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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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사카는 별장을 빠져 나왔다. 늦은 밤의 도시는 느긋했고, 파도소리는 그 느긋함 사이로 유유자적하며 밀려들었다. 쿠로사카는 천천히 해변으로 걸어나가, 바다를 바라보며 모래 위를 걸었다. 떠오른 달의 빛을 잘게 쪼개어 제 위에 떠올린 바다의 출렁임은 지금도 여전했고, 그녀는 어둠 가운데 뚜렷하게 떠오르는 그 빛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쏴아아...
밀려드는 파도소리가 그 빛의 존재감에 덧붙여졌다. 손으로 잡으면 묻어날 것 같은 짙은 질감이 일었다. 그런 시간 가운데 쿠로사카는 얼마간 걸었다. 그녀는 암석군 앞에 도착할 수 있었고, 암석군 위에 고요하게 서 있는 한 사람의 어둠에 묻힌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부지런하군."
쿠로사카가 말했다. 은결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어둠 가운데 희게 그의 웃는 모양이 드러났다. 그는 쿠로사카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은결은 가벼운 어조로 그녀를 향해 보고했다.
"아, 어서와. 역시 인구가 얼마 안 되는 곳이다 보니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 이곳을 이미 맡고 있는 분도 계실테고. 그나저나, 다른 녀석들은 다 어떻게 됐어?"
"네 동생은 내일을 기대하며 일찌감찌 잠들었고, 다른 사람들은 포커를 하다가 바닥에 쓰러졌지."
그러면서, 쿠로사카는 가볍게 바닥을 박찼다. 해변의 모래가 한웅큼 주변으로 튕겨나갔고, 그녀의 몸은 바다 위의 쪼개진 빛의 한 조각처럼 아름답고 가볍게 떠올라 은결의 옆에 착지했다. 은결이 말했다.
"다들 잘 놀았으니까 피곤할만도 하겠지."
"그런데, 무얼 그렇게 보고 있어?"
"-은결을, 보고 있어."
"은결?"
쿠로사카는 곤혹스런 얼굴로 되물었다. 그녀는 은결의 이름으로서의 '은결' 이외의 뜻을 알지 못한다. 사실 '은결'의 뜻을 아는 사람은 한국인 가운데서도 많은 편은 아니다. 은결은 희미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은결은, 내 이름이지만, 저렇게 수면 위에 빛이 부서지는 모양이기도 하거든. ...밤인데도, 은결은 아름답지?"
은결이 보언했고, 그제서야 쿠로사카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은결과 마찬가지로 바다를 바라봤다. 쪼개진 빛살이 물결을 타고, 파도와 바람에 맞춰 정적의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선선한 어조로 답했다.
"그래."
"-은결은 빛의 쪼개져 물 위에 떠오른 모양이니까 스스로가 빛이기도 해. 그래서 그것은 어디서든 상관없이 아름다워. 이런 빛없는 밤에서도 말야. ...나로서는, 도무지 꿈꾸지 못할 아름다움이지. 그래서 은결은 내게 과분한 이름이야."
"과분한 이름 따위는 없어. 그건 지금을 담는게 아니라 미래를 담는 거니까."
쿠로사카는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그렇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은결은 그녀의 대답에 한동안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로는 쓸쓸하지만 만족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도 그렇군. 사람의 이름이 담는 것은 흔히 이념이니... 그리고 피곤할텐데 들어가 쉬어. 만일을 생각한다고 해도 나 혼자면 충분하니까."
은결이 제안했다. 으흠, 하고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고 쿠로사카는 그것을 거절했다.
"딱히 너를 도우러 나온 것은 아냐. 단지 오늘 오전에 들었던 이야기의 뒷 부분을 듣고자 찾아온 거니까."
그녀의 말에 은결은 잠깐 놀란 표정을 했다. 그녀가 그 이야기에 계속해서 관심을 보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다. 하지만 은결은 이내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러고보니, 그런 약속을 했었지."
"그래."
쿠로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결은 마음 속으로 이리저리 말을 고라다가, 파도가 해변에 닿는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쿠로사카, 나는 너를 믿어."
"무, 무슨."
갑작스런 말이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쿠로사카는 잠깐 균형을 잃었다가 다시 자세를 회복해야 했을 정도였다. 심장이 높게 뛰는 소리를 기를 운용해 은결에게 들리지 않도록 감추면서, 내심 그녀는 밤이길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이 뜨거웠던 탓이다. 하지만 은결은 아무런 동요도 없는 평화로운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나의 너에 대한 신뢰는 굉장히 강한 거야. 한때 너는 나를 죽이려고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너는 진심으로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 한점의 의혹없이 나는 너를 믿고 있어.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렇게 무방비하게 네 곁에 있지 못하겠지. 너의 검은 무서우니까. 특히 네가 키리야미를 해방한다면 내게 너를 상대할 방법은 없어. 나는 언제나 초조해하며 너의 움직임을 체크해야 할 거야. 이렇게 달빛을 바라보며 대화를 하는 것도, 내가 너를 굳건하게 믿고 있지 때문에 가능해. 너는 나를 죽이지 않을거고, 강력한 동료가 되어 줄 것이라고, 나는 의혹 없이 믿어."
