강하게 말했다.
“아니. 네게 방법이 있을 거라 알고 있는 정도지.”
“-강신을 사용하겠습니다.”
즉각적으로, 수행은 부드럽게 웃으며 상대의 기대에 응했다. 두 노인이 모두 놀란 얼굴을 했다. 수행이 만든 팔찌가 무력화 됐다. 단순한 무력화가 아니었다.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그가 만든 팔찌는 위치에 대한 신호라도 보내야 한다. 수행은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되지 않았다. 언제나 메아리 울려주던 거대한 산이 갑자기 사라진 꼴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많지 않았고, 어느 것 하나 대단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을 고려하더라도 강신은 과격한 방법이다. 더구나 사용하고자 해서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방법도 아니다.
“조건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노인이 물었다. 그의 표정은 처음과 같았다. 물을 붓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듯, 신을 부르기 위해서도 그릇이 필요하다. 하지만 강신을 액체에 비유한다면 그것은 펄펄 끓는 쇳물을 붇는 행위다. 그러한 액체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은 극히 희귀할 수밖에 없다. 수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적합한 아이가 있습니다.”
“괜찮겠느냐?”
“괜찮습니다. 미즈하라씨의 솜씨라면 충분히 저의 무능을 채워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은 단정했다. 해변가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조금 다급하다.
“---!”
“---!”
공간의 분위기가 갑자기 변했다.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만물이 환희에 떨고 있다고 해야 할까? 만물이 침묵에 숨죽인다고 해야 할까? 다채색의 점멸을 반복하던, 원근이 소거된 세계에서, 이제 이질감은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은 극히 익숙하고 두려운, 그러나 낮선- 모순적인 ‘무언가’였다. 쿠로사카와 뱀파이어는 싸우던 것을 잊고 숨을 쉬는 것 처럼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은결이 있었다. 아니, ‘은결’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은결?”
쿠로사카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확신 없는 목소리였다. 쿠로사카가 기억하는 것이 옳다면, 그는 은결이었지만, 그를 은결이라 인식하는 것을 본능이 거부하고 있었다. 푸른 이빨에게 몸을 내어준 은결의 분위기? 쿠로사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한층 본질적인 차이였다. 올바른 표현인지 자신은 없었지만, 지금의 그는, 마치 ‘신(神)’처럼 느껴졌다. 쿠로사카는 침을 삼키면서 다시 물었다.
“...은결이야?”
은결처럼 보이는 것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막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주변을 맑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리번두리번. 쿠로사카는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꼈다. 곧 은결처럼 보이는 것과 쿠로사카의 눈이 마주쳤다. 쿠로사카의 등골로 소름이 돋았다. 그의 시선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 순결해서, 차라리 동물적이었다. 그는, 아무 것도 가치판단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그저 보고 있었다. 은결처럼 보이는 것의 눈빛이 뱀파이어를 향했다.
“(대체 어떻게 아담의 언어에서 해방될 수... 설마?!)”
은결처럼 보이는 것과 눈을 마주하자마자 타오르던 것 같은 그의 푸른 눈빛이 꺼졌다. 그는 두려움에 뒤로 주춤 주춤 물러서다가 이내 휘청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쿠로사카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를 생각할 정신적 여유는 없는 것 같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다급하게 패를 꺼냈다. 그리고 무언가를 외쳤다. 공간이 어떤 압도적인 것으로 충만했다. 하지만 은결처럼 보이는 것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한 순간의 멈칫거림도 보이지 않았다. 공간을 차지하던 힘의 흔적도 완전히 은결처럼 보이는 것의 기운과 융합되었다.
“(크, 크큿... 역시, 그것밖에 없겠지. 그게 아니고서는 아담의 언어를 무력화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대체 어떻게 당하고 난 뒤에 돌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행위가 실패하자, 그는 웃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공포 질렸다던가 하는, 그런 종류의 웃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이 판단하고서, 온전한 자신의 웃음을 토하고 있었다. 그 웃음은 경의와 경멸로 충만해 있었다. 사태를 온전히 파악하고서, 마지막 가치판단을 내릴 때, 그런 때나 보일 수 있는 웃음이었다. 그러면서, 뱀파이어는 점차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두려움에 벌벌 떨지만 은결처럼 보이는 것을 향하는 자신의 눈동자를 비키지 않았다.
“(그래. 만물을 추구같이 여기는 자! 너야말로 붉은 여왕- 우리 최대의 적이다.)”
적의를, 적의에 적의를 겹쳐, 억겁을 끓이고 익혀 농축시킨 한 방울의 적의 같은 것을 담아, 그는 은결에게 외쳤다. 동시에, 은빛 패를 허공에 띄우고는, 절망하는 자의 광기로 두 손을 펼쳤다. 은빛 패가 반응하며 빛을 내더니 엄청난 암흑이 발생해 은결을 향해 쏘아졌다.
