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희망을 위한 찬가 - 말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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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넓지 않은 방은 책과 신문, 프린트한 자료들로 가득했다. 그 방 한 구석에서, 중년의 남자가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모니터의 빛이 담담한 그의 얼굴을 희미하게 강조했다. 수행이었다. 그는 이번 주 칼럼을 적고 있었다.
-정책차원에서 발전국가를 해체하고, 이어진 제도적 결과의 가장 큰 공백, 그리고 실패는 금융자유화와 부실운영이었다. 당시 까지 한국 경제의 특징 중 하나는 금융부분의 상대적인 저발전이었다. 이것은 거대 프로젝트에 대해 대출을 궁극적으로 결정한 것이 금융기관이 아닌 국가였고, 그 결과 금융기관의 위기관리 능력은 총체적으로 매우 낮았다. 이는 대맥락에서 국가가 산업을 관리하던 시절에는 아무런 문제거리가 아니었으나 한국 자본이 내외적인 압력으로 시장개방(발전국가의 해체)를 취하는 과정에서, 특히 1990년대 초까지 지속되던 '순서와 속도'를 감안하던 조치들이 김영삼 정부에 들어 과도한 자유화를 실행함으로서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김영삼 정부의 금융정책은 금융자유화 5개년 계획을 말하는데, 이는 단적으로 말해 잘못 설계되었고, 올바로 관리되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의 첫번째 결함은 많은 금융업체에게 허가를 내어주는 것이 경쟁을 통해 효율성을 증대시킬 것이란 착각위에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결과는 개방된 금융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든 취약한 상업은행과 종합금융회사의 증가였다. 이로인해 한국에 들어온 외국계 금융기관의 인수합병에 대항할 수 없었고, 결국 위기 이후에는 금융자유화 이전 수준(1985년)으로 금융기관의 수가 줄어들게 된다.
또 다른 문제는 김영상 정부가 금융자유화를 금융부분에 있어 국가의 완전 철수와 동일시 한 데 있다. 금융기관 설립허가를 남발한데 대비하여, 이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온다. 경험미숙으로 경쟁압력에 시달리던 금융기관들은 과도한 위험을 떠맡았게 된다. 실제로 IMF이전 전 종금사의 차입은 200억 달러, 그 중에 단기 부채가 64%를 차지했고, 대출은 85%가 장기 대출로서 만기구조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전혀 몰랐거나 알고 있으면서 무시했다. 이 위기는 금융기관을 감독하던 기관이 국영은행을 관리하는 재정경제원과 상업은행을 관리하는 한국은행으로 나뉘어 파벌을 형성, 대치함으로서 심화된다. 이로 인해 두 집단은 정보를 공유한다는 기본적인 작업조차 하지 않았고, 금융기관은 그 대립을 이용해 총부채를 줄여 보고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자본계정의 개방이었고, 이로인해 국내 금융위기는 통화위기로 전환, 우리가 아는 IMF사태가 된다. 86년까지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던 정부는 외환관리법을 통해 엄격히 외환을 통제하게 되지만 86년에서 89년까지 대규모 흑자가 발생하여 이 체계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게 되고, 90년대에는 흑자는 사라지나 자본유입이 증가해 결국 1995년에는 그 체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동시에 한국 경제에 대한 총체적인 신뢰도의 상승으로 한국 금융기관은 외환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부담스럽게 여긴다. 이에 추가된 것이 미국의 압력으로 1992년 3월 양자 회담에서 미국의 금융개방 압력은 절정에 달한다. 1993년 금융자유화 프로그램은 이 회담의 결과였다.
결국 IMF는 신자유주의 원칙을 지나칠 정도로 순진하게 받아들여 경쟁의 힘을 신뢰함으로서, 금융시장에 대한 참여를 증가시키고, 감독을 줄인 틈을 초국적 금융자본이 침입해 자유로이 투기활동을 함으로서 초래된 비극이었다. 이러한 이행 실패는, 비록 김영상 정부가 당시 한국이 처해있던 내외적인 압력으로 인해 발전국가 시스템을 해체하고, 세계적 조류였던 신자유주의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심각할 정도의 것이었다. 이로 인해 한국 경제는 최악의 방식으로 신자주의 패러다임에 통합되어 천만 실업시대를 맞이하고, 그로인해 한국 민주주의 자체의 파괴를 초래하게 된다...
"흐음..."
