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희망을 위한 찬가 - 이 곳에는 타자가 없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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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점수가 발표됐다. 은결은 평소처럼 30% 정도의 위치를 차지했다. 동물원 삼총사와 민성도 고만고만한 성적을 냈다. 지난 시험과 비교해서,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일학년에서는 지난번에 그랬듯 30%의 동생이 간단히 일등을 했다. 논술도 창의성을 높이 평가받아 교내에 게시됐다. 인터넷 시대를 맞이해 흔히 쓰이는 표현을 따라보자면 '미래>>>>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2등'정도의 상황이었다. 전체적으로 이렇다할 주목할만한 점은 없는 결과였다.
굳이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고 친다면 2학년 성적 톱 10에 쿠로사카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나 다소 소란이 되었을까, 그녀의 일본에서의 성적을 아는 선생들 사이에서는 놀라는 사람이 없었다. 도리어 그 성적은 일본에 있을 때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 것이었다. 국어에서 점수를 까먹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보다 국어 점수가 좋았다. 오늘 수업에 들어왔던 국어 선생은 쿠로사카를 예로 들며 학생들에게 수업시간에 휴대폰으로 이모티콘 문자나 날리니 외국인보다도 한국어능력이 딸린다고, 보수적인 핀잔을 줬다.
하여간 시험점수도 발표되고, 그럭저럭 학교의 일학기 행사는 모두 끝났다. 남은 것은 방학식 뿐이었고, 학생들은 완연한 방학 분위기에 들뜨기 시작했다. 뜨거워진 태양이 여름을 고한지는 한 일주일쯤 됐다.
오늘도 쿠로사카와 은결은 옥상에서 만났다. 간단히 대련을 하고 난 뒤, 두 사람은 드물게 느긋한 시간을 가졌다. 먼저 입은 연 것은 쿠로사카였고, 화제는 이 무렵 학생들의 다수가 그러하듯 시험에 대한 것이었다.
"음. 너, 정말로 30%군."
쿠로사카가 애매한 얼굴로 은결에게 말했다. 은결은 그녀의 애매한 얼굴이 도리어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그래. 전부터 얘기했잖아. 뭘 이제와서."
"음..."
그야 듣긴 들었지만, 실제로 체험하게 되니 기분이 안 좋았다. 어떻게 생각해도, 쿠로사카는 이 것이 은결의 실력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어른과 달리기를 하면서 어른이 져준 걸 기뻐하며 정말 자신의 다리가 빨랐던 것 처럼 생각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정말로 은결이 이런 성적을 받을리 없었다.
좋든 나쁘든, 은결은 천재다. 어떤 교과서도 은결이 읽는 책보다 어렵지 않았다. 교과서를 모두 읽는 것 보다 평소 은결이 읽는 책 가운데 아무거나 한 권을 골라 1/3이라도 읽어내는게 더 어려웠다. 언어가 한국어라는 것을 고려해도 마찬가지였다. 읽은 것을 제대로 이해 한다는 것은 한결 더 어려웠다. 단순한 이해를 넘어서, 행간을 읽고 비판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에 이르면 이제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은결은 그런 텍스트를 아무렇지 않게 읽는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세우고 쌓아, 주변을 평가하고 판단한다. 슬퍼하고 절망한다. '같은 위치'에 있는 이들만이 들어오도록 허락한다.
-으득.
쿠로사카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쿠로사카는 자신의 성적이 은결보다 높다는 것을 은결이 여전히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는 현상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성적표가 은결의 것 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은 은결에 대한 분함을 한결 자극할 뿐이었다.
"왜, 그런 점수를 받지?"
"무슨, 열심히 공부해서 나온 성적인-"
"나, 장난치는 거 아냐."
쿠로사카가 조금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은결은 그녀의 어조에 담긴 감정을 읽고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보다 성적도 좋으면서 왜 갑자기 무게를 잡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은결은 껄끄러움을 느끼며 답했다.
"그야...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지. 좋은 점수를 받아서, 좋은 대학에 간다는 게 내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나는 학력을 통한 신분상승을 원하지 않아. 내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아."
"음..."
돌아온 답변은 쿠로사카의 말문을 막았다. 그러고보면 이런 시험점수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이루어질 대학 진학이 두 사람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 생각해 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거의 의미가 없다.'라는 것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그래서 전혀 다른 가치판단기준을 가진다. 필연적으로, 상식의 세계에서 중요시하는 것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학력이란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어차피 필요한 것은 이 사회에 그럭저럭 융합할 수 있을 정도의 외양일 뿐이야. 특별히 성공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뭐, 이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겠지. 눈에 띄지 않게 말야. 그렇지 않아?"
은결의 가볍게 웃으며 권태롭게 말했다. 성적이 높다거나 낮다거나 하는 것이 얼마나 자신에게 무의미한지, 전신으로 드러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말은 옳았다. 그래서 도리어 쿠로사카는 분했다. 자신의 뜻은 은결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자신의 행위는 은결의 앞에서 부정되는 것 같았다. 그 감정에 떠밀려 그녀는 은결을 질책했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넌 전혀 눈에 띄지 않는게 아니잖아.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아무도 읽지 못하는 책을 대놓고 읽고 있잖아. 그래서 일부러 주변과 자신을 격리시키고 있어. 넌 그저 주변을 아래로 깔아보면서 오만하게 장난치고 있는 걸로 밖에 안 보여. 그러니까 네 말은 네 행동을 설명할 수 없어."
