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123화 (123/300)

#   124-희망을 위한 찬가 - 말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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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방에서 은결은 책을 읽고 있었다. 200p나 될까 싶은, 두껍지 않은 책이었다. 펼쳐진 페이지는 거의 마지막 부분으로 보였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였다. 그는 어제부터 꾸준히 읽어 오늘 겨우 다시 이 짧은 책을 다 읽어가는 참이었다.

은결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은 아버지와 함께였다. 수행은 은결에게 한 문장 한 문장을 해설하다시피 하며 이 책을 읽어 주었다. 그가 이틀만에 이 짧지만 지난한 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이해가 지속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은결은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고, 계속해서 문장을 읽었고, 마지막 문귀에 도착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

은결은 흘리듯이 욾조렸다. 그것은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문장이며, 결론같은 글이다. 그 문장에서, 은결은 칸트를 느끼곤 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결국 수행했던 작업이 이성의 한계를 파악함으로서 이성이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의 한계를 지정하는데 있었듯이, 논리철학논고는 언어에 대한 천작을 통해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한계를 파악해 선을 긋고자 한다. 이성의 가장 직접적인 현실화의 모습이 '언어'임을 생각할 때, 결국 엄정한 그들 텍스트가 노리는 지점은 같은 지점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은결은 하게 되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기. 모든 애매성에 대한 거절. 의미의 기초를 의미로 닦아냄으로서, 가장 정명한 의미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시도. 그는 '아주' 라거나 '매우'와 같은 그 단어가 지칭하는 지점이 불확실한 언어표현을 모두 부정한다. 그래서 논리철학논고에 나타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은 '그림이론'이라 불린다. 언어와 세계의 일대일 대응 관계를 이룸으로서 거울처럼 맑은 소통을 이루어 내고자 하는 시도다. 그것은 세계를 구획하고 잘라내어 해석하는 '범주로서의 언어'를 거절하고 '보편적 의미의 담지자로서의 언어'를 이룩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현대에 부활한 '아담의 언어'에 대한 시도였다. 그러하기에, 이 글의 마지막은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해야 하며,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 될 수밖에 없었다.

"......"

은결은 시선을 돌려 자신의 책장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책장을 훑었고, 한 곳에가 정지했다. 아버지의 책이 보였다. '파블로프는 우리의 희망일 수 있는가?' 유럽의 계몽주의가 낭만주의으로 전화되는 과정에 대한 사상사적 파악을 통해 수십년전 세계의 현실을 읽고, 거기서 다시 한국을 읽었던 책.

거기서 수행은 낭만주의에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정초를 세운 이론가로 칸트를 꼽았다. 마찬가지로 은결은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언어이론에서 포스트모던이라는 지적 조류의 가장 중요한 기초를 느낀다. 물론 칸트는 낭만주의자가 아니고, 비트겐슈타인은 포스트모던 사상가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적 작업이 그 이후에 심원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똑똑.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장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소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미래였다. 그녀는 은결을 보고 발랄한 표정으로 근처 침대에 걸터앉고는 말했다.

"오빠. 물어볼게 있는데."

"뭔데?"

"이번에 학교에서 논술시험 보는게, 우리 반은 주제가 낙태거든. 오빠는 언제부터 낙태를 금지하면 된다고 생각해? 나는 책 이것저것 읽어봐도 잘 모르겠더라. 오빠는 이런거 잘 알잖아."

미래가 대뜸 물었다. 은결은 그 말을 듣고 잠깐 이맛살을 찌푸렸다. 질문의 내용이 답하기 곤란한 내용이었던 탓이다.

"글쎄다... 나도 너보다 사안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안다 뿐이지 정답을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서."

"그래도-"

미래가 부탁했다. 은결은 별로 잘 아는 쪽의 내용이 아니라 꺼려졌지만 미래가 부탁하니 거절하기도 껄끄러워 그냥 말을 시작했다.

"큼... 이 문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더해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선행되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특정한 어느 지점을 말하기가 어려워. 그걸 넘어간다고 쳐도 혹자는 뇌에서 의식활동이 일어난다고 추정되는 시점이전과 이후가 중요한 것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본질이 뇌의 의식에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정확한 답이 이루어지지 않았단 말야. 하물며 그 부분을 인정해도 태아의 의식이란 뇌사와는 달리 인위적인 해악이 없는 이상 자연히 발생할 것인데 그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란 주장도 있어."

"그러니까 금지될 수 있는 외부의 폭력이 아니었다면 필연적으로 이루어졌을 생명의 가능성을 생명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말이야?"

