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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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학교에 도착한 은결은 당장 고릴라를 향해 으르렁 거리며 말했다.
"잘도 이런 음험한 짓을 하셨겠다!"
"음험이라니. 나는 미래 양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인걸."
고릴라는 어울리지 않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억울함을 표시했다. 능청스런 태도에 은결은 후, 하고 길게 한숨을 쉬고는, 고릴라의 기대를 부수고자 단호하게 말했다.
"이 자식이... 하여간 나도 같이 간다."
"뭘 새삼스럽게."
하지만 고릴라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은결이 함께 피서에 간다고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반응을 보고 은결은 속으로 '미래 고 맹랑한 것이...'라고 혀를 찼다. 그녀는 처음부터 은결을 이 피서에 데려가기로 결정된 것 처럼 고릴라에게 말해 놓았던 것이다. 하기야 고릴라가 아무리 경우가 없어도 친구의 여동생이 둘이서만 가자는 여행을 좋다고 넙죽 받아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 여우가 끼어들었다.
"뭐야, 무슨 얘기야?"
"아, 방학때 미래 양하고, 나하고, 샌님하고 함께 피서 가기로 했거든."
고릴라가 답했다. 그러자 여우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엇! 그럼 나를 빼 놓으면 안 돼지!"
"나도 나도!"
늑대도 끼어들었다. 방학이 되어도 동물원 삼총사는 해체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 제안을 듣는 고릴라의 표정은 친우들의 참여의사에 반가워하는 걸로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인수가 늘어날 수록 미래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테고, 그를 위한 분위기 조성에는 많은 수고가 필요할테며, 기회를 잡기도 어려우리라 여겼던 탓이다. 은결이야 가족이니 어쩔 수 없는데다 맨날 삽들고 캐는 것도 없는 광부 노릇을 하고 있으니 별 문제거리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친우들의 참여를 거절하려고 했다.
"이제와서 무-"
하지만 중간에 재빨리 끼어든 말이 고릴라의 말을 아작아작 씹어버렸다. 은결이었다.
"-오는 거야 상관없지만, 늑대는 몰라도 여우는 학원 가야 하지 않아?"
늑대는 은결보다 조금 성적이 낮고, 여우는 은결보다 훨씬 높다. 쿠로사카를 제외하면 일당 가운데 가장 성적이 좋다. 10%~15% 사이를 오간다. 그만큼 공부에도 신경을 쓰는 편이고, 그렇다면 이번 방학에도 꽤 많은 학습계획을 세워두었을 것은 분명했다. 그걸 생각하면 갑자기 피서에 참여하기는 힘들 터였다. 하지만 여우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가볍게 답했다.
"괜찮아. 이번에 성적도 잘 나왔고, 마지막 여름 방학이니 집에서도 별말 하지 않을거야. 그리고 사람이 책상에만 들러붙어 살 수가 있나. 좀 놀기도 해야지. 그렇지 않아?"
"그야 물론이지! 사람은 본디 뭘 해도 휴식과 일을 번갈아 가면서 해야 하는 법이야!"
라고 옆에서 쭉 대화를 듣고 있던 민성이 시원스레 답하며 끼어들었다. 고릴라의 표정이 무너졌다. 또 시끌벅적한게 하나 끼어들겠구나, 하고 동물적인 감이 발동한 탓이다. 사실 어딘가 놀러갈 때 민성과 같은 이가 참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와 같은 이들은 잡다한 이야기를 가볍고 기세좋게 떠들어 집단 가운데 무드 메이커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고릴라가 원하는 방향으로 분위기를 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고, 그러하기에 솔직히 고릴라는 달갑지 않았다.
"늘상 너 한테 해 주는 말이다만, 그건 맨날 노는 사람이 할 말이 아냐."
그렇기에 은결은 피식 웃으며 반가운 기색으로 민성에게 말을 되돌렸다. 물론 민성은 은결이 늘상 되돌리는 대답에 대해, 늘상 되돌리는 제스쳐로-어깨를 으쓱이는-대응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밝은 표정으로 참여 의사를 밝혔다.
"하여간 나도 갈래!"
"뭐 좋겠지."
은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숫자가 좀더 많은 쪽이 왁자지껄하니 즐거울 것이다. 그렇지만 은결은 시커먼 남자만 넷에 여자라고는 하나 뿐이라니, 그건 좀 유감스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려운 곳을 긁는 것 처럼 민성은 서둘러 쿠로사카를 향해 말했다.
"저기, 쿠로사카, 너도 방학중에 별일 없다면 함께 가지 않을래?"
"아..."
쿠로사카는 민성의 제안에 당혹감을 느꼈다.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방학이라고 해서 특별히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전적으로 자유롭다. 그렇지만 어제 은결과 그런 대화를 막 나누었는데, 곧장 아무렇지도 않게 그와 행동을 같이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녀는 네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을 뿐, 참여하려 하지 않았다. 다음, 민성은 은결에게 물었다.
"괜찮지?"
"그야, 쿠로사카만 좋다면."
