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146화 (146/300)

#   147-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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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멈춰’라는 말이었다. 쿠로사카는 그렇게 들었다.

그것은 ‘멈춰’라는 말이 아니었다. 쿠로사카는 그렇게 들었다.

그것은 ‘멈춰’였지만 도무지 ‘멈춰’라고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그것은 한국어였던가? 영어였던가? 일본어였던가? 독일어였던가? 프랑스어였던가? 중국어였던가? 쿠로사카는 그 멈춰가 어떤 언어로 표상되었던 것인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 ‘멈춰’는 그들 모든 언어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들 중 어느 것에도 속해 있지 않은 것도 같았다. 다시 생각하건데, 심지어, 정말 언어였던 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 그것은 언어였던가?

언어는 결국 기호의 문제였다. 하지만 ‘멈춰’라는 기표를 듣고, ‘멈춰’라는 기표의 뜻을 해석하는 과정이, 거기에서는 빠져 있었다. 아무리 짧고 순간적이라고 해도, 있어야만 하는 과정이, 거기에는 없었다. 그 ‘멈춰’는 그냥 ‘멈춰’였고, 그래서 도무지 ‘멈춰’가 아니었고, ‘멈춰’가 아니기에 언어의 범주조차 넘어서서 있었다. 그 ‘멈춰’는 규정되어 있다기 보다, 규정하는 ‘멈춰’였다. 어떠한 개념과 언어로도, 그 ‘멈춰’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멈춰’를 모아 놓은 것 보다 거대했고, 심지어, ‘멈춰’를 넘어서, 모든 언어를 모아 놓은 것 보다 거대한 것 같았다. 거기에는 그 ‘멈춰’에는 기표가 없었고, 기의가 없었다. 기표가 기의였고, 기의는 기표였다.

-기표는 기의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는다.

그러면 그것은 대체 무엇인걸까? ‘무엇’이라고? 가소로운 짓이었다. ‘무엇’에 답하기 위해서는 언어에 기댈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언어를 넘어서 있는 언어였다. 그것은 ‘정의되어 있는’이 아니라 ‘정의하는’ 언어였다. 언어에 기댈 수 없다면, ‘무엇’이라 묻는 모든 행위는 서글플 뿐이었다.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했다. 정말 그것을 설명하고자 했더라면, 최선의 수단은 침묵일 뿐이다.

쿠로사카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멈춰’라는, 혹은 그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들었고, 그 무언가를 들은 순간, 자신이 그 무언가에 따라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허공에 뜬 채로, 마지막 일격을 내려치는 동작과 함께 정지해 있었다. 위기를 피해, 라이칸 슬로프가 바닥으로 착지했다. 그는 시선을 말을 들려온 방향으로 돌렸다. 뱀파이어가 걸어오고 있었다. 푸른 그의 눈은 사납게 빛나고 있어서, 야성을 드러낸 라이칸 슬로프의 눈빛에 못하지 않았다.

“(그 계집은 렐릭-성유물-급의 검을 무기로 삼고 있다. 욕심 부리지 마. 우리도 아직 그 검을 모두 파악하지 못했어.)”

쿠로사카가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로 뱀파이어는 말했다. 이어서 그는 손을 휘둘러 어둠으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뱀파이어가 둥실 떠올랐다. 그는 쿠로사카에게로 접근해 그녀의 손에 쥐어진 키리야미를 빼냈다. 키리야미가 빛을 발했고, 뱀파이어의 손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파사의 힘이 인외의 것을 거부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뱀파이어는 무감각하게 그것을 계손 쥔 채로 내려갔다. 직접적인 공격이 아니고선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는 자신감 처럼 보이기도 했다.

쿠로사카는 그것을 맨 정신으로 바라보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정신만이 말짱했다. 다른 모든 것이, 그녀의 몸뿐만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이 상궤를 어긋나 있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과는 어떤 근본적인 단절이 있는, 그런 상태였다. 마치, 세상의 법칙이 쿠로사카에게서만 작동하기를 멈추고 있는 듯한, 그런 상태였다. 사실 다른 것들은 모두 멈춘 상태에서 정신만이 멀쩡하다는 것도 이상했다. 아마 은결은 이미 당했을 것이다. 이런 힘을 가진 상대에게 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 나는- 싸... 우길 원- 한다!)”

