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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135화 (135/300)
  • #   136-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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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는 눈을 떴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린 앞에, 희미하던 세상이 점차 명확한 모습을 되찾았다. 낮선 천장, 낮선 가구, 낮선 침대의 감촉- 그제서야 미래는 이 곳이 집이 아니라 강릉시 청해도에 있는 해변가의 별장이라는 것을, 자신이 이 곳에 도착하고 먼저 한 일이 낮잠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미래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쏴아아- 쏴아아- 하고 파도 소리가 들려왓다. 그러나 푸른 청량감을 느끼게 하는 그들 소리에도 미래의 머리속을 매운 몽롱함은 씻어지지 않았다. 그 혼곤 가운데, 낮잠을 자는 동안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녀도, 은결도 지금의 반이나 될까 싶게 작았던 시절의 한 단편을 되돌린 것이었다.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그날 미래는 방으로 돌아가다가 은결이 하늘을 올려도 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무거워서, 미래는 반가운 마음에도 은결을 부르지 못하고 묵묵히 그 등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은결은 이내 손을 들더니 눈가를 닦는 것을 보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미래는 그것을 보고 괜히 슬퍼져서 수행을 찾아갔고, 성급하게 물었다.

    '아빠, 오빠가 울어요.'

    '...슬픈 이야기를 들어서 그렇단다.'

    수행은 쓸쓸한 웃음과 함께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미래는 호기심에 눈망울을 빛내며 아빠를 보채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다 들은 미래는 볼을 퉁퉁 불리고 아빠에게 감상을, 그리고 질문을 꺼냈다.

    '하나도 안 슬퍼! 오빠는 이런게 왜 슬프다는 거야?'

    '그러게나 말이다.'

    그리고 수행은 쓸쓸하지만 자상한 미소와, 그 미소를 닮은 손길로 미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버지의 손길을 느끼며, 그때 미래는 아버지의 미소와 오빠의 울음 사이에 어떤 공유되는 연결이 있는 것만 같아서, 자그마한 소외감을 느꼈었다.

    미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불투명한 유리창을 너머 새하얗게 부서진 여름의 태양빛이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우응..."

    왜 갑자기, 이런 꿈을 꾸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 기억과 연결될만한 어떤 일을 겪었던 것도 아닌데. 가슴 깊은 곳에서 아릿하게 치밀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고통과도 반쯤은 닮아 있고, 슬픔과도 반쯤은 닮아 있고, 그리움이나 쓸쓸함과 닮아 있는 것 같고, 그렇지만 정확히 어떤 것을 끄집어 말할 수는 없이 괜히 치밀어 올라, 한 줄기 눈물로 변해 씻겨내려질 것 같은, 그런 감정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아빠가 이야기 해 줬던 그 슬픈 이야기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은 틀림없이 전혀 슬프지 않은 이야기 였었는데... 마음이 자신의 결을 이리저리 두들기며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 끄집어진 기억 위의 먼지를 후후 불어 확인해 나갔다. 하지만 기억의 결은 많이 엉크러져 있었고, 먼지는 짙어서, 오래된 기억은 쉽게 떠오르지도, 명확해 지지도 않았다.

    "으응..."

    문득, 어떤 향기가 미래의 코끝을 스쳤다. 낮선 건물의 냄새는 아니었다. 그것을 넘어서 그녀의 후각을 자극하는 향기는 익숙한 카레향이었다. '아, 오빠다!' 미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간간히 은결이 만들어주는 카레를 먹어보곤 했던 그녀였기에 이 향기는 익숙했다. 그러고보면 이야기라는 것도 은결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자기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오빠는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더구나, 음식 냄새를 맡자니 배도 더 고파져 왔다. 미래는 방문을 열고 부엌 쪽으로 나갔다.

    "음."

    넓고 깨끗한 공간이 펼쳐지듯 그녀를 맞이했다. 인정하기 조금 배아픈 일이지만, 이 별장은 우리 집 보다 더 좋은 것 같다고 미래는 생각했다. 하기야. 그건 올때부터 느끼고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현관에는 채 정리되지 않은 가방과 물건들이 한 곳에 모인채 늘어서 있었고, 휑뎅그랑하니 인기척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바다에 간 모양이다. 부엌으로 들어가니, 큰 솥을 국자로 느긋하게 젖고 있는 은결의 모습이 보였다.

    "오빠~"

    미래는 반갑게 은결을 부르며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은결은 자상하게 웃는 얼굴로 동생의 애교를 맞이했다.

    "깨어났어? 잘 됐다. 마침 점심 준비가 다 됐으니까 밖에 나가서 놀고 있는 녀석들 좀 불러와."

