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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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햇살이 강렬하게 아스팔트를 데우며 시계를 일렁이게 하는 가운데, 백색 도장의 새침함으로 눈부시게 빛을 쪼개는 강철의 거조가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일본에서 막 도착한 비행기였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뒤섞인 무수한 사람들이 거기서 내렸다. 그들 가운데, 백발이 유독 눈에 띄는 한 노인이 좁은 시선으로 이 땅을 돌아보다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른 이들과 보조를 같이 해 내려왔다.
"박은결."
담임 선생이 이름을 불렀다. 은결은 자리에서 일어나 교단으로 나갔다. 담임은 그에게 종이 한 장을 건냈다. 은결은 무심한 손길로 그것을 받았다.
"그린 듯한 성적이구나. 내년에는 좀더 열심히 해 보렴."
"예."
담임의 말은 은결의 성적 그래프가 거의 완전한 직선을 그리고 있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은결의 성적은 1% 안쪽에서 미약한 차이를 그려낼 뿐,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일부러 그렇게 그려내기라도 한 듯한 형태였다. 은결은 내심 내년에서는 쉬운 일은 아니지만 3% 수준에서 성적에 굴곡을 그리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흐응. 이렇게 보니 티가 확 나는군."
쿠로사카가 은결의 성적표를 보며 말했다. 그녀는 은결에 앞서 성적표를 받았다. 전교 10등, 이 반에서 2등이었다. 일본인이기 때문에 까먹은 점수를 생각하면 사실은 1등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 하지만 시험 점수는 조정할 수 있어도 상대적인 위치 조정하기는 도리어 어려워서 말야. 이번 학기는 시험 수준이 일관되어 있어서 이렇게 됐지. 보통은 어려운 시험, 쉬운 시험, 그럭저럭인 시험, 뭐 모의고사하고 합쳐서 그렇게 뒤섞여 주는 덕분에 그냥저냥 쳐도 좀 굴곡이 생기는데."
히죽 웃으며 은결은 쿠로사카의 말을 긍정했다. 쿠로사카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성적표를 바라봤다. 은결의 반 밖에 그려넣어져 있지 않은 그래피는, 하지만 은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높은 지점에서 거만한 선을 쭉쭉 긋고 있었다. 그렇지만, 은결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보면 그 거만하고 높은 그래프의 그림이란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 쿠로사카는 내심 혀를 차고, 화제를 돌릴겸 은결에게 물었다.
"그런데 섭외는 끝났어?"
"응. 어제 아버지께서 며칠간 대신 도천시를 순찰해 주실 분들을 만났대."
"다행이군. 피서지라던가, 그런 건 아직 안 정해졌고?"
"오늘쯤 아버지께서 결정해서 알려주시기로 했어. 결정나면 연락할께."
본디 미래와 친구들끼리 협의해 결정하기로 했지만, 이야기를 들은 수행이 좋은 장소를 알아봐 주겠구마, 하여 그 전까지 협의했던 내용을 모두 취소하고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피서의 즐거움은 사실 피서 자체보다 피서 가기에 앞서 이런 저런 준비하는데도 상당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몇몇, 특히 민성은 이 결정에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래."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탄식과 기쁨이 교차하는 성적표 전달은 모두 끝났다. 그리고 이제는 성적표에 탄식하던 이들도, 기뻐하던 이들도 상관없이 모두 들뜬 표정으로 담임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지루한 방학식도 끝났는데 얼른 마치자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그런 압력을 가중하기 위해서인양 옆 반에서 왁자란 소란이 터져나오며 학생들이 복도로 쏟아졌다. 담임은 피식 웃으며 간결하게 말했다.
"이제 곧 너희도 고3이니, 적당히 놀고, 공부 열심히 하도록."
"예!"
"가봐라."
"예!"
그리고 교실에 앉아 있던 수십의 학생들이 왁자지껄 소란을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물원 삼총사와 민성이 부리나케 은결의 자리로 찾아와 떠들기 시작했다. 주된 내용은 물론 다음주 있을 피서였다. 교실 뒷문에서는 쿠로사카와 은결이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을 바라보던 미래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얼른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은결은 가볍게 웃으며 친구들과 함께 뒷문으로 걸었다. 오늘부터 성천 고등학교는 한달 일주일간의 여름 방학에 들어갔다.
그날, 은결네 저녁은 김치찌게와 돼지 두루치기였다. 간결한 음식이었지만 절묘한-초정밀 수준의 조미료 사용-은결의 솜씨로 어느 호화로운 음식 못지 않은 맛을 뽐내는 식단이었다. 방학을 맞이해 미래를 주축으로 저녁 식탁에서 한창 들뜬 대화를 나누던 가운데, 화제가 피서로 옮아 가자 수행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은결에게 전했다.
"아참, 전해주는걸 잊었구나. 받거라."