라이칸 슬로프가 말했다. 뱀파이어가 말한 것과 같은, 쿠로사카가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였다. 증폭된 야성을, 지난 싸움의 후유증을 설명하는 것처럼 그의 말을 흐트러져 있었다. 그러나 흐트러진 언어 사이로 넘쳐 나오는 적의 피와 살에 대한 갈망은 강렬했다. 뱀파이어는 이맛살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지난번 네가 좀 당했던 게 아니니, 이대로 끝내기엔 억울하겠지. 이 검의 힘은 봉해둘테니, 마음껏 사냥을 즐겨봐.)”

“(고, 맙-)”

뱀파이어는 다시 검을 들고 올라가, 여전히 멈춘 자세로 있는 쿠로사카의 손에 그것을 꽂았다. 그때까지도 뱀파이어의 손은 키리야미에 의해 타오르고 있었다. 이어, 품에서 은색의 패를 꺼내더니 말했다. 은색의 패가 빛났다. 이번에도, 이해를 넘어선 어떤 것이 공간을 넘어서 전해졌다. 키리야미가 서기를 잃고 평범한 검이 되었다. 이어, 쿠로사카의 몸이 자유로워졌다. 그녀는 재빨리 자세를 잡아 두 괴물에게서 멀어졌다. 뱀파이어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경이적인 상황 판단력이군.”

쿠로사카는 불쾌한 얼굴로 그의 말에 대답했다.

“적을 가지고 놀고자 하는 너희들의 끔찍한 비열함에는 미치지 못해!”

“----!!”

쿠로사카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 뱀파이어의 얼굴이 경악에 굳었다. 쿠로사카를 향하는 그의 눈길을 마치 괴물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괴물에게 괴물 바라보는 시선을 받으며, 쿠로사카는 기이한 기분에 휩싸였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대답을 전하듯, 뱀파이어는 발작적으로 쿠로사카를 향해 외쳤다.

“정신이 멀쩡했다고? 말도 안 돼! 그 검이 아무리 성유물급의 아티팩트라도 그런 힘을 가지고 있을 리는 없을텐데!”

-그것이,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 쿠로사카는 황당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황당함을 다른 종류의 생각과 의견으로 옮겨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음 순간, 그녀의 눈앞에는 거대한 짐승의 입이 다가와 있었다. 어비스의 심연을 현세에 꺼내놓은 듯한 불길한 목구멍이, 잔인한 이빨의 나열과 진득한 체액의 출렁임을 동반하고 있었다.

“크르르릉!”

“큭!”

일순간에 모든 잡념을 날려버리고, 쿠로사카는 키리야미를 다시 틀어쥐고 들었다. 어둠을 가르는 위대한 검은 저 뱀파이어가 무슨 수를 썼던 것인지 이제 그 상서로움을 잃었다. 하나 날은 삭지 않았고, 그러니 쿠로사카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한 차례의 공방이 교환되고 서로를 뒤로 튕겨 나갔다. 쿠로사카는 힐끗 곁눈질을 했다. 멀지 않은 곳에, 방금 전의 자신이 그러했던 것 처럼, 법칙과 함께 결박당한 채 움직이지 않고 있는 은결의 모습이 있었다. 쿠로사카는 이를 악물었다.

-찰칵.

은결은 무언가 맞물려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은결은 정지한 자신의 육체를 인식했다. 그래서 어떤 의지도 이제 자신의 몸을 움직일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이해했다. 뱀파이어가 은빛 패를 꺼내며 행한 술법에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은결은 그 힘의 정체를 어렴풋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슬픔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찰칵.

