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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133화 (133/300)

#   134-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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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의 역은 월요일이라는 범주에 걸맞게 붐비고 있었다. 쿠로사카는 학교로 향하지 않는 아침의 대기가 지니는 신선함을 이질적으로 느끼며 약속한 대기실로 향했다. 지정된 시각에서 20분 정도 여유를 두고 있었지만, 대기실에는 은결이 먼저 와 있었다.

은결은 언제나 그렇듯, 대기실의 한 좌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출간된지 시간이 꽤 지난 듯, 겹쳐진 페이지는 삭아 싯누런 색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 옆에는 큰 짐가방 하나가 묵묵하게 서 있었다. 언제, 그리고 어디서나. 쿠로사카는 은결과 책이라는 조합은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그 모습에서, 쿠로사카는 얼마전 옥상에서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했다. 그는 자신을 이기려는 쿠로사카에게, 타자의 소망을 꺽어 이루어지는 '이김'에 집착하는 것은 진정한 패배자를 만들고자 하는 행위이며, 그래서 슬픈 것이 아니냐는 말을 했었다. 쿠로사카는 그 말에 다른 말을 되돌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은결이 말하는 그런 승리를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은결을 자신의 힘으로 짖밟아 그 위에 서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바랬던 것은, 기껏해야, 어깨를 마주하는, 그런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무수한 책읽기로, 그 정교한 사유로, 그 엄밀한 체계로, 은결은 그녀를 이해해 주지 않았다. 도리어 그 무수한 책읽기는, 그 정교한 사유는, 그 엄밀한 체계는, 그녀가 비집고 들어가는 것을 완강하게 막았을 뿐이다.

"네 동생은?"

그날의 일을 다시 생각하자니 심술이 나기도 해서, 그의 평정을 깨고자 쿠로사카는 불쑥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 달리 은결은 놀라는 기색 없이 그저 책을 덮고 그녀를 올려다 봤다.

"밖에. 시간되면 돌아올거야."

쿠로사카는 그 대답을 들으며 은결의 무릎 위에 올려진 책을 봤다. 한글로 인쇄된 고루한 타이틀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대게의 사람들에게 생소하고 딱딱하게 느껴질 제목이었다.

"흐응. 자본주의와 자유라. 재밌어?"

"글쎄... 단적으로 말하면 재미없어."

대답은 곧장 돌아왔고, 쿠로사카는 은결의 대답에 다소 놀라움을 느꼈다. 돌아온 대답에 강한 불편함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책에 대해 이렇게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표하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그녀는 당연한 반문을 이었다.

"그런걸 왜 읽어?"

"음-"

은결은 그 질문을 받고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를 생각했다. 서재 앞에서 피서 도중에 볼 책을 몇권을 고르던 도중, 과거에 한 번 읽고 던져 두었던 이 책이 계속해서 눈에 밟혔다. 눈에 밟힐 때마다, 은결의 머릿속에서는 부드럽게 앞으로 나가던 자신의 자전거가 떠올랐었다. 자전거. 그래. 자전거였다.

"자전거... 때문이랄까."

"자전거?"

쿠로사카가 무슨 영문을 모를 소리 하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은결은 서둘러 고개를 흔들어 방금 한 말을 무마시켰다.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음, 싫더라도, 읽어야만 하는 책들이 때로는 있거든. 시카고 학파의 대장인 밀턴 프리드만이 쓴 이 책은, 현대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위하는 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간결하게 소개하고 있는, 고전적...이라고 하긴 부족하겠지만 입문적 저술이니까. "

"흐-응. 어떤 내용이길래?"

쿠로사카가 물었다. 은결은 가볍게 웃으며 설명 대신 질문을 되돌렸다.

"음, 너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불가분의 관계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으면 따로 떨어져서 추구될 수 있는 이원적인 체계라고 생각해?"

"별로 생각해 본적은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경제제도고 민주주의는 정치제도니 떨어뜨려 생각해도 별 상관없는 거 아냐?"

쿠로사카는 그 질문이 책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리라 짐작하고 답했다. 그녀의 답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은결은 그녀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이며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그것이 흔한 생각이긴 한데, 밀턴은 이 책에서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해. 경제학과 정치학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심지어 특정한 경제제도에는 특정한 정치제도만이 결합 가능하다고 보지. 그가 여기서 논증하고자 하는 것은, 그래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필연적인 관계에 대한 것이고, 자본주의만이 민주주의를 성립가능하게 한다는 주장이야."

"자본주의만이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라."

쿠로사카는 은결의 말 가운데 핵심을 반복해서 읊조렸지만, 실상 그녀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그의 설명보다는 태도였다. 그녀는 은결의 설명이 평소보다 훨씬 건조하다고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모래를 씹어 삼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손등으로 사포를 문질러 대는 것 처럼 꺼끌꺼끌한, 그런 설명.

"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그러니까 그가 주장하는 것은 이런거야. 한 종류의 상품이 여러 회사에서 만들어져 그 가운데 내가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할 '자유'는 자본주의만이 가능하게 하지. 내가 직업을 바꿀 '자유'는 여러 직종의 존재와 그 직종에서 인력을 요구하는 경쟁 사이에서만 가능하지. 사회 전체가 이러한 경쟁으로 충만할때, 개인은 더욱더 자유로워지고, 그 자유는 국가의 간섭을 넘어서는 영역으로까지 확장 가능한 거지.

