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128화 (128/300)

#   129-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2)

#

은결은 저녁밥을 만들고 있었다. 반찬으로는 된장찌개를 끓이고, 고등어를 한 마리 구울 생각이었다. 그래서 지금 부엌 넓게 된장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때 미래가 발랄한 걸음으로 다가와서 갑자기 물었다.

"오빠, 방학 되면 뭐 할꺼야?"

"글쎄다. 특별히 있을까? 그냥 집에서 평소 하던대로 생활할 뿐이지."

느닷없는 물음이었다. 은결은 건성으로 답했다. 미래가 당장 볼을 부풀리며 은결에게 항의했다.

"에- 재미없게 그게 뭐야, 지난 여름도, 지지난 여름도 그랬잖아! 3학년 되면 학교에서 방학 때도 오라고 하잖아. 그러니 이번 여름이 마지막 기회란 말야. 어디든 좋으니까 놀러가자."

"에..."

은결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사념체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도천시를 비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미래는 그런 은결의 사정은 모르고 은결을 졸랐다.

"내가 한 육백사십두발자국 정도 양보해서 꼭 바다에 가자고는 안 할께. 오빠 성격 생각하면 문화재가 많은 곳이 좋겠지? 경주 어때 경주? 첨성대라던가, 석굴암이라던가, 불국사라던가. 이것저것 많잖아."

"에- 내가 없어도, 미래 너만 친구들끼리 가면 되잖아."

은결은 싫은 기색을 내보이며 거절했다. 결국 미래는 화난 표정으로 "흥흥!"거리며 등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은결은 고소를 지었다. 사실 도천시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 더 크게 작용했다. 세연을 걷어차고 끙끙대고 있은지 아직 일주일을 좀 지났을 뿐이다. 어딘가 놀라다닐 수 있을 만큼 마음이 편치 않았다.

"후우-"

그래서 은결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지만, 그 판단과는 달리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무래도 진득하니 많기만 했다. 그것들은 어느 것 하나 깨끗하게 털어지지 않았다. 울기 직전의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뚜렷한 모습으로 은결의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경주 첨성대라..."

은결은 괜히 마음에 걸려서 조용히 중얼거려봤다.

하늘을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진 탑을 닮은 기구.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은 언제나 신적이었다. 원시에 숭앙의 대상으로서 하늘은 신적이었다. 거기에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당시에 인간은 세계를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세계는 인간보다 강한 것들로 가득했고, 하늘은 그 강한 것들의 가장 선두에 있었다. 과거에 하늘의 운행을 통해 계절을 읽음으로서, 인간은 세계를 지배하는 일정한 원리를 알았다. 그 일정한 원리에 대한 인식은 또한 곧장 신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질서는 그것을 관장하는 자를 상상하게 하니까. 현재에 과학을 통해 하늘은 인식이 닿지 못하는 광대한 공간과, 시작과 끝에 대한 창대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 품는다. 그 또한 결국은 신적이다. 그래서, 하늘은 언제나 신적이다.

'그러면 첨성대는... 바벨탑을 닮은 것이 되려나.'

신적인 것을 향한다는데서, 그럴지도 몰랐다. 바벨탑은 신을 향한 것이었으니까. 은결이 생각하기에 바벨의 신화는 시사적이다. 노아의 족속들이 시날에 정착해 도시를 형성하고, 융성하자 만들기 시작한 이 탑은 하늘에 닿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하늘에 닿음. 그리하여 노아의 족속은 신처럼 되길 원했다.

당시 그들의 언어는 한 가지였다. 모든 이들은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담의 언어였다. 그 언어는 사물의 본질을 깨끗하게 반영했고, 그래서 소통에 오해는 없었다. 걸림없는 소통은 모든 인간을 협락하게 했고, 그 협력의 힘은 바벨탑을 가능하게 했다. 걸림없는 소통은 그래서 본래 신적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감히 그런 오만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무서운 힘으로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인간의 언어를 분리시킨다. 이로서 인간은 위대한 언어를 빼앗기고 고루하고 분리된 개별 언어를 지니게 된다. 이것을 바벨의 언어라 하며, 현재의 인류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를 말한다. 신화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난장이의 시대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은결은 그 신화에서 계몽의 몰락에 대한 예고를 직접적으로 읽어낸다. 계몽이 전제하는 대공리, 그 목표는 선명한 이성의 사용이 선명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여, 세상에 만재한 모든 비참과 비극을 이성의 힘으로 씻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보편적 이상, 합의. 그것은 아담의 언어로 돌아가자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아담의 언어를 통해 시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는 결국, 바벨탑을 세워 신처럼 되길 갈망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바벨탑이 무너지듯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는 허물어졌고, 신이 언어를 흩었듯, 정명한 언어를 원하던 논리실증주의는 실패했다.

그래서 언제나 그러했듯 지금도 소통은 권력에 대한 욕망을 동반하고, 권력은 타자를 자유로이 해야할 양 손의 위대함이 만들어낸 도구로서 이루어져, 도리어 주인되려는 자아와 주인되려는 타자를 서로의 투쟁으로 노예가 되도록 구속시킨다. 그래서 바벨의 신화는 뼈저리게 시사적이다. 은결은 그렇게 생각한다.

'역시... 틀리지 않았어.'