미래가 애매한 표정으로 은결에게 확인차 물었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이해를 긍정했다.

"그래. 그래서 가장 극단적인 입장에서는 수정된 수정란의 시점에서 이미 하나의 인간으로서 인정해야 한다고 보지. 이건 종교적인 관점에서 하는 말이 아니고, 한 인간이 죽을때까지 가지는 자기연속성은 실질적으로 유전자에 있을 뿐이이고, 마찬가지로 수정란은 가만히 놓아두면 필연적으로 생명이 이루어질 것임으로 그걸 죽인다는 것은 사실상 인간을 죽이는 거란 입장인거지. 이걸 동일성 입론이라고 해. 이런 입장에서는 심지어 사후 피임도 인정하지 않지. 여기에 대해서도 착상된 지 14일 이전의 배아는 분열과 합체의 모습이 보임으로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고... 계속 논란 중이지. 뿐만 아니라 여기 더해서 '내 배는 내 것이다.'라는 다소 극단적인 주장 위에 여성의 권리를 위한 낙태에 대한 주장들도 있고, 이 문제와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종교 진영에서의 의견도 무시할 수 없지. 어떤 측면이든지 간단히 정리될 수 있는 문제는 아냐."

논증과 반론, 그리고 논증과 반론. 은결에게 그것은 결국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 속한 문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흐음..."

은결의 말을 듣고 미래는 침대 끝에서 끝으로 몇 번 데굴데굴 구르다가 멈추면서 하아-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숫자 끼워넣는거 하고 달리 이런건 명확한 정답이 없어서 싫더라. 교과서에서도 애매한 소리만 하고. 오빠 말 들으니까 어떻게 적어야 할지 더 모르겠어."

미래의 투덜거림을 듣고 은결은 쓴웃음을 지었다. '명확한 정답이 없어서 싫더라.' 은결은 미래의 그 불만이 사랑스러웠다.

"음- 그러면 방향을 바꿔서 왜 낙태에 대한 생명의 기준선을 정하는 것이 이렇게 논란이 되는가를 적어보면 어때? 낙태가 주제라고 언제나 낙태를 허용하거나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안 자체에만 촛점을 둘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어?"

"에? 그게 무슨 말이야?"

미래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은결을 바라봤다. 그는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가령 이런거야. 낙태가 논란이 되는 것은 결국 그 결과를 법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잖아. 인정할 수 있는 행위와 인정할 수 없는 행위를 규정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것은 다시 말해 잠정적이나마 생명이라는 것의 기준을 법이 '규정'하게 된다는 말이기도 해. 법이라는 기준이 생명과 비 생명,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게 된다는 것이지. 하지만 생명은 사실 그렇게 '구성되는' 게 아니잖아? 생명은 그저 생명인거지.

그러나 생명 뿐만이 아니라 법적으로 등록되지 않은 사람은 사실 현대 사회에서 사람으로서 성립하기 힘들지. 그들은 '아무것도 아냐.' 이런 측면에서 사유를 확장한다면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성격의 글을 적어보는 것도 가능하겠지. 낙태 논란에서 제도의 폭력성을 읽어낸다는 것은 비판의 대상이 명료하기 때문에 쓰기 어렵지도 않을거고. 이게 아니라면 다른 방식으로 사안을 해석함으로서 네가 쓰려는 글의 주제를 얼마든지 변형시킬 수 있을거고. 방법은 여러가지지."

은결이 말을 끝냈다. 미래는 벌떡 일어서며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고무공을 튕긴 듯한 그녀의 태도가 은결의 말에 대한 그녀의 감상을 대변하고 있었다.

"아! 그러면 되겠네. 오빠 천재!"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응. 마음에 들었어. 후훗. 아, 이런걸 개안했다고 하나? 시야가 확 트이는 기분? 음. 하여간 좋아."

그리고 미래는 다시 상체를 세워 침대 위에 바른 자세로 앉았고는 은결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내일이 엄마 제사지?"

"응. 내일이지."

"제삿상 차리는 거야 내 실력으론 못 돕겠지만, 장보는 것 정도는 도와줄 수 있으니까, 학교 마치면 나도 오빠랑 같이 시장에 갈께."

"마음만 고맙게 받을테니, 시험 공부나 열심히 하세요."

은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미래는 그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했다.

"싫어. 나도 가끔은 이런 것도 도와야지. 음."

그리고 미래는 기분좋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이며 은결의 방을 빠져나갔다. 잔잔한 미소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은결은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다시