키보드에서 손을 뗀 수행은 눈 사이를 지긋이 누르다가 목을 움직였다. 작게 뚜둑, 소리가 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껏 쌓아놓은 자료의 산을 허물지 않도록 주의하며 방을 빠져나왔다. 채 지워지지 않은 향내가 느껴졌다. 그는 잠시 슬픔과 그리움을 느끼며 잠시간 서 있었다. 그리고 수행은 냉장고로 가서 물을 마시고, 밖으로 빠져나가 옥상으로 올라갔다.
"응?"
계단의 모서리를 돌아 옥상으로 들어서니 선객이 있는 것이 보였다. 은결이다. 옥상의 난간에 팔을 기대고, 보일리 없는 별을 보고 있던 은결은 계단의 발소리를 듣고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빛 가운데서 아들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표정이 드러내는 감정이 놀라움일 것임은 분명했다.
"아버지."
"후후, 여기서 뭘 하고 있었니?"
수행은 자상한 웃음을 보이고는 천천히 걸어 은결의 옆에 가 섰다. 은결은 다시 시선을 먼 하늘을 향해 돌렸다. 지워진 별빛에 혼탁한 어둠을 드러내보이는, 마치 아득하도록 거대한 사념 같은 밤 하늘을. 은결은 쓸쓸하게 웃으며 다소 농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냥,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
"너 답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수행은 부모의 감으로, 지금 은결이 얼마전 길가메시를 읽던 때와 비슷한 분위기라 느끼고 부드럽게 물었다. 은결은 저항 없이 수행의 말에 응했다.
"오늘 제사를 끝내고 지방을 태우던 중에 미래가 어머니가 우리 가족을 지켜봐주지 않겠느냐고 물어오길래, 그럴 거라고 답했거든요. 하지만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죠. 영혼이란, 반증도, 입증도 불가능한 문제니까요. 그러니까 사실 영혼에 대해 말하는 것은 '헛소리'겠지요."
"그래.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지."
수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를 통해 올바른 말은 단 두 가지의 경우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검증 가능하거나, 동어반복인 말이다. 검증 가능하다는 것은 과학적 언어로서 물체의 무게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고, 동어반복은 '미소녀는 아름다운 소녀다.'와 같은 문장을 말한다. 그는 이를 벗어나는 모든 언어를 무의미한 '헛소리'라고 말했다. 때문에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와 같은, 가치에 대한 검증 불가능한 언술은 모두 헛소리로 판단된다.
"하지만 저는 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미래를 향해 말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해주지 못했어요. 그러면 미래가 슬퍼할 것 같았거든요. 영혼의 문제는, 가장 선명하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고 선언할 수 있는 것임에도 말이예요."
은결의 목소리가 쓸쓸하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비윤리적인 것이라 생각한 것은 사실이란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럼으로 오만하고 경박한 비윤리적 행위라고 판단했으니까. 하지만-"
수행이 은결을 달래듯 말했다. 은결은 그것이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며, 여전히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지는 알아요. 저는 그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예요. 그것이 옳다는 게, 쓸쓸한 거지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만다는 것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
은결의 뒷말이 죽었다. 죽은 말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기호가 되어 은결의 감정을 담는다. 수행은 고요하게 아들의 말을 들었다. 은결은 죽었던 목소리를 되살리며 말했다.
"미래의 이번 논술 시험 주제가 낙태였다고 해요. 미래는 제게 그에 대한 의견을 구하러 왔지만 저는 제가 아는 한 최신의 논쟁에 대한 정보를 전해줄 수 있었을 뿐이지요. 제게는 그 사태에 대한 이렇다할 의견이 없었어요. 의견을 만들어낼 자신이 없었어요. 하지만 제게 결여된 것은 정보가 아니라 공리였지요."
"...생명과 본질에 대한 정의가 세워지지 않는 한 말할 수 없는 문제이니 말이구나."
수행이 말했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조적인 미소와 더불어 말했다.
"예. 그래서 제가 미래에게 전해줄 수 있었던 것은 명료한 통찰이기 보다 하찮은 회피의 방법론이었지요. 그 문제는 비트겐슈타인의 의견에 따르자면 아마도 '헛소리'의 영역에 있을테니까요. 기초도 닦지 않은 체 위대한 건물을 세우고자 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하지만 아버지... 그것들은 반드시 '답해져야'하는 것들이지요. 피할 수 없는 거잖아요. 검증 불가능 하니까, 따위의 말로 회피할 수 없잖아요. 그래선 안 돼요."