은결은 가볍게 웃는 얼굴로 시원하게 답했다. 쿠로사카에 대해 아무런 앙금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 맑은 태도였다. 그의 모습에 쿠로사카는 한층 곤혹스런 얼굴을 했지만 이내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여 참여 의사를 밝혔다.
"후후, 이제 방학식만 기다리면 되겠군."
민성이 기분좋게 말했다. 동물원 삼총사는 고개를 크게 끄덕여 민성의 의견에 동조했다. 방학식은 이번주 금요일에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정말로 내가 가도 괜찮은거야?"
점심시간, 옥상에서, 평소처럼 은결과 쿠로사카는 만났다. 그리고 평소처럼 간단히 대련을 끝마치고, 쿠로사카는 남는 시간에 은결에게 대뜸 물었다. 그것은 물론 오늘 아침에 이야기한 피서의 문제였다. 은결은 쉽게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의문에 답했다.
"괜찮아. 아니라면 거절했겠지."
"나로서는 너와 되도록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니 그쪽이 더 좋긴 하지만, 그래도 너도 떠나고 나도 떠난다면 도천시는 어쩌려고?"
쿠로사카가 물었다. 은결은 장난스레 답했다.
"아, 그 말 어쩐지 응큼."
"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이건 임무일 뿐이야."
쿠로사카가 벼락같은 기세로 버럭버럭 화냈다. 그 기세가 무시무시해서 은결은 저절로 몸을 찔끔 움츠렸다. 그는 그녀의 화를 진정시키고자 다급하게 말했다.
"아, 장난이야. 장난. 뭘 그렇게 부담스럽게 반응하냐. 그리고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서울의 몇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한 며칠 내가 없어도 도천시는 아무런 문제없어. 그게 아니라도 할아버지가 계시고... 그리고 너는 이곳 담당이 아니잖아. 그렇게까지 책임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그러지 않더라도 네 도움은 언제나 고맙게 여기고 있는걸."
"흐, 흐응."
그 말을 듣고 쿠로사카는 불같던 화를 삭혔다. 진정된 그녀의 태도를 보고 은결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처음 만났을 때도 서릿발 같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요즘들어 쿠로사카는 한층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은결은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
"그보다, 일본에는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 여기 온지 꽤 됐잖아."
"내 임무는 카미에 관련한 거야.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일본에 돌아갈 이유는 없어. 생활비라던가, 필요한 것은 정기, 비정기적으로 들어오고 있고."
쿠로사카는 잘라 말했다.
"그런가."
"나는 벌써 삼개월 가까이 기다려 줬어. 너는 육개월을 이야기 했고. 그 시간이 지나고도 네가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그 여자를 벨 수밖에 없어."
쿠로사카는 씁쓸하게 말했다. 누군가를 단호히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태에 대한 각오를 굳힌지는 오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죽여야 한다는 일은 고통스럽다.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더구나 그녀가 죽여야 할지도 모르는 그 소녀는 드물도록 선량하다. 그래서 쿠로사카도 사실 은결이 성공하기를, 반드시 성공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작업은 계속하고 있어."
그러면서 은결은 손을 휘둘렀다. 허공 가운데 빛으로 이루어진 기호의 세계가 펼쳐졌다. 광대하고 복잡한, 아름답고 고통스런 기호의 집합. 쿠로사카는 약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녀는 거기서 어떠한 의미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은결은 저런 것은 반년 안에 해결하겠다고 선언했다. 진을 다시 눈앞에 두자니 터무니 없는 약속이 아니었던가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말야."
그리고 은결은 다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같은 크기의 진이 허공 가운데 펼쳐졌다. 하지만 그것은 규모라는 면에서는 일전 펼쳐진 것과 동등했지만 기호의 의미를 이해하기는 훨씬 쉬웠다. 그것은 은결이 지금까지 해독한 것을 정리해 높은 기호진이었다. 그리고 그 전체 크기는 해독해야 할 것의 반을 약간 넘기고 있었다.
"......"
쿠로사카는 말없이 침묵했다. 은결은 정말로 삼 개월이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절반이 넘는 분량을 해독해 냈다. 자신은 보는 것 만으로도 혼란을 느낄 만큼 복잡한 저 봉인진을 말이다. 새삼스런 일이지만, 은결은 천재라고, 쿠로사카는 다시금 실감했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약속한 기간에 맞출 수 있을거야. 현자의 돌을 만들기 위한 기본술식은 이미 알고 있으니 특정한 응용식만 알아내면 되거든. 그건 어렵지 않아."
은결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문제 없겠지."
쿠로사카는 감정을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있지 않아 예령이 울렸다. 은결은 "가자."라 말하고는 먼저 내려가기 시작했다. 쿠로사카는 한동안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늦게서야 걷기 시작했다.
결국, 오늘 그에게 하려던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은결의 아무런 앙금이 남지 않은 듯한 태도로 인해, 어제 일을 화제로 꺼낼 좋은 타이밍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쿠로사카에게 그것은 마치 대화를 거절하고 있는 것 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서브라임을 대명종과 계약 하게 되었습니다. 고로 이 글의 연재에는 다소간의 암운이 드리워질 가능성이...(...) 슈로대도 하고 있는 판에. 음.
*이것저것 체크해 주신 요담자 님께는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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