은결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저 주어진 세계였고, 말할 수 없는 세계였다. 침묵하며 기뻐하거나, 깔깔거리며 뛰놀 수 있는 세계였다. 정의하거나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한 세계였다. 어쨌거나 그 세계 가운데서 은결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거라면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맡아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각을 통해 들어온 어떤 정보에도, 은결은 자의식을 담을 수 없었다. 그냥, 그러할 뿐이었다.
모든 타자는 자아의 확장이었고, 확장된 자아는 어떠한 저항도 겪지 않았다. 자신을 향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일부이거나 전체여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향하던 그것은 걸림 없이 조화를 이룰 뿐이었다. ‘어떠한, 걸림도, 없었다.’ 거기에는 ‘권력’을, ‘주인’을 주장하는 자아가, 자아와 타자가 없었다.
걸림없는 세계의 모습을 받아들였기에, 그곳에 자의식이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은결을 유지하던 모든 종류의 타자로서의 세계가 거기서는 해체되어 있었다. 아니, 자아의 다른 모습으로서 드러나 있었다. 때문에, 그곳에서는 사유한다는 것이 불필요하고 무의미했다. 세계의 통일성을 인식할수록 은결은 점차 자신이 세계에 녹아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해체되는 것을, 느꼈다.
-쿠우우웅!
은결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다른 모습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은결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는 무심하게 손을 내밀었다. 암흑이 손끝에 닿았다. 암흑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 힘은, 짚으로 만든 개가 불타 재가 되듯이, 자연스럽게, 세계로 돌아갔다. 해체되어 가는 자의식이 그것을 기회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힘겨이 속삭였다. 은결은 두 사람이 보이는 곳으로 천천히 걸었다. 보보마다 세계가 그를 드넓은 품으로 맞이했다.
“(크큭...! 역시 세계에 속한 자는 네게 이길 수 없지.)”
뱀파이어가 절망적인 웃음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쿠로사카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방금 전 광경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은결처럼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손을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은결처럼 보이던 것을 향하던 힘은 흔적도 없이 해소(解消)되었다. 해소?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평하고도 그 말에 어떤 어색함을 느꼈다. 은결이 방금 전 보여준 광경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적대하는 무언가가 소멸된 것처럼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아지가 주인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찾아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것을 해소라고 표현하기는 어려운 것 같았다. 차라리 귀향(歸鄕)이 어울리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긴 한숨 다음, 뱀파이어는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은결처럼 보이는 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태도는 갑작스럽게 침착했다. 사태를 온전히 파악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인, 미래를 포기한 자의 냉혹함이었다. 그는 아담의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 사용하던 은빛 패를 들어 성큼성큼 걸어 아직 꿈틀거리는 늑대인간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몸에 패를 대고 말했다.
“(재는 재로.)”
평화롭게, 늑대인간의 몸이 회색빛 재로 변했다. 그는 초연한 얼굴로 동료의 재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여전히 초연한 얼굴로, 쓰디쓰게 중얼거렸다.
“(아담의 언어를 맞이하고도 인식과 사고능력을 동결당하지 않은 여자에, 붉은 여왕과 동조해 아담의 언어를 자력으로 극복해내는 꼬맹이라니. 꽤 오래 산편이지만, 이런 건 꿈도 꿔본 적 없는데 말야.)”
쉬운 임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담의 언어에 대한 봉인을 일시적으로 해제시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은 임무였으니까. 마스터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다른 종류의 예상은 불가능한 임무였다. ‘전설’처럼 강한 자를 상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린 소년을 잡아오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말았다.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생각해 봐도,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남은 것은, 마지막 자긍심을 지키는 것과, 마스터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심장에 은빛 패를 가져다 댔다.
“(어쨌거나, 우리는 스스로 죽을지언정 네게‘만’은 굴복할 수 없지. 할렐루야.)”
조롱과 신념을 섞어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하고서, 뱀파이어는 ‘재는 재로’라고 말했다. 패가 번쩍였다. 그는 정말로 점차 스러지는 재가 되었다, 은색으로 곱게 쌓이는 두 재무더기가- 이 이질적인 공간에 쓸쓸하게 남았다. 은빛 패는, 허공에 두둥실 뜬 채로 가만히 있다가 한줄기 빛살이 되어 어디론가로 움직였다. 쿠로사카는 무력감 가운데서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은결처럼 보이는 것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도 성원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보내주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앞으로도 더 좋은 글을 적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감상 남겨주신 Cloud_Nine 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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