은결은 미래의 말을 생각한다. 산산조각 난 태아들을 생각한다. 생명이 쓰레기가 된 광경을 생각한다. 조각난 사지와, 터져나온 내장과, 불거진 눈망울을 생각한다. 수정 이후, 8주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생명으로 규정되지 못하는 생명을 생각한다. 그래서 산채로 찢겨지고 조각나고 죽는, 태아가 아닌, 생명조차 아닌, 단순한 가능태를 생각한다. 답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장면들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저열한 것일까? 그렇게, 세상이 답을 요구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는 무수한 사태들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을 할 때면, 은결은 숨 막히는 옥죄임을, 자신의 손안에 쥐어진 역사의 끝의 한 단편을 느낀다. 수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피할 수 없는 문제들이지."
"가장 현실적인 영역에서, 삶은 '말할 수 없는 것'과 이어져 있지요. 아니, 삶의 대부분은 이미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이루어진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무수한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대답을 요구하지요. 제대로 알 수가 없는데도, 우리는 침묵할 수가 없어요. 그게..."
그렇게 말하면서, 은결은 세연을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오늘 은결이 옥상에 올라와 별을 바라보게 만든 또 다른 장본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말을 스스로 번역해 다른 어귀로 만들었다. '타자를 넘어설 수 없는 데도, 우리는 소통을 시도하지 않을 수는 없다.'라고.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행은 은결의 말을 듣고 고졸한 미소를 보이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는 신과 닮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예. 신과 닮지 않았지요. 길바닥의 지렁이를... 닮았지요."
은결은 웃으며 수행의 말을 받았다. 부자의 대화는 괴테 파우스트의 처음 부분에 나오는 파우스트의 말을 패러디한 것이다. 파우스트는 공부하고 공부해서, 결국 아무 것도 알 수 없더라는 결론에 다다랐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근대의, 계몽의 극한을 담은 캐릭터다. 그의 절망은 계몽의, 근대의 절망이다.
"그래. 신과 닮지 않은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꿈꾸었던 침묵의 권리조차 얻을 수 없었구나.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통해 시작된 논리 실증주의는 그들이 말하는 정명한 언어가 사실은 정명하지 않은 언어에 기초함으로서만 성립한다는 것을 드러내게 됨으로서, 지난 세기 아담의 언어에 대한 마지막 시도가 허물어지고 말았지. "
논리철학논고의 기준에 따르는 정명한 언어는 흔히 개념어다. 특히 과학분야에서 사용되는 특정한 학술용어다. '세포'라거나, 'DNA'라거나, '빅뱅'이라거나 하는 확실한 의미를 가진 언어들. 하지만 그들 단어들의 의미는 무엇을 통해 보장되는가? 사전을 뒤져 찾아본다면 그것들을 해설하기 위해 사용된 언어가 결국은 개념어가 아닌 일상언어임을 알 수 있다. 확실하지 않은, 쓰레기같은 단어들. 이는 그들 개념어의 이해 자체도 결국 불분명한 일상언어, 즉, 헛소리의 집합으로 성립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논리실증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은 실패하고 만다. 그 실패는 결국 정명한 것에 대한 일체의 거부, 무한한 잡식의 세계인 포스트모던이란 지적 조류와 이어진다. 은결은 문득 물었다.
"아버지, 칸트는 어떻게 순수이성비판을 적고서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이라는, 미학과 윤리학에 대한 글을 적어낼 수 있었을까요? 자신의 머리 위에 별들이 빛나는 하늘과 가슴 속의 도덕률을... 숭고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문제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무의미함을 알았는데 말이예요."
"그러게 말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수행은 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상하게 웃으며 그냥 은결을 가슴에 품었다. 은결은 아버지의 품이 따뜻하다고 느꼈다. 본디 은결은 칸트를 묻고자 하지 않았다. 은결이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던 것은 그날의 미소였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면전에 대고 그것을 물을 수는 없었다. 수행의 품 속에서, 은결은 만일 그 질문을 했더라도 돌아왔을 것은 이 포옹임을 알 수 있었다.
*애니웨이 님의 추천에 감사를! 열심히 쓰겠습니다~
*제가 특정한 단어나 문귀를 반복해서 언급할 경우 그것은 인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대게의 독자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글의 언급이 일정한 맥락속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표지같은 것입니다. 저 자신의 미학적인 기준에 따르자면 그런 반복적인 사용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저 자신이 강력하게 영향을 받아서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제가 정말 강력하게 영향을 받은 것들은 이 글 전부를 통해 '숨겨져'있는 쪽이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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