    "응. 그런데-"

    "그런데?"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은결은 피식 웃어 그녀의 말을 가볍게 받아 넘겼다. 미래는 은결을 뒤로 하고 별장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그녀는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흘렸다. 그녀는 어렸을 적에 아빠에게서 들었던 슬픈 동화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결국 묻지 못했다. 이상하게 은결의 분위기가 약간 무거워 보였기에, 거기에 혹시라도 무게를 더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별장은 해변에서 멀지 않은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미래가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가자 곧장 바닷바람을 바로 맞이하는, 그래서 바다를 향한 시야가 넓게 펼쳐지는 곳이었다. 여름의 초입이라 동해의 해변이라 해도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파란 바다 위에서 부서지는 햇살이 싱그러웠고, 진한 소금냄새가 바람에 뒤섞여 날아오는 것이 어딘지 머나먼 고향을 느끼게 했다. 미래는 잠시간 그 바람을 느끼다가 여기저기 드문드문 흩어진 사람들을 좁은 눈으로 살펴 일행이 어디쯤 있는지 체크하고는 빠른 발걸음으로 그들을 향해 갔다.

    "거기서 뭐 해요?"

    가까이 가 보니 세 사람이 모여 음충맞게 낄낄대고 있었다. 고릴라, 여우, 민성이었다. 수영복을 입고 다들 맨살의 태반을 내어놓는 모습을 보는 것은 해변이라 해도 역시 민망한 느낌이 들었다.그들은 미래가 온 것에 반가운 모습을 보이며 몸을 돌렸다. 머리만 내놓고 있는 늑대가 보였다. 미래가 설명을 요구하기 전에 고릴라가 자랑스런 기색으로 그녀에게 설명했다.

    "방금전까지 수영 시합을 했거든. 늑대가 꼴지를 한 탓에 벌칙을 받고 있지."

    그러면서 은근히 허리에 손을 대고 가슴을 내밀어 보였다. 몸매에는 자신이 있다는 무언의 증거였다. 확실히, 고릴라의 몸은 그 또래 고등학생들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근육으로 포장된 건장하고 잘 완성된 몸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래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될 수 없었는데, 그건 은결과 비교할 때에 역시 많은 손색이 있기 때문이다.

    "헤에- 그럼 선배는 몇 등 했나요?"

    "나, 아 나야- 크악!"

    멋쩍은 얼굴로 답하려던 고릴라가 '짜-악!' 하는 달라붙는 소리와 함께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숙였다. 민성이 고릴라의 등을 냅다 내쳤기 때문이다. 미래 앞에서 잘난 척 하려던 꼴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평소처럼 털레털레한 태도로 미래에게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고릴라는 육상동물이고 나무에서 살기 때문에 꼴지 바로 앞이었지! 일등은 이몸이 했고! 그런데 미래는 수영복으로 안 갈아 입어?"

    기대하던 모양이다.

    "나는 오빠하고 같이 바다에 들어가려고 해요. 그런고로, 오빠가 점심 준비 끝났다고 하니 다들 얼른 와요."

    "응."

    "이제 막 타오르던 참인데~"

    "으으으으..."

    "이 자식들아! 얼른 꺼내!"

    미래의 말에 각자 나름대로의 반응을 보이며 별장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미래는 다시 주변을 둘레둘레 살피다가 민성에게 물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안 보이는데..."

    "아, 쿠로사카? 쿠로사카라면 저기-"

    그러면서 민성은 손가락으로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 위를 지적했다. 과연 그곳 바위 위에 쿠로사카가 앉아 바닷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수영복 위에 가볍게 봄잠바 같은 것을 걸치고 있는 그녀는, 아마도 바다에는 아직 들어가지 않은 것 같았다. 그야 어쟀든, 잠바로 가리운 허리 아래로 드러난 두 다리의 선이 그리는 조형미는 놀라웠고, 때때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기품있는 손동작으로 정리하는 그녀의 모습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그녀가 그곳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주변의 풍취가 서너배는 더 살아나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으으음...'

    결국 미래는 억누르기 힘든 패배감을 느끼며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마음 한 구석에서 나도 한 일년만 있으면 저 정도는! 이라는 외침이 거세게 토해졌지만, 미래의 일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로, 외상쓰고 현실로 끌어당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래는 방향을 돌려, 민성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후훗, 선배 잘 해봐요."

    "에, 응. 후후후."

    미래가 응원해 주자 민성은 얼굴을 붉히며 기뻐하고는 그녀를 부르러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정면 대결로 이기기 힘들다면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면 된다는 판단이다. 이른바 차도살인지계랄까.(그럴리가!) 그때 쯤 해서 늑대도 겨우겨우 구덩이에서 빠져 나와, 일단 간단하게 모래를 씻어내야 겠다며 바다에 다시 몸을 담그려 하고 있었다.

    미래는 일행이 다 모이길 기다리며 다시 주변을 긴 시선으로 살폈다. 바람은 시원하고, 햇살은 밝고, 바다는 맑았다. 미래는 싱그러운 미소로 그들 해변의 정취를 맞이하며, 이 일주일은 꽤 즐거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바다에서라면 오빠도 즐겁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웃음을 본 뒤로 질문은 미뤄둬도 괜찮으리라 싶었다.

    "후아-"

    해풍은 맞으며, 미래는 앙금을 토하듯 숨을 토했다.

    *본디 주요 캐릭터 능력치는 좀 숨겨두는게 흥행에 도움이 되는 법이죠. 후후.

    *무지무지 긴 챕터가 될 것 같은 예감? 나눌걸 그랬나. 쩝.

    *성원을 합시다 성원을 합시다 성원을 합시다 성원을 합시다...(웅얼웅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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