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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124화 (124/300)

#   125-희망을 위한 찬가 - 말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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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나도 참 중증이군."

미래와 헤어진 은결은 불편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교실에 들어섰다. 잠이 부족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겹쳐진 한꺼풀 우울에 한층 무거워 보였다. 그가 자리에 앉으니 평소처럼 진을 치고 있던 민성과 동물원 삼총사가 그를 맞이했다.

"여, 시험 공부 잘 했냐? ...그 얼굴을 보니 안 물어도 답을 알 만하군. 껄껄."

민성의 말이다. 시험날 아침부터 교과서 대신 함께 모여 시시덕거리고 있는 일당의 일원이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본인도 인식하고 있던 문제였던 모양이다. 은결에게 전하는 민성의 뒷말은 동지애와 기쁨에 충만해 있었다.

"시끄러."

은결은 건성으로 답하며 책상 위에 상체를 뻗었다. 정신적으로 피로했다. 어제 또 논리철학논고를 처음 부터 읽기 시작했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연습장 위에 글을 적어 민성과 필담을 나누던 쿠로사카가 이어 은결에게 말했다. 물론 일어였다.

"(흐응- 시험 공부가 아니면 책이라도 읽었어? 하기야, 그런거 읽는다고 피로해지고 하지는 않겠지만.)"

"(뭐, 그렇긴 하지만 그 비슷한-)"

은결이 답하자, 성마른 기세로 민성이 끼어들었다.

"뭐야, 왜 또 갑작스레 일어야. 한동안 안 하더니. 하여간 일어 대화는 반칙. 우리는 모두 친구고, 친구는 서로를 소외됨 없이 대하는 것이 원칙! 지들 세계 만들기 없기!"

민성의 지적에 은결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동물원 삼총사가 킬킬대며 민성의 말에 찬성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고릴라였다.

"오오, 그거 좋은 의견."

"그러게나. 뭐, 민성 저놈 생각하는 거야 뻔하지만."

여우가 민성을 가소롭다는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민성이 은결과 쿠로사카의 사이가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불안해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옆에서 바라보면 뻔히 보이는 종류의 것이다. 하지만 여우가 생각하기에 민성에게 승산은 없는 것 같았다. 일단 의사소통이 은결만큼 원활하지 못하잖는가.

"그건 그렇지만 은결 저 녀석이 하는 말이면 한국어든 일본어든 영어든 상관없지 않을까?"

마지막 말을 한 것은 늑대였다. 모두 "그거 말 된다!"라며 한동안 낄낄대고 웃었다. 은결이 평시 하는 말이 일상적이지 않은 걸 비꼬는 거였다. 쿠로사카도 그 모양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녀도 다른 방식이지만 그들의 의견에 어느 정도 찬성했다. 은결은 주변과 소통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완고한 철벽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홀로, 오직 홀로. ...생각하자니 또 괜히 화가 치솟으려 했다.

"이것들이..."

은결이 지은 죄도 모르고 이를 갈았다. 쿠로사카는 쥐고 있던 펜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내가 주워줄께!"하며 설레발 치는 민성을 생긋 웃는 얼굴로 제지하고("이이에. 와타구시가 스루와."-이 말을 듣고 은결은 몸서리를 쳤다.) 떨어뜨린 펜을 주워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상체를 들던 도중에 방심하고 있던 은결의 턱을 자신의 머리로 올려쳤다.

"컥!"

빡! 소리가 나며 시원하게, 아주 시원하게 은결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아, 미안.)"

쿠로사카가 얼른 사과했다. 민성을 비롯한 동물원 삼총사는 어쩐지 쿠로사카의 표정이 미안해 하기보다 즐거워 하는 것 처럼 보인다고 여겼다. 물론 네 사람이 그것을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예의바르고 상냥한 쿠로사카가 그런 짓을 하고 즐거워할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

-은결은 평소처럼 시험지의 답안을 다 채우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지막 시간이었다. 어차피 생각할 거리는 많았다. 부족한 것은 화두라기보다 시간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어제에 이어 비트겐슈타인이었고, 논리철학논고였다. 그것은 언어의 문제였고, 언어의 문제를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소통의 문제를 생각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 소통이 문제였다.

어제부터 은결이 줄곧 생각하고 있던 것은 '원자의 역설'이었다. 그것은 가장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아닐지 몰라도 가장 오래된 철학적 문제의 하나였다. 존재론 부터 인식론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전방위적으로 대가들의 골치를 썩게 만든 것이었다. 은결은 그 가운데 인식론에서 나타나는 원자의 역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문제의식을 간명하게 표현하면 이러하다.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즉, 지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다.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것이 의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에 바로 '소통'이라는 것의 문제가 숨어 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우리는 아는 것 밖에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 만을 이해할 수 있고, 모르는 것은 보더라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으로 논리적으로 지식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알고, 지식을 쌓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이 지식은(소통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플라톤은 이 문제를 '상기'라는 개념으로 해결한다. 인간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고 떠올리는 것이다. 그는 본래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은 잊었을 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산파'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편리할 뿐이잖아...'

