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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141화 (141/300)
  • #   142-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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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을 먹고, 은결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게임에 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인간들이 하나같이 미덥잖아서 자진해서 하겠다고 했다. 세연과 미래가 돕겠다고 했지만, 일이 도리어 더 많이 생길 것 같은 도우미들이라 점잖게 사양했다.

    싱크대의 수도꼭지에서, 흰 포말에 휘감긴 물줄기가 시원스레 쏟아져 내렸다. 접시와, 그릇들이 점차 물 가운데 침잠해 들어갔고, 흔들리는 수면 아래서 그것들의 모습은 꺾이는 빛의 각도와 더불어 일그러졌다. 물이라는 매질을 통할 때, 빛은 저렇게 왜곡됐다. 수면이 심하게 일렁인다면, 결국 그 내부에 품고 있는 그릇의 모습은 불투명하게 왜곡되고 말 것이다. 그 불투명한 수면 아래 담긴 그릇의 모습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무엇으로 보일까?

    은결은 손을 물에 담갔다가 접시 하나와 함께 꺼냈다. 그리고 세제를 머금은 스펀지로 그 표면을 성실하게 닦았다. 물과 기름기가 묻어 번들거리던 접시는 곧 하얀 거품에 휘말렸다. 은결은 흐르는 물에 그 접시를 헹구었다. 거품이 씻긴 그릇은 반질반질하니 형광등 빛을 희게 반사하며 ‘맑았’다. 은결은 그 맑음에 미약한 기쁨을 느끼며 한 쪽으로 치웠다. 그의 손이 기계적으로 다른 접시를 쥐었다. 기계 적인 동작 이면에서, 은결은 아버지의 전언을 생각하고 있었다.

    -폴 발레리는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인이다. 시와 산문, 소설에서 각각 일류급의 성취를 남긴 그는 예술에 대해서도 음미할 만한 말을 남겼다. 그것은 ‘창작자에서 예술작품까지’와 ‘예술작품에서 감동한 감상자까지’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불투명하다는 말이다. 그는 그 분리를 통해서만 예술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만일 그 불투명성이 지워진다면, 그때야 말로 모든 예술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은결이 확신하건데, 아버지가 적은 ‘폴 발레리를 기억하렴’이라는 문장이 가리키는 지점은 저 예술론이다.

    은결은 막 물에서 꺼낸 큰 그릇을, 방금 전 그릇을 그러했던 것처럼 스펀지로 구석구석 세심하게 씻었다. 흰 거품이 일어났고, 기름때를 분해하며 더러워졌다. 은결은 물에 그릇을 헹구었다. 거품이 씻겨 나가며 ‘맑은’ 모습을 드러냈다. 기계적이지만 효율적이고 잘 훈련된 동작의 이어짐은 물처럼 부드러웠다.

    -은결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폴 발레리의 말을 극단적으로 실현한 예술작품이 있다. 뒤샹의 ‘샘’이다. 뒤샹은 그저 하나의 변기를 출품해 ‘샘’이라 이름 붙여서 내 놓았을 뿐이다. 그것은 그로서 ‘예술’이 되었다. 예술의 가치도 결국은 구조라는 ‘타자’에 의존해 이루어질 뿐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뒤샹에게서 변기 사이에 존재하는 불투명성. 변기에서 감상자 사이에 존재하는 불투명성. 그 불투명성이 그것들에 대한 무수한 담화를 끓어오르게 했고, 그 담화가 무의미한 공산품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제 그것은 현대 미술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예술작품’이 되었다.

    접시는 이제 모두 씻었다. 남은 것은 숟가락과 젓가락이었다. 네 개, 혹은 다섯 개씩, 물에 불린 음식 찌꺼기가 모두 떨어져 나가도록 세심한 손길로 수세미와 스펀지로 닦아내고는 흐르는 물에 그것들을 헹구었다. 맑아진 스테인레스제 식기는 은색 위에 반짝이며 맑게 빛을 반사했다.

    -그러니까 은결은 아버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이해한다. 삶이 하나의 예술이라면, 소통에 수반되는 오해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 오해는 도리어 삶을 가장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래. 불투명성으로 충만한 뒤샹의 ‘샘’이 현대 미술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가 되었듯이, ‘오해’야 말로 정말로 풍성한 관계의 초석일 수 있다는 말이다. 삶이 예술이 되어야 한다면, 오해는 가장 중요한 그 예술의 기초일 수도 있다-는 것이, 아버지의, 말, 이다.

    “깨끗하니 속이 다 시원하군.”