그러니까 결국 자유란 여러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말이고, 이런 의미에서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요구하는 자본주의만이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거야. 그것만이 여러 선택지를 가능하게 해 주거든. 정부가 모든 일을 떠맡게 되면, 그들은 독점적인 한 집단으로서 위치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여러 선택지가 있을 수 없고, 그래서 개인에게는 최소한의 선택지만이 주어지지. 결국, 억압되는거야-"

은결의 설명은 논리적이었지만, 태도는 여전히 자갈을 마주 가는 것 처럼 거칠었다. 문득, 쿠로사카는 은결의 이 거친 태도가 낮설지 않다고 느꼈다.

"-꽤, 그럴듯 하지?"

설명을 끝내고, 의견을 되물어 오는 웃음이 만들어진 것 처럼 느껴질 정도로. 쿠로사카는 이 글에 대한 은결의 거부감이 굉장히 거대하다고,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왜 이렇게 거부감을 가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쿠로사카에게 은결이 설명한 논리는 그저, 그럴 듯한, 그리고 꽤 재미있는 의견인 것으로 여겨질 뿐인 의견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상을 간단하게 전했다.

"그렇군. 하지만 그것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나는 잘 모르겠는걸. 일단 나는 오늘 네게 들은게 최초야.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보기엔 너무 낮선 논리인것 같군."

"아니야. 이 이야기는 굉장히 중요해. '굉장히'를 서너번쯤 더 반복해서 넣어도 별 문제가 없을거야. 왜냐하면, 이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자본주의 너머'를 꿈꿀 수가 없거든. 자본주의는 민주주의 만큼이나, 그러니까 만인의 자유를, 만인의 인권을 인정해야 하는 것과 같은 만큼, 당연하고 위대한 것이 되니까. 이 이야기대로라면 자본주의만이 그것들을 보장해 줄 수 있게 되기 때문이지."

쿠로사카의 물음에, 은결은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답했다. 그리고 답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면, 자본의 논리에 따라 무수한 사람들이 벌레취급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는거야. 그렇지 않으면 훨씬 더 많은 이들이 고통받게 될 테니까. 이게 그나마 최선인거야. 우리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거야. 이 너머를 감히 꿈꾸어선 안 되는거야."

이어진 답의 문장은, 하나하나가 못을 박는 것 같은 말이었다. 반론 불가능한, 철저하게 두껍고 튼튼한 못을 암벽에 세게 박아 넣는 것 같은, 그런 말. 거기서, 쿠로사카는 어째서 이런 은결의 태도가 낮설지 않게 느껴졌는지를 깨달았다. 지금 은결이 취하고 있는 설명의 태도는, 바퀴벌레로 '변신'했던 사람의 사념체를 처리하고 나서 그가 보여주었던 태도와 지극히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때, 중요하고 강력하지?"

분노? 아니, 체념? 어쨌거나 곧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웃음과 더불어, 은결은 말했다. 쿠로사카는 초조함 같은 것을 느꼈다.

"너는... 그 주장에 반대하는 것 같군."

다시 자전거를 떠올리며, 은결은 말했다.

"그래. 나는 이 주장에 반대해. 어느 정도는, 사실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아. 그렇지만 이 글의 주장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고, 그래서 재고되어야 하는---"

"여어-!"

은결은 갑자기 들려온 활기찬 목소리에 설명을 멈췄다. 두 사람은 함께 시선을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렸다. 민성이 여름을 맞이해 시원한 차림을 하고서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동물원 삼총사가 마찬가지로 시원한 차림을 한 채 다가오고 있었다.

"나중에 얘기해."

"...그래."

은결은 책을 자리에 놓아두고 친구들을 맞이했다. 쿠로사카는 마음 한 켠에서 아쉬움을 느끼며 은결의 뒤를 따랐다.

"오다가 만난 모양이지?"

"응, 정류장에서 내려서 역으로 오는 길에 만났지. 껄껄."

민성이 유쾌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리고 그는 얼른 은결 옆 정확히는 쿠로사카에게 다가가 친한척 굴었다. 물론 쿠로사카는 친절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그 뒤에서 고릴라가 성급한 얼굴로 두리번 두리번 주변을 살피며 은결에게 채근하듯 물었다.

"그런데 미래는? 미래가 안 보이네?"

고릴라 뒤에서 여우와 늑대가 시시덕 거리며 껄떡대는 그의 태도를 조롱했다. 고릴라는 사나운 눈빛으로 둘을 압박했다. 늑대와 여우가 찔끔, 몸을 움츠렸다. 그 광경을 보고 은결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곧 올거야. 밖에서 기차 시간 될 때까지 떼우기로 했거든. 그보다 분담한 물건은 다 챙겨왔지?"

"물론이지."

일동은 두툼한 가방을 은결에게 내보이며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다들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모습이었다. 이 피서에 대해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던지를 드러내보이고 있었다.

"오빠!"

그리고 예고했던 대로 얼마있지 않아 미래가 대기실로 돌아왔다. 그녀가 돌아온 시점에 은결은 시계를 바라봤다. 기차 출발 시간 까지 이제 25분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홍이님과 누님연방님의 추천에 감사를~ 기대하시는 대로 좋은 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천유마님의 꾸준한 응원에도 감사~ 선호작 5000을 넘겼는데, 모두 여러분의 응원 덕분.(근데 조회수가 안습.ㅠ_ㅠ)

*마셜님은 목표 달성 하셨던데, 열심히 하셔서 부르디외 만한 사회학자가 되시길. 껄껄. 다른 분들도 노력한 만큼 좋은 성과 있길 바랍니다.

*청해도는 가상 공간. 제가 여행끈이 짧아서 어설픈 리얼리티 추구하느니 만들고 만다! 를 모토를 삼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중립인 공간의 필요성도 좀 있고.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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