"이건 무슨 열쇠인가요?"
수행이 은결에게 넘긴 것은 튼튼하지만 평범한 집 열쇠였다. 하지만 이 집 열쇠는 아니었다. 집 열쇠의 생김새는 은결도 숙지하고 있었다. 수행은 아들에게 드물게 의미심장한 얼굴을 하며 답했다.
"별장 열쇠란다."
"에, 별장요? 어디서 빌렸나요?"
"그래. 진경이 녀석에게 피서 간다고, 하지만 아직 장소는 정하지 못했다고 말했더니 동해쪽에 안 쓰는 별장이 있다고 그걸 쓰라더구나. 관리인에게는 미리 연락이 갔을테니 너희가 도착하면 깨끗히 정리되어 비워져 있을게다. 해변 가까이에 있는 별장이라 피서에는 안성맞춤이라더구나."
"와, 아빠 만세!"
미래가 반가운 얼굴로 외쳤다. 은결도 진경이라는 이름에 껄끄럽기는 했지만 솔직하게 기뻐하기로 했다. 별장을 사용할 수 있다면 들고갈 짐도 많이 줄고, 그곳에서 해야될 잡다한 일도 많이 줄어든다. 피서의 로망이 줄어든다고 민성이 왱알댈께 분명했지만 은결이 생각하기에 그건 민성 그놈이 고생을 못해봐서 하는 투정에 불과했다.
"으음, 그럼 감사히 쓰도록 하지요."
"교통편은... 여기, 이렇게 가면 된다."
그리고 수행은 이것저것 적혀진 종이 한장을 을결에게 내밀었다. 기차를 어떻게 타서 어디서 내려서, 거기서 또 어떻게 가면 별장에 도착할 수 있다는 내용이 시시콜콜하게 적혀진 종이였다. 주소를 보자니 강릉시 청해도 라는 곳에 있는 모양인데, 별장까지 따로 만들어둘 정도라면 꽤 좋은 곳이겠구나, 싶어 마음 한 곳에서 은근히 기대되기도 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번주는 글을 안 쓰신 것 같던데."
종이를 품에 갈무리한 은결은 화제를 돌려 물었다. 오늘이 토요일인데, 오늘까지 수행의 글이 한길 제약 사보에 올라오지 않았다. 사실상 이번 주는 쓰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아아, 여름이라고, 나도 휴가를 얻었지. 사실 매주 A4 한장에서 약간 왔다갔다 하는 글을 적는 건데 휴가라 할 만한 것도 뭐 있을까 마는."
수행은 가볍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은결은 다소 유감을 느꼈다. 아버지의 글을 읽는 것은 대단한 건 아니지만 은결에게 매주 있는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더 크게 반응한 것은 미래였다. 그녀는 표정을 바꾸고 아쉬워했다.
"아, 아빠, 미리 말해 줬으면 이번 피서 일정 조정해서 먼저 가족끼리 갔을텐데."
"예전에 비해 요즘 몸이 많이 좋아지긴 했다만, 그래도 멀리 놀러다닐 수 있을 정도는 아니란다. 글 쓰는거야 사실 가서 쓸 수도 있는거니 그런 것 때문에 같이 가고 못가고 하는 건 아니지. 우리 공주님 마음만 고맙게 받아두마. 여기 남아서 해야될 일도 좀 있고, 그리고...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딸의 사랑스런 투정을 다독이던 수행이 은근히 이어가던 말을 잘라먹었다. 아버지로서는 드문 화법이었기에 은결은 수행을 바라보며 무언의 압력으로 뒷말을 이어주길 채근했지만, 수행은 그저 웃어보였을 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은결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너희가 떠나는게 다음 주 월요일이 맞지?"
다음주라고 해도, 결국 모레였다. 사실상 방학 하자마자 피서 가는 것과 같았다.
"예. 좀 서두르는 것 같기는 해도 방학 계획을 잘 정리하려면 중간에 어중간하게 놀러가는게 도리어 나쁠 것 같아서 그냥 일찍 갔다 오려고요."
"그래. 괜찮은 생각이구나."
수행은 정리된 미소로 은결의 선택을 긍정하고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은결은 아버지의 그 모습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 위화감을 정체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는 없었다. 은결은 약간의 거북함을 느끼며 식사를 계속했다. 어쨌거나 이틀 뒤면 피서였다.
*상상촌장님의 훌륭한 추천에 감사를. 이런 종류의 추천을 받으면 본문이 추천보다 찌질하단 소리 듣지 않을까 ㅎㄷㄷ 하게 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서브라임이 많이 팔리면 이 글의 출판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니, 연재가 덕분에 느려진다고 유감스러워 하지 마시고 그쪽으로도 관심과 애정을!
*제가 생각하기에, 텐트를 치지 않는 피서는 피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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