    은결은 설거지를 끝내며 후련하게 한 마디를 했다. 싱크대의 배수구를 통해 쿠르륵 소리를 내며 물은 시원하게 내려갔다. 근처의 수건에 손을 닦으며, 그는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는 미래가 앉아 TV를 보는 척 하며 적의에 충만한 시선으로 거실 중앙을 노려보고 있었고, 그곳에는 민성과 둥물원 삼총사가 세연과 함께 보드 게임 부루마블을 하고 있었다. 여기 보이지 않는 쿠로사카는 방안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오후부터 되게 저기압이라 은결은 그녀에게 말도 붙이지 못했다.

    막 세연의 차례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주사위를 양 손으로 보듬듯이 안은 다음 몇 번 흔들다가 바닥으로 떨구었다. 유면체가 한동안 구르다가 정지했다. 다 합쳐서 8개의 눈금이 나왔다. 세연은 자신의 말을 움직였고, 정지한 곳에 이르러 한숨을 쉬었다. 늑대의 대지였다. 그는 그곳에 고급 호텔을 세워놓고 있었다.

    “아- 졌네요. 파산했어요.”

    세연은 아쉽게 말하며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늑대에게 넘겼다. 가지고 있던 부동산과 호텔도 모두 매각 처분한 모양이다. 다음 차례인 듯한 민성이 주사위를 모으며 늑대를 향해 불만스레 말했다.

    “치사하게 한쪽 줄을 독점하니 이길 수밖에 없지. 그 길을 우회해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쳇!”

    “후후, 이건 당연한 전략이라고. 운과 냉철한 지성이 겸비되어야만 이룰 수 있는 우월함의 증명 같은 거지! 너희도 이기고 싶으면 쓰면 될 거 아냐. 본디 승부의 세계는 냉엄한 것! 적자생존(適者生存) 모르냐 적자생존! 세상은 이긴 놈이 다 가지는 제로섬이기 마련!”

    늑대는 유쾌하게 말했다. 현재 게임은 늑대의 완전한 우세였다. 고릴라와 여우, 민성이 남아 분전하고 있지만 여기저기 부동산이 분산되어 있는 그들과 달리 늑대는 한쪽 줄의 부동산을 독식하다 시피하고 있어서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은 한에는 피하기 극히 어려웠다.

    “수준이 고릴라하고 똑같구만.”

    민성은 어제 고릴라가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비꼬아 말했다. 고릴라와 같은 수준이라는데 늑대가 불쾌했던 듯 버럭 화냈다.

    “뭣이!”

    이에 고릴라가 분노해 그 싸움에 끼어들었다. 은결은 피식 웃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척 하던 미래는 흥미진진한 눈길로 세연을 바라고 있었다. 세연은 오른쪽 손으로 왼쪽 손목을 부드럽게 만지적거리고 있었는데, 아마 파산의 벌칙은 손목을 손가락으로 맞는 것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계속 만지다가 은결을 바라보고는 미안하게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 흑기사, 부탁해도 될까요?”

    “예. 대신에 내일 아침 식사 재료를 좀 사러 나가려는데 도와주시겠습니까?”

    “무, 물론이죠!”

    은결의 터무니없는 제안에 세연은 뛸 듯이 기뻐하며 답했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미래가 벼락 맞은 표정으로 소파에서 굳었다. 민성이 늑대의 어깨를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고릴라와 여우도 각자 한 쪽 팔을 잡고 열심히 주물렀다. 투기와 긴장에 충만한 장면이다. 전장에 용사를 내보내는 것 같았다. 은결은 섬뜩함을 느꼈다. 오늘 오후에 이와 비슷한 분위기에서 소금물을 꽤나 많이 마셔야 했다. 곧, 마사지를 끝낸 고릴라가 우정이 타오르는 눈길로 말했다.

    “가라! 네가 우리의 원한을 갚는 거다!”

    “그래!”

    동료들을 응원을 받으며 늑대가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힘차게 세웠다. 얇은 피부 아래서, 늑대의 뼈를 휘감은 손가락 근육은 맹렬한 에너지를 품고 한 순간의 폭발을 기대하며 약동하고 있을 터였다. 은결은 “큼-”하는 마뜩찮다는 소리를 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늑대가 심호흡을 한 다음, 엄숙하고도 용맹한 동작으로, 은결의 손목으로 천벌을 내렸다.

    “저, 괜찮으세요?”

    밤길을 걸으며, 세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쓸데없이 용맹하던 늑대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대신에 맞아준 은결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은결은 머쓱한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무척 유감스럽게도 늑대가 자기 손가락이 부어오르도록 때렸지만 은결에게는 별반 효과가 없었다. 은결이 평범하게 주먹을 내뻗을 때 대기가 반발하면서 전해지는 충격 쪽이 수백 배는 더 강하니 당연한 일이다. 은결은 흠, 하고 괜스레 소리를 내어 타이밍을 재어보다가 그녀를 향해 어렵사리 말했다.

    “그런데, 용케 오실 생각을 하셨군요.”