"음."
쿠로사카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기쁨과 솔직한 회한이 기묘하게 뒤엉켜 묵직하게 그녀의 가슴에 자리했다. 허리에 찬 키리야미의 감촉이 새삼스러웠다.
"하교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교문을 나서기까지, 아이들이 많아서 길이 복잡해.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그냥은 지나갈 수가 없지. 하지만 나는 언제나 별 어려움 없이 페달을 밟고 미래와 함께 교문을 나설 수 있어. 그들은 내 앞을 언제나 조건 없이 양보해 주거든. 그걸 믿기에 나는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하지."
"......"
쿠로사카는 침묵하고, 은결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녀에게, 이런 침묵은 이제 어색하지 않았다. 은결은 잠시 달을 바라보다가, 그 빛을 담은 부드러운 눈매로 쿠로사카를 돌아보며 터무니없는 질문을 했다.
"-쿠로사카, 달에 가 본적이 있어?"
"있을리가 없잖아."
쿠로사카는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어? 혹시 네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너를 달에 데려갔다가 돌아왔을 수도 있는거 아냐.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뿐일 가능성은 분명히 있잖아."
"그-"
은결이 웃으며 물어온 것에, 쿠로사카는 말문이 막혔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부정당하는데서, 강한 반발심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걸 정당화할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 이외에 증거로 내놓을 것이 없으나, 최면을 다루는 그녀는 기억이 얼마나 허황되기 쉬운 것인지도 충분히 알고 있다. 은결은 물음을 이었다.
"또, 이런건 어떨까? 이 세상 전부가 어느 영화에 나온 것 처럼 프로그램된 세계인거야. 우리는 기계에게 양육되면서 뇌의 자극을 실재 세계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거지. 이걸 반증할 수 있을까?"
"---음."
이어지는 난문. 쿠로사카는 답할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오늘 아침에 했던 이야기와, 기차에서 했던 게임과, 바베큐를 먹으면서 들었던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이제 어렴풋하게나마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저 은결의 말을 기다렸다.
"-비트겐슈타인은 '확실성에 대하여'라는 저작에서 이 문제를 논해. 그리고, 그런 회의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해. 왜냐하면, 그것들은 축(軸)명제에 속하거든. 즉, 회의 자체가 성립 가능하도록 하는, 믿어지는 세계의 틀이라는 거지. 그래서 그걸 의심하는 것은 사실 그 회의 자체를 부정하는 효과를 지니게 되고, 무의미하게 되는거야."
"잘, 모르겠군."
쿠로사카는 순순히 고개를 저었다. 은결은 상세하게 설명을 더했다.
"그러니까, 이런 거야.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했고, 자신이 있는지조차 의심했지. 그래서 자신이 없고서는 의심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코기토 에르그 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하게 되지. 축명제란 여기서 '나'의 존재 같은 거야. 의심해 봐야 아무 소용 없는 것들이지.
단지 믿어지고, 그 믿음을 통해 세계라는 해석된 사태의 총체를 구성하는,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은 의심하는 것은 너무 큰 비용을 필요로 하지. 사람은 자신의 다음 발걸음에 대지가 무너질걸 걱정하면서 걸을 순 없는 거잖아. 다음 들이키는 숨에 독가스가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수도 없어. 그런 의심은, 삶을 파괴하지.
실제로 그런 의심을 끊임없이 하는 사람들은 있어.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확실한 증거를 내놓을 수 없지만, 의심없이 '미쳤다'고 말하고 있잖아? 그건 그들의 주장이 틀렸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런 의심이나 주장이 그들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인거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었다. 거기에서 쿠로사카는 은결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의심할 수 없는 삶의 전제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의심하는 것은 무의미함을 넘어, 파괴적이기까지 한 것 같았다. 은결은 거기서 말을 잠깐 쉬고, 이제까지 했던 이야기를 간결하게 종합했다.
"요는,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믿음으로서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거야. 삶의 근본은 그래서 의심이 아니라 신뢰고,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야."
