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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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은결의 뒤에 서 있었다. 자전거의 자물쇠를 풀고 끌고 나오면서 은결은 의뭉스런 얼굴을 했다. 오늘의 저 표정은 전교 1등 했다는 것과도 별 관계가 없을테고, 무슨 또 특별한 일이 있어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궁금했다.
"오늘은 또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그렇게 즐거운 표정이신지?"
"후후, 비밀! 하지만 뭐, 어차피 곧 알게 될 거야."
"흐응."
그녀의 미소를 보며 은결은 고릴라를 떠올렸다. 점심 먹고 난 뒤 반으로 돌아오니 고릴라도 싱글벙글 웃고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웃음의 이유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소처럼 은결은 자전거에 탔고, 미래는 그 뒷자리에 앉은 다음 오빠의 허리를 잡았다. 은결은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길을 가던 학생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은결의 자전거를 보고 옆으로 살짝 길을 틔워 줬다.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덕분에 은결은 별다른 묘기를 부리지 않고도 어렵지 않게 교문을 나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문득, 은결은 물었다.
"...미래야, 너는 전교 일등 하면 기분 좋아?"
"응- 뭐 그런건 별로 생각 안 해봤는데, 그래도 역시 안 하는 것 보다는 좋겠지. 주변에서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는 것도 듣기 좋고... 일단 이긴다는 거 자체가 기분 좋은 일이니까. 나중에 대학이나 직장 생각하면 역시 좀 이득이 있을테고."
"역시 그렇겠지."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반응은 상식적인 것이었다. 미래는 말을 이었다.
"아, 그래도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냐. 지난번에도 누가 노트 훔쳐갔거든. 이번이 몇번짼지 몰라. 교과서도 두 권인가 잃어버렸고... 학교 책상 안에는 그래서 뭘 넣어 놓을 수가 없어."
"헤- 그런 일이 있었어?"
은결은 놀라서 물었다.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은 종종 읽은 적이 있지만 그것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몰랐다. 30% 수준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는 은결의 노트나 교과서는 다른 이들의 관심거리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일과는 떨어져 있었다.
"뭐, 나 말고도 공부 좀 한다는 애들 가운데는 종종 당하기도 해. 내신이라던가 이런 것 때문에 애들이 좀 예민해 진건 사실이거든. 그래서 나도 중학교 때 보다 친구가 좀 적어졌어. 좀 심한 아이들은 아예 친구 같은 거 안 만들기도 하고, 노트를 빌려주니 안 빌려주니 하는 걸로 하루아침에 친구에서 원수가 되는 애들도 있었고... 재미없게-"
미래는 불쾌한 듯 툴툴 거렸다.
"쯧쯧."
은결은 혀를 차며 페달에 힘을 더했다. 그러면서 은결은 생각했다. 패배자에게 좀더 관대한 세상이었다면, 승리자에게 좀더 냉담한 세상이었다면, 세상을 몰라도 좋은 시절에 불신을 씨앗을 품고 타인을 바라보지 않아도 좋았을텐데. 그랬다면, 그들이 이 자전거의 앞을 비켜 주었듯, 더 큰 것에 대해서도 웃으면서 양보하는 넉넉함을 키울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아아 그랬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꽤 쓸만한 곳이 되었을텐데. 라고.
저녁식사 시간에, 정말로 드물게도 은결은 언성을 높였다.
"당장 그만 둬!"
은결의 분노가 향한 곳에는 한 사람의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식사를 계속했다.
"미래야!"
다시, 은결이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식탁 앞쪽에서 수행은 불편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미래가 은결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왜 그렇게 화를 내? 가고 싶으면 친구들하고 가라고 한 건 다름아닌 오빠 아냐?"
은결이 화를 내는 이유- 그것은 막 미래가 밝힌 올 여름방학 피서 계획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다로 친구와 함께 놀러가겠다고 했는데, 그 친구란 것이 다름아닌 은결의 클래스 메이트 고릴라였다. 은결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너와 같은 학년의 여학생들을 말하는 거지, 너보다 나이도 많은 남자 학생을 말한게 아냐!"
"와ㅡ 오빠답지 않은 편견! 사람은 사람대 사람으로서 언제나 대등한거야. 나이라던가 성별이라던가, 국가라던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그걸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다름아닌 오빠잖아?"
미래가 쿡 찌르고 들어왔다. 은결은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존엄이 대등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가능성의 차원에서 그러하다는 거야. 현실영역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알고 지속적인 실천으로 그것을 실현해 나가야 하는거야. 존엄이 실현된 사회라면 존엄을 이야기할 이유가 없잖아."