    굳이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오고자 한 것은 다소 어려운 문답이 가능한, 이런 둘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그렇죠? 후후, 저도 놀랐어요. 수행 아저씨의 권유도 있었지만, 그래도 제가 이렇게 할 수 있을지 몰랐거든요. 의외로 오빠도 가라고 권했지만요.”

    진경이 그녀에게 권한 이유는 ‘차야지, 차이면 안 된다!!’ 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세연은 은결을 향해 새하얗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웃음을 보는 순간, 은결은 이 일대에 강력한 최면 진식을 펼쳤다. 그러자 세연의 새하얗던 웃음이 요염함을 머금으며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동시에, 그녀는 방금 전과 동일인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확연하게 분위기가 달라졌다. 은결은 당장이라도 눈앞의 여성을 찢어죽일 것처럼 살기와 분노에 충만한 눈을 하고 짐승이 울듯 그르렁 거렸다.

    “푸른 이빨... 너, 세연 양에게 무슨 짓을 했지!”

    “크큭, 아무 것도.”

    어깨를 으쓱이며 은결을 조롱하듯 푸른 이빨은 답했다.

    “너어-”

    “그렇게 노려봐도 소용없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어디서 그런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은결은 분노했다. 세연이 이렇게 갑자기 변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착한 여성이었지만 내성적이었다.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이렇게 까지 변할 리가 없다. 자기의 변화에 자기도 놀랐다고 그녀 스스로도 말했다. 외부의 개입만이 이것을 설명 가능하다. 그리고 카미는 그것이 충분히 가능한 거대하고 강력한 사념의 덩어리다. 성품에 개입한다는 것, 그것은 사실상 자아를, 영혼을 뜯어고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은결로서는 분노할 수밖에 없다.

    “큭, 좆같은 씹새끼. 안 했다면 안 했다고 알아 처먹을 것이지, 어디서 지랄이야. 내가 너 따위 좆병신에게 개구라 따윌 까서 얻을 게 무어 있다고 거짓말을 할까?”

    푸른 이빨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답했다. 그의 말에서는 황당함이 엷게 읽혀지고 있었다. 은결은 아직도 발뺌하려는 그에 대해 분노하며 말을 더 하려 했다.

    “-너는-”

    “더구나 이 계집의 행동이 급변해서 주변에 ‘이상하다’고 느껴지게 되면 가장 위험한건 나지. 다른 병신들은 너를 포함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지만, 네 아비만큼은 정말로 무섭거든. 그 새끼라면 아무리 잘 숨어도 나를 찾아낼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그런데 내가 일부러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그러나 은결의 말을 철저하게 잘라내며 푸른 이빨이 말했다. 욕설이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푸른 이빨의 말은 논리적이었다. 은결의 얼굴로 당황이 스쳤다.

    “...그런...”

    은결의 반응이 즐거웠던 모양이다. 푸른 이빨을 허리를 꺽고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결을 조롱했다.

    “크크큭, 웃기는 새끼. 인간의 게슈탈트적 인식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마는 인식의 특징이 인정투쟁의 욕망과 연결되는 것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그것을 자신만은 반성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지껄이면서, 너는 벌써 세연이라는 계집이 그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정하고 있군. 네 편한 대로, 그녀를 재단하고 판단하고, 해석하고 있지.”

    “---!!!”

    은결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푸른 이빨을 웃음을 그치고, 요염하고 매혹적이고 무서운 얼굴로 은결을 바라보며, 비수를 던져내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일 웃기는 건 역시 그런 게 아니지. 네게 있어 제일 웃긴 건 너는 그렇게 반성해야 한다고 지껄이면서, 또한 실제로 그런 것을 하면서, 그런 주제에 자기가 그걸 정말로 해 낼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손톱만큼도-”

    푸른 이빨의 말을 은결은 견딜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은결의 마음을 헤집어 보았던 이 괴물은 그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말만을 골라서 한다. 언어로 이루어지는 폭력. 그는 외침을 토했다.

    “--닥쳐!”

    분노 이전에, 그것은 애원 같은 외침이었다. 푸른 이빨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즐기듯이 은결의 주변을 한 바퀴 뺑 둘러보다가 다시 어깨를 으쓱였다.

    “크큭, 재수 없는 키리야미의 후계자도 있고 하니, 이만 원하는 대로 들어가도록 하지.”

    푸른 이빨은 세연의 속으로 침잠했다. 은결이라는 애송이의 반응을 즐길 만큼 즐긴 그로서는 굳이 나와 있을 이유가 없었다. 세연의 분위기가 전과 같은 것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은결을 바라봤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어디 아프세요? 얼굴이...”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은결은 어렵게 평정을 가장하며 답했다. 세연은 그의 대답에서 슬픔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추천해 주신 원형님께 감사! 열심히 적겠습니다~

    *생각해 보건데, 이번 챕터는 20화 약간 넘기는 정도가 되지 싶습니다. 음음.

    *댓글을 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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