은결은 강건하게 말했다. 그러나 쿠로사카는 그 강건한 선언이, 어딘지 위태롭다고 느꼈다. 그의 말은 '-이렇다.'가 아닌 '-이렇게 되어야 한다.'인 것 처럼 들렸다. 이름같은 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밀턴 프리드만의 자유론에 반대하는 것은, 거기서 파생된 경제 이론이 사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심지어 파이를 키우는 것 조차도 실패한 주제에, 부의 불균등만을 부추긴다는 파산된 이론이라는 것 이상으로, 그의 주장이 타자를 점점 더 적으로 보도록 만들기 때문이야.
인간을 물질을 욕망하는 주체로 보고, 그의 행동 동기를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파악하면서, '인비지블 핸드'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욕망의 추구를 정당화하는 그 이론의 궁극적인 도달점은, 상대의 모든 행동은 결국 욕망에 있을 뿐이란 전제를 모든 인간관계의 근저에 깔아 공리로 만들테고, 그렇다면 그 사회는 결국 홉스가 말한 것과 같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대립상태가 될 수 밖에 없을 테니까. 타인에 대한 믿음이란 철없는 바보의 헛소리가 되겠지. 승부의 세계는 비정한 것이니까 말야."
'승부의 세계는 비정하다.' 는 은결의 쓸쓸한 말을 들으며 쿠로사카는 가슴 한 켠이 시큰했다. 그것은 얼마전에 은결이 그녀를 향해 물어왔던 '승리'를 떠올리도록 했다. 타자를 짖밟는 '비정함'만이 승리를 보장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슬픈 일이겠느냐던 그 말-
"거기에는 우정도, 사랑도, 신념도, 단순한 물적 욕망으로 환원되어 있을거야. 더 큰 물적 욕망을 취득하는 것이 위대한 인비지블 핸드의 이론으로 선한 것으로 받아들질 테고. 이런 사회에서 종국적으로 작은 정부는 필연적으로 가장 거대한 정부보다 거대해질 수밖에 없겠지. 그의 자유론은 사회를 유지하는 '축명제'에 해당하는 것들을 모두 파괴할테니까.
벌써, 자식의 목숨, 남편의 목숨, 아내의 목숨을 제 손으로 죽여 돈을 벌어들이고자 하는 범죄는 드물지 않고, 그래서 보험회사는 그런 믿을 수 없는 회원들을 검사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소비하고 있지. 가장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 기초적인 인간관계에서, 벌써 욕망은 간단히 승리하고 있는 거야. 남편이 아내를,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지. 같은 일이 사회 전체를 통해 일어날 테고, 일어나고 있어. 그래서 장래에 지금 대부분의 사회에서 하지 않는 무수한 감시들이, '최소한'의 안전과 평등을 위해 필요할테고, 그건 엄청난 규모의 행정력을 요구하게 되겠지."
"...그건, 네가 말했던 그 지옥이겠군."
쿠로사카는 간평했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서 아무도 이익을 얻지 못하는, 간혹 타인을 믿었던 이들은 짖밟히고 착취당하는, 주체못할 젓가락을 들고 제 혼자서만 밥을 억지로 먹으려 드는 이들만이 남아 있는 지옥이겠지. 그러니까, 나는 밀턴 프리드만의 자유론에 강력하게 반대해."
그리고, 은결은 다시 부드러운 물음을 쿠로사카에게 던졌다.
"쿠로사카, 달에 가 본적 있어?"
"-없어."
처음과 같은 그 질문에, 쿠로사카는 이제 마음 편하게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은결은 말했다.
"나도 없어. 증명할 방법은 아무 것도 없지만, 나는 내가 달에 가지 않았다는 것을 믿어. 그 믿음 위에, 내 삶은 성립하고 있지. 그러니까 쿠로사카, 나는 내가 달에 가지 않았다고 믿듯, 내가 너의 선의와 조력을 믿듯, 내가 자전거를 탈때 내 앞을 걸어가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 없이 비켜줄 것을 믿듯,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그랬으면 정말로 좋겠다고 생각해. 그토록 완전하고 투명한 믿음은, 물론 아담의 언어를 가지지 못한 인간에게 무리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말야..."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단지 희망일 뿐인 언어를 외부로 토하며, 은결은 바다를 바라본다. 은결이 아름다운 밤 바다다. 비루한 자신은 결코 저토록 아름다울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은결은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쿠로사카는 은결과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파도 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그 위에 부서지는 빛의 휘황함도 그치지 않았다. 바다 바람이 불었다.
*후쿠야마의 저서 '트러스트'는 실제로 신자유주의 정책시행 이후 미국사회의 전체 신뢰도가 급격히 낮아지는 현상을 보임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는 그 신뢰도 저하의 범인이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만.
*지난화의 이야기는 기차에서 한 게임과 연결해서 이해하시면 의미가 명확해 집니다. 이런건 원래 숨겨둬야 하는 건데. 음.
*즐거운 명절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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