은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플라톤의 대답에는 지식에 있어 필연적일 소통의 문제가 배제되어 있다.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예 제거해 버린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가 이루어낸 높은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언어세계과 실재세계를 나누고, 언어세계의 원자(단어)들이 서로 밀접한 고리와 같은 관계에 있음으로, 그것을 통해 실재세계를 반영하면 결국 서로간의 관계에 의해 소통이 성립해 언어가 이루는 '그림'이 지식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소통이 배제되지 않고 지식은 가능해지고, 언어는 범주라기 보다 거울이 된다. 거울이 된 언어는 현실을 깨끗하게 반영하고, 자아를 담지 않는다. 타자를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은결은 논리철학논고를 그렇게 열심히 읽었고, 그렇게 열심히 논리철학논고를 생각했다. 이 글의 내용이 실현된다면, 은결이 품는 '소통'의 불모성에 대한 편견(이 되기를 바라는 판단)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문제가 해석의 문제일 뿐이라면, 철학의 문제가 언어의 문제일 뿐이라면, 철학의 문제는 결국 타자의 문제일 것이고, 철학이 이루어야 하는 것을 무엇보다 불모하지 않은 소통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에 민성이 했던 했던 말은 반성의 여지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아마도...

-딩동댕.

종이 울렸다. 침묵하던 공간으로 한꺼번에 소란이 돌아왔다. 은결은 생각을 끊고 몸을 폈다. 뒤에서 답장을 거둬갔다. 답장이 거둬진 책상에 앉아있던 학생들은 기세좋게 떠들었다. 은결이 지친 눈길로 옆을 바라봤다. 쿠로사카가 꼿꼿한 정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쿠로사카."

"응?"

"나한테 너처럼 편하게 이것저것 말할 수 있는 상대가 많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말야."

"음, 갑자기 무슨..."

쿠로사카가 당혹한 표정으로 몸을 물렸다. 대뜸 은결이 해 오는 말이 꽤 낮간지러웠다. 하지만 확실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은결은 히죽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별로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흥."

평정을 찾은 쿠로사카는 은결의 시선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은결은 이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혼자 끌어안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한다. 가끔 이런저런 이야기나 해 올 뿐이다. 그래서 쿠로사카는 은결과 자신이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데 의문을 가진다. 그것은 꽤 분한 것이었다.

"후후."

하지만 은결은 그걸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가볍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다시 쿠로사카는 은결을 한 대 때리고 싶다는 욕구의 끓어오름을 느꼈다.

"오빠,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어제부터 줄곧 끙끙거리는 거 같던데."

자전거 뒤에서 미래가 물었다. 그녀는 이미 주초부터 은결의 태도에서 이상스러움을 감지하고 있었다. 어느 때 물으면 좋을까, 하는 타이밍을 재어 보다가 이렇게 지나가듯 물어보는 것이다. 은결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동생의 물음에 답했다.

"음- 역시 사람은 나쁜 짓 하고는 못 사는 구나- 라는 거랄까?"

"그게 뭐야?"

미래가 퉁명스레 받았다. 쿠로사카라면 모를까 미래로서는 은결이 지금 한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은결도 미래가 이해하길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이 노린 지점은 오히려 은결 자신이었다.

"후후, 그런게 있어."

자신은 이번 주의 시작부터 줄곧 소통의 문제를 생각했다. 꿈을 꾸었고, 책을 읽었고, 책과 꿈을 엮어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는 지점에 '소통'이 있었다. 자신이 그 문제를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는 이유를 은결은 잘 알고 있었다. 세연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이 옳았던 것인지, 다시 한 번 줄곧 경험과 지식을 반추하고 연결하며 검토했다.

그래서 은결은 지금 미래에게 전달한 '그런게 있어.'라는 대답에서 상쾌함을 느낀다. 그 대답에서 소통의 가능성은 문제가 될 수 없었으니까. 그것은 그저 소통하지 않겠다는 대답일 뿐이었다. 플라톤의 '상기'처럼 '소통'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은결은 참 마음에 들었다.

"흠, 동생에게 비밀이라니, 마음에 들지 않아."

미래가 뒤에서 투덜댔다. 은결은 다시 웃었다. 그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상이한 에피스테메가, 해석의 범주와 방식들이, 굳이 충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상이함은 상이함대로, 그저 쩔뚝거리며 나아가면 그뿐이지 않겠는가--

"대단한 거 아냐. 시장에나 가자."

그리고 은결은 페달을 밟아 속력을 더했다. 바람이 강하게 두 사람을 맞았다. 그 바람 가운데서 은결은 다시 자신의 판단이 옳았던지를 생각한다. 역시 자신의 판단은 옳았던 것 같았다.

어떤 생각을 겹쳐도 결국 그것들이 도착하는 지점은 8년 전 서울의 상공에서 아버지가 보여주었던 미소일 뿐이었고, 그리고 아버지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감각과 현실의 결론이 보여주는 사태의 명증함 앞에서, 다른 결론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소통의 불모에 대한 감각을 은결은 뛰어넘을 수 없었다.

*진아 님의 꼽사리 추천에 감사를.

*죽음의 한 연구는 제가 소설의 한 이데아로 삼고 있는 글입니다. 그런 만큼 이 글도 어느 정도 그 영향을 받고 있겠지요. 음.

*이 글이 출판되지 않아 아쉬운 것 중 하나는 몇 분 선생님들께 책을 선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님들이 이런 시도를 통해 현재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을 굉장히 진지하게, 그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고 있고, 그런 만큼 제가 글을 쓴다는데도 꽤 기대를 하셨기 때문에...음. 물론 이 글이 그런 바람을 위해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바람이 적게나마 담긴 것은 사실이죠. 간만에 선생님들과 진행하는 스터디 모임에 갔다 와서 해보는 소립니다. 쩝.

*성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만. 여하간 새해 복 많이 받으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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