은결은 그 생각을 끝내고 다시 고소를 지었다. 자신의 판단은 옳았다. 자신은 동생의 짤막한 한마디 말 가운데서도 이런 생각을 이끌어내고야 만다. 누군가와 어울린다는 것은, 특히 세연과 같은 소녀와 어울린다는 것은 역시 자신에게 생각하기 힘든 일인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끓어오르는 된장찌개의 간을 봤다. 맛있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 은결네 가족은 각자의 일로 돌아갔다. 미래는 방에 들어가 조용히 좋아하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수행 역시 방으로 돌아가 자료를 정리하고,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은결도 설겆이를 마치고 도천시를 순찰하기 전에 책이나 읽을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방안에서 작업을 하고 있으리라 했던 수행이 부엌쪽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은결아. 잠시 시간을 빌릴 수 있겠니?"

"예. 물론이죠."

은결은 서둘러 걸어둔 수건에 손을 닦고 수행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수행의 방은 언제나 그러하듯 무수한 책과 종이로 충만해 있었다. 안쪽에 곱게 정리된 이불의 모습은 차라리 이질적이었다. 은결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이 분위기가 참 좋았다. 이런 분위기와 공간 가운데서, 그는 아버지와 함께 많은 것을, 정말 많은 것을 공부했다.

"그런데, 무슨 말씀을 하실려고?"

"음- 그게 말이다.."

그리고 수행은 의자에 앉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은결도 따라서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수행이 이런 표정을 하는 일은 정말로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지난번 원고를 맡기고 같이 식사라도 하자고 해서 진경이 녀석이랑 만났단다. 그런데..."

"혹시 이쪽에서 실수로 놓친 사념체라도 있었던가요?"

은결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쿠로사카도 있고 해서 요즘은 그런 걱정을 거의 안 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실수로 놓쳤다면 그건 충분히 질책받을 만한 일이다. 두 사람 모두 능력이 뛰어난 만큼 서로를 믿고 방심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고, 실제로 은결은 그녀를 믿고 때때로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며 유유자적 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행은 고개를 저어 은결의 그 걱정을 불식시켰다.

"음- 그런건 아니고, 그- 네가 세연양을 거절했다고, 그- 좀 화가 나 있더구나."

다만, 이어진 대답이 세단계쯤 더 곤혹스러운 것이었을 뿐이다.

"...이해하기 힘든걸요. 저는 그 분이라면 저와 그녀가 가까워지는 것을 도리어 탐탁지 않게 여기리라 생각했는데."

"그야 그렇다만, 그래도 자기 동생이 찬게 아니라 차였으니 화가 날법도 하지.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건 진경이 녀석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게 아니란다. 그보다, 너는 그 아이가 싫더니?"

수행이 물었다. 은결은 한동안 침묵했다가 어렵사리 답했다.

"싫을 수 있을만큼, 저는 세연양을 알지 못합니다. 좋아할 수 있을만큼 알지도 못하지요. 그냥... 그런 정도의 일이었을 뿐입니다."

은결 다운 대답이구나. 라고, 수행은 생각했다. 그는 조금 쓸쓸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아들을 향해 마찬가지로 쓸쓸하게 말했다.

"지난주에 비트겐슈타인에, 그것도 전기 비트겐슈타인에 네가 열중한다 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잘못한 일이었을까요?"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아버지에게는 숨기기가 어려웠다. 은결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행은 쓸쓸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단다. 그렇지만 은결아...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나는 내가 내 젊음을 분노로만 채웠던 것을 후회하기에 네 삶은 슬픔으로만 채워지지 않았으면 한단다. 네 슬픔을 좀더 정당하고 올바른 것으로 하기 위해서도, 슬픔 이외의 것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다란다. 나가보거라."

"예."

그리고 은결은 지금 자신의 목소리를 닮은 건조한 동작으로 수행의 방을 빠져나갔다. 수행은 은결이 빠져나간 공간을 안스러운 눈길로 한동안 바라봤다.

*클라우스는 BL을 써도 물론 오피셜이 아닙니다. 그 글은 자유를 위해 쓰여졌고, 그래서 독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그런 결말을 내었음으로, 어떤 공식적인 뒷얘기는 주제를 배신하게 될 테니까요. 물론 후속작이 권당 한 만부씩 팔린다면 고려의 여지도 있습...(쿨럭)

*하여간 클라우스도 지금보다 독자를 더 많이 모아서, 개인지로라도 완결을 낼 수 있게 되었으면 합니다. 아, 완결은 냈구나.-_-; 책으로 완결을 내는게 문제지.(안습)

*이 글을 읽는 수험생 분들은 캐릭터들에게 다소 슬픔을 느끼시는 모양인데, 그러지 마세요. 어차피 소설인데다 기본적으로 이 글은 반 학력 노선의 글이죠. 더구나 은결 같은 경우는 행복하게 살기는 글른 타입 아니겠습니까. 도리어 동정의 대상이 되어야... 하여간 마셜님은 논술 잘 보셨길. 평소 노력하시니 잘 되었을 겁니다. 달리 시험 보신 분들 있다면 그분들도 좋은 성과 있었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석님은 머리가 문제가 아니라 속독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길가메시 챕터를 읽으시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럼 이만.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