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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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사카는 바다를 바라봤다. 수십억년 전에도 그랬던 것 처럼 바람이 불었고, 바다의 표면은 출렁거렸다. 바다 위로 쏟아진 빛은 그 출렁임에 따라 쪼개지거나 휘어져, 무수한 물비늘이 되었다. 표면의 초록 막은 물비늘의 선명함과 함께 무척이나 짙어서, 그 아래 어떠한 것을 담고 있는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
쿠로사카는 바다는 사람의 마음 같다고 생각했다. 출렁이거나 출렁이지 않는 표면 위에, 번쩍이거나 번쩍이지 않는 빛살의 움직임을 보며 바다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모한 것 같았다. 표면 아래, 아득한 바다가 무엇을 담고 있는지는 겉으로 보아선 보이지 않았다.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외견을 보고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모하거나 폭력적이기 쉬운 것 같았다. 겉껍질이 드러내지 못하는 무수한 것들을 결국 모든 개인은 품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그 심연은 토해내는 숨결처럼 아득해서 대부분의 개인은 거기 한 줄기 빛 조차 내려보내지 못 한다. 하지만, 바다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있어도, 결국 사람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해야만 했다. 바다는 오해로 인해 슬퍼하지 않지만 사람은 슬퍼하기 마련이었다. 그 오해는 결국 차별이 되고, 주인과 노예를 나눈다.
“......”
그녀는 어제부터 은결이 해준 이야기를 쭉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 이야기를 들으며 쿠로사카는 은결에 대한 자신의 오해를 몇 가지 고칠 수 있었다. 아니, 그것은 고친다기 보다 좀더 뚜렷하게 하는 정도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사람의 마음이 바다와 같지만 자아를 가진다면, 그래서 소통의 필연은 오해의 필연이었고, 오해가 필연이라면 정정 역시 필연이어야 했으니까. 이제 그녀는 은결의 자신에 대한 오해를 정정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은결이 많은 이야기를 자신에게 해 주었던 이상, 반대로 이제 자신이 그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꺼리낄 것 없는 당연함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쿠로사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결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녀는 가볍게 바위에서 내려와 그를 향해 걸었다. 때때로 큰 파도가 발끝까지 밀려와 모래의 감촉과 더불어 발을 간질이는 감촉은 유쾌했다. 은결은 늑대, 고릴라와 함께 해변에서 멀러 떨어지지 않은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간단한 시합이기라도 한 듯, 그들은 같은 쪽을 향해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쿠로사카는 왼쪽 팔로 오른쪽 팔을 감싸 안으며, 가만히 그들의 수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곧 늑대가 멀지 않은 곳의 암초에 손을 찍고 되돌아 수영을 시작했다. 고릴라가 부랴부랴 그 뒤를 쫒았고, 은결은 서두르는 듯한 인상으로, 하지만 결국 꼴찌로서 고릴라의 뒤를 쫒고 있었다. 곧 세 사람의 별 볼일 없는 시합은 끝나고, 늑대가 왼손으로 얼굴의 바닷물을 쓸어내며 기꺼움에 물든 목소리로 외쳤다.
“푸하! 승리! 나중에 둘 다 돈 내놔! 껄껄.”
“헥헥, 젠장.”
“으음.”
뒤따라서 나온 두 사람은 불쾌한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기들을 향해 손을 내밀며 채근하는 늑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곧 은결이 근처로 와 있는 쿠로사카를 보고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쿠로사카, 너도 수영하려고?”
“음, 아니야.”
“뭐 어때, 옷은 내가 맡아줄 테니까 너도 바다에 좀 들어가. 놀러오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이왕 놀러 온 거, 역시 즐겁게 즐기는 게 제일이지 않겠어?”
“제안은 고맙지만.”
은결의 제안에 쿠로사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조금쯤 즐기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먼저 할 일이 있었다. 결심한 때가 아니고서는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될 테니까 말이다.
“그보다-”
“응?”
“-할, 이야기가, 있어.”
되물어오는 은결을 향해, 쿠로사카는 조금 얼굴을 붉히고, 어렵게 말을 끊어낼 수 있었다. 은결이 자신의 이야기로 그녀의 자신에 대한 오해를 이럭저럭 털어내었듯이, 쿠로사카도 그녀 자신의 이야기로 은결의 자신에 대한 오해를 털어내고자 할 뿐인데도,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꽤나 어려웠다. 은결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말했다.
“헤, 네가 나한테 할 얘기라니, 드문 일인걸. 뭐야?”
“그게-”
막상 입을 열려고 보니, 어떻게 말을 시작하면 좋을지, 잘 알 수 없었다. 단어의 부족이 절실했다. 단어를 모아, 문장을 만든다는 것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평소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문장이란 것을 조립해 왔던 걸까?