다시, 은결은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를 들었다. 저편에서, 쿠로사카와 라이칸 슬로프가 싸우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왔지만, 슬픔에 물든 정신은 그런 곳에 주의를 기울일 수 없었다. 자신을 지탱하기에도, 자신은 버거웠다. 거대한 돌을 이고, 혹은 밀랍의 날개를 지니고, 드높은 산을 향해, 뜨거운 태양을 향해, 기다시피 올라가는, 죽다시피 날아가는, 그러 기분이었다.

-찰칵.

다시, 은결은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서 그는 언어를 생각했다. 정확히는 언어를 생각하지 않았다. 언어와 연결되는 해석을 생각했다. 정확히는 해석을 생각하지 않았다. 해석과 연결되는 권력을 생각했다. 은결이 생각하기에, 언어가 해석됨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언어의 문제는 결국 권력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래. 언어를 생각하는 것은, 권력을 생각하는 것과 많이 떨어져 있지 않았다.

-찰칵

다시, 은결은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를 들었다. 은결은 생각을 이었다. 언어는 인간에게 사태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해석자였고, 그래서 자신의 감각기관이 받아들이는 물자체의 세계를 자신의 범주로 해석해 받아들였다. 언어는 그렇게 받아들여진 세계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분할하는 가장 중요한 틀이었다. 언어는 언어를 사용하는 이에게 고착해서, 그에게 의미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에 따라 사태를 경계 지어, 같아 보이는 것을 다르다고 말하고, 달라 보이는 것을 같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도구였다. 결국, 모든 언어는 세상을 해석한 결과물이었다.

-찰칵

다시, 은결은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를 들었다. 은결은 생각을 이었다. 해석이란 행위는 어쩔 수 없이 해석하는 주체를 상정했다. 그리고 주체를 상정한다는 것은 해석하는 행위가 결국 해석자의 편의에 연관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해석하는 자의 편의- 는 쓸모 있음과 없음, 의미 있음과 없음, 이름 붙일 필요의 있음과 없음을, 그 주제가 판단한다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와 같은 해석을, 아마 부정할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언어가 본래 그러하다면, 그 본래 그러함으로 인해, 언어는 결국 권력의 문제일 수밖에 없음도 부정할 수 없었다.

-찰칵

다시, 은결은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를 들었다. 은결은 생각을 이었다. 이것이 의미있고, 이것은 무의미하다. 이것은 필요하고, 이것은 불필요하다. 이것은 편리하고, 이것은 불편하다. 그 판단, 그 판단들. 사태에 판단을 강요할 수 있는 힘, 을 권력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너는 미쳤고, 우리는 미치지 않았다고, 규정할 수 있는 언어를 소유한 자들을, 권력이 없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찰칵

다시, 은결은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를 들었다. 은결은 생각을 이었다. 그래서 은결은 언어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해석의 문제가 과거부터 항상 슬펐다. 언어가 해석의 문제이고, 해석이 권력의 문제라면, 언어에서 권력으로 이어지는 틈틈사이로 인간의 욕망은 스며들 것이고, 그 욕망이 ‘해석’이라는 ‘권력’을 통해 타자에 대해 ‘주인’되기를 시도할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결은 기표와 기의 사이에 아무런 틈이 없기를 소망했다. 어떠한 자아도 감히 그곳에 스며들어 본래 뜻을 망치고, 사태를 자의로 판단해, 타자로 만들지 못하도록, 완벽한 언어가 있으면 좋겠다고, 언제나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언어는 없었다. 심지어, 침묵마저도 세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기호는 넘쳐났고, 해석은 강요되었고, 권력은 아우성을 쳤다. 자신 역시- 은결은 불모감을 이겨내기 어려웠다.

-찰칵

다시, 은결은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번 챕터도 참 빡빡하군요. 이왕 바다에 놀러오고 했는데, 좀더 유유자적 놀러다니는 장면을 넣고 싶었습니다...

*역장은 은결네만 사용합니다. 역장처럼 보이는건 주로 다른 술법으로 비슷한 효과를 내는거죠. 역장은 수행의 기호론에 입각한 거라서 종교인이 대부분인 이 세계관에서는 사용 가능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책 안내는 과거에 했으니 이제 하지 않습니다. 지우지 않았으니 찾아보세요.

*춥고 배고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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