"그건-"
은결이 곤혼스럽게 변명하고자 했다. 쿠로사카는 은결이 말을 이을 기회를 주지 않고 결론 내렸다.
"나는 널 이해할 수 없어. 넌... 어딘가 뒤틀려 있어!"
그리고 쿠로사카는 은결과 눈을 마주쳤다. 은결의 눈은 슬펐다. 그 슬픈 눈을 보고, 쿠로사카는 흠칫 놀라며 저절로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에 응답하듯, 은결은 느릿하고 쓸쓸하게 말했다.
"아마, 어떤 측면에서는 네 말이... 옳겠지. 나는, 뒤틀려 있을거야. 그렇지만 쿠로사카, 나는 뒤틀려 있을테고, 그걸 부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이건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 나는 오만으로 인해 지금처럼 행동하고 있는 게 아냐. 나는 아마 이 일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하고 있을거야. 이 거대한 타자의 체계가 끔찍하게 싫으니까, 거기 협력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
쿠로사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결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어째서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사태가 아니라는 것은, 그 밤의 차분한 이야기 가운데서 충분히 알게 되었을 터였다. 그래. 이해하고 있었다.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 타자를 넘어서는 것의 어려움. 그래서 결국 타자에 속박되는 자아. 주인을 추구함으로서 노예가 되는 자아. 그것은 자아의 불행이며, 자아의 주인되기에 짖밟힌 타자의 불행.
은결은 그것이 싫어서 타자와의 교통을 거부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과 알게 된 것은 기쁘다고 했다. 그렇지만 은결은 그 이야기를 자신과 나눈 이후에도 홀로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그는 변하지 않는다. 소통하지 않는다. 쿠로사카는 그게 분했다. 그래서 알고 있으면서 은결을 질책했다. 그를 가능하면 자신과 같은 위치로 끌어내리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쿠로사카는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딩동댕.
점심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쳤다. 은결은 다시 작게 웃으며 말했다.
"가자."
"음... 그래."
은결은 먼저 등을 돌려 옥상에서 내려갔다. 그의 등을 바라보며 쿠로사카는 자신의 마음이 엉크러지는걸 느꼈다. 종이 울린 덕분에 사과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할까? 엉크러진 마음 사이로 은결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다시 화가 나려고 했다. 별것도 아닌데, 답답하고 신경쓰인다. 무시하기 힘들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학교를 마치고, 미래와 은결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전거 주차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후훗."
발랄하게 걷는 미래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평범하게 판단한다면 전교 1등이라는 결과를 기뻐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지난 번 시험에도 마찬가지의 성과를 내었지만, 미래는 이렇게까지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이번 시험에 미래는 이전과 비교할 때 열심히 공부했었고, 논술에 관련해 은결에게 물으러 올 정도로 성의를 보였다. 미래로서는 독특한 경우였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아?"
그래서, 은결이 물었다. 미래는 두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그야, 시건방진 누군가의 콧대를 꺾었으니까 그렇지! 후훗!"
시건방진 누군가? 은결의 뇌리로 퍼뜩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은결이 알기에 일학년 가운데 미래가 특별히 라이벌 감정을 가지는 학생은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편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미래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의미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이렇게 기뻐할만한 상대라니... 모르는 사이에 일학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결국 은결은 미래에게 물었다.
"그게 누구야?"
"음. 그런 사람이 있어."
미래는 훗, 하고 답했다. 은결은 다소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얼마전에 미래에게 같은 방식으로 대답한 적이 있으니 무어라 지적하기도 곤란했다. 한편 미래는 미래 나름대로 은결에게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그녀가 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쿠로사카였고 그녀가 겨우(!) 전교 10위 권에 들어 감으로서 간단히 승리했지만, 은결이 그걸 좋아할리는 없기 때문이다. 금세 두 사람은 자전거를 놓아둔 곳에 도착했고, 은결이 타자 미래가 냉큼 그 뒷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은결은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는 오빠는 아침에 비해 좀 우울해 보이는데 왜 그래? 오빠야 말로 무슨 일 있었던거 아냐?"
미래가 물었다. 은결은 '음-'하고 목소리를 길게 흘리다가 답했다.
"별 일은 없었어. 그냥 좀 쓸쓸하구나, 싶은 일은 있었을 뿐이지."
어차피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음으로, 기대에서 벗어난 것은 유감스런 일이 될 수 없었다. 그건 그냥 좀 쓸쓸한 일이었다. 그런 정도일 뿐이었다. 인류의 언어는 아담의 언어가 아니니까.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탄 자전거가 교문을 빠져나갔다. 은결은 한결 페달에 힘을 주었다. 바람이 길게 불어 옷깃과 머리칼을 날렸다.
*시해님의 꼽사리 추천에 감사를.
*데일♥알렉을 쓰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데, 그러기 위해서BL을 섭렵하려니 자신이 이성애자라는 사실만 확실하게 확인할 뿐입니다. 아... 언제 쓴다냐. 털썩.(...) 아, 못 읽어본 분에게는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 추천. 재밌습니다. 음.
*후앙. 피곤. 하여간 여러분이 즐겁게 읽었다면 그것으로 저는 기쁘겠습니다. 그러니 독자수가 늘면 더 기쁘겠죠. 그건 그렇고, 다음화엔 나머지 인기투표도 발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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