“음-”
그리고-
“아, 은결씨!”
-훼방꾼이 들어왔다. 갑자기 들려온 커다란 목소리에 은결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쿠로사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알고는 있는 목소리였고,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 목소리의 주인은 이곳에 있으면 꽤 곤란하지 싶은 사람이었다.
“에? 세연... 양?”
은결이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해변에서, 한 소녀가 달리듯이 걸어오고 있었다. 은결과 쿠로사카, 두 사람 모두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카미가 그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소녀, 세연이었다. 그녀 뒤로는 악마의 눈을 한 두 남정네가 은결을 향해 저주의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곧 그녀는 얼빠진 얼굴의 은결 앞에 섰고, 한 손으로 가슴을 깊이 누르며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하아하아... 정말이었네요. 오는 길에 만난 두 분이 은결씨와 동행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에, 음- 그보다, 어째서 세연 양이 이 곳에?”
쿠로사카가 자신을 향해 방금 보여주던 태도와 흡사한 모습으로, 은결은 겨우 물었다. 세연은 여전히 해맑게 웃으며, 간결하게 답했다.
“그야 수행 아저씨의 권유로 놀러왔지요.”
“......”
은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버지...’ 속으로 깊은 한숨이 토해졌다. 웬 별장 열쇠라 했더니, 이런 함정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하지만 세연도 의외였다. 설혹 꼬드김이 있었다고 해도 불과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런 대담한 일을 실행하다니, 믿기 힘들었다. 어떻게 대처 해야 할까? 그녀를 설득해 돌려보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은결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내렸다.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의 세연이 그를 향해 종이를 한 장 내밀어 보였다.
“아저씨가 은결씨 드리라고.”
무슨 쪽지일까? 은결은 그녀가 내민 종이를 받아 펼쳤다. 그 안에는 간결하게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폴 발레리를 기억하렴.
아버지다운 전언이다. 라고 은결은 생각했다. 쓴맛이 입안 가득히 퍼지는 것 같았다. 저런 글 까지 보았으니 이제 은결은 그녀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녀와는 달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것들을 화제로 삼기 껄끄러웠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따로 이야기해 볼 생각이었다. 일단 은결은 억지로 웃으며, 세연에게 말했다.
“그럼 한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세연은 환히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여름의 태양과 닮은 활달함으로 충만해 있어서, ‘눈부시다.’라는 형용사가 잘 어울렸다. 은결은 그녀의 밝은 미소를 보며 그녀의 성격이 조금, 아니 많이 변한 것 같다고 느꼈다. 그건 자신이 얼마 전 그녀에게 몹쓸 짓을 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세연이 말했다.
“후후, 그럼 옷 갈아입고 올께요.”
“예에.”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멀어졌다. 백일몽을 꾼 것 처럼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은결은 당혹감에 젖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쿠로사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직 그녀와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다.
“쿠로사카, 무슨 얘기 하려고 한 거야?”
“-아무것도 아냐!”
쿠로사카는 버럭 화내며 은결에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은결은 갑자기 화내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돌이켜 보건데,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그 가운데 자신이 그녀에게 무슨 불쾌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시선을 돌리고 멀찍이 걸어가는 그녀의 등은 완강해서, 은결은 ‘말 걸면 죽인다.’라는 아우라를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거참...’
은결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깨를 으쓱이는 정도밖에는 그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였다. 거대한 외침이 일었다.
“잡아라!”
시선을 돌려보니 민성과 동물원 삼총사가 눈을 부라리고 달려들고 있었다. 지옥의 악마와 같은 형상들이었다. 은결이 “왜?”라고 물음 틈도 없이, 늑대, 민성, 여우가 은결을 잡고 들어올렸다. 고릴라가 바다를 향해 손짓하며 포효했다.
“수장!”
“오오!”
고릴라의 외침에 맞춰 세 사람은 은결을 들고 냅다 바다에 던져 넣었고, 은결이 거품을 일으키며 수면 위로 일어서면 다시 잡아다가 바다 속에 처넣었다. 속칭 물고문이었다.
“푸, 푸아! 내, 내가 왜, 왜?!”
“몰라서 묻냐! 수장!”
“오오!”
멀리서 그 장면을 바라보며, 쿠로사카는 유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게쁘리 님의 추천에 감사를. 그리고 제게 후원금을 지원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금강문주님이 아이디를 밝히지 않으셨기에 저도 밝히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돈 보다도 그런 후원금을 전해 주실 만큼 좋아해주는 독자분이 있다는 사실이 더 감격스럽습니다.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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