"뭐야, 오빠는 자기 친구를 믿지 못한다는 거야?"
"그- 그건... 그렇지 않지만, 존엄을 현실 영역 가운데서 실천한다는 것은 무한정 상대를 신뢰한다는 이야기가 아냐. 그것은 상호적인 거지. 무방비한 신뢰는 도리어 악을 자극하고 키우게 되니까. 내가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의심하기 때문만은 아냐. 자물쇠를 잠그지 않음으로서 상대의 마음 속에 있는 악을 일깨우지 않도록 주의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거야. 인간은 신이 아냐.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관계'라는 것에서 매우 중요한 인식론적 기초인거야. "
"아- 몰라 몰라. 오빠랑 더 얘기 안해. 하여간 나는 고릴라 선배랑 이번 여름에 놀러갈꺼야. 말려도 소용없어. 나는 갈거야."
미래가 대화와 타협의 원리를 완전철폐하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다. 이런 걸로 오빠랑 싸우면 승산이 없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상대를 자신의 페이스로 이끌어들이는 것이지 상대의 페이스에 맞추는 것이 아니었다. 일부로 불리한 영역에서 싸우는 것은 잔력, 전술을 통틀어 바보 짓이다.
"미래야!"
은결이 다시 답답하게 외쳤다. 미래는 고개를 팩, 돌리면서 흘리듯이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오던지!"
"......"
은결은 침묵했다. 그 한 문장으로 미래의 본래 의도하던 바가 훤히 읽혔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미래는 나이가 들더니 고집도 되게 치사한 방법으로 관철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래가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었다. 은결이 도천시를 비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결이 다시 입을 열러던 찰나에, 수행이 쿡쿡 대며 웃기 시작했다.
"아버지...!"
은결은 조금 울상을 지었다. 여기서 가장인 수행이 분위기를 확고히 잡아주지 않으면 미래는 한층 고집을 부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수행은 겨우 웃음을 멈추며 은결을 향해 말했다.
"같이 갔다오지 그러니? 그럼 걱정할 이유도 없고. 너도 좀 쉬어야지."
"아버지 그게 무슨..."
"너희들 데리고 바다에 가 봤던 것도 정말 오래되고 해서 매번 여름이면 미안하기도 했단다. 더구나 은결이 너는 내년이면 고3 이니 아마 학교에서 나오기 힘들테고, 지금이 아니면 다시 기회를 찾기 힘들테지."
"그건 그렇지만..."
"갔다 오거라. 한 며칠 네가 없는 정도는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다."
수행은 부드럽게 말했다. 은결은 아버지의 그 부드러운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으음...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렇게 하지요."
"와! 아빠 최고!"
은결이 승낙하자. 미래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수행의 목에 매려서 아양을 떨었다. 수행은 딸의 애교를 즐거운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은결은 그것을 보며 '밥 먹다 말고 이게 무슨 짓인지...' 라며 속으로 한 숨을 쉬었다.
한편, 그날 밤, 쿠로사카는 몸을 뒤척이며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은결과 옥상에서 나눈 이야기가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을 떠돌았기 때문이다. 승리가 타자의 슬픔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기쁨을 통해서 가치있게 된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 아니겠느냐던 은결의 말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의 편린이 있었고, 그 편린을 직시하는 일은 가슴 아팠다. 그러나 쿠로사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내가 이기고 싶었던 것은...'
그녀가 은결에게 이기고 싶었던 것은 그의 패배를 바라보며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그래서 기뻐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은결에게 정말로 이기고 싶었던 이유는, 그로서만이 그와 자신이 대등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확증하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했던 것은 승리 자체라기 보다 오히려 승리 이후였다. 다시 한숨을 흘러나왔다.
"......"
확실히, 자신은 은결의 생각을 전혀 읽지 못 했었다. 하지만 읽지 못했던 것은 자신 만이 아니었다. 은결 역시 자신의 마음을 전혀 읽지 못 했다. 그러하기에, 이렇게 되고 말았다. 이해하길 기대했던 것은 은결 그 자신 만이 아니었을 텐데, 그 역시 읽지 못했으면서, 그렇게 말하고 그냥 그렇게 접어버리는 것은 무척 분하고, 쓰리고, 슬픈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중첩된 감정 사이로, 잠은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요즘은 서브라임 쓰기가 귀찮네요... 얼른 써야 하는데. 후.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같은 명랑 학원물을 생각해 보세요. 저는 '블루'하지 않습니다.
*성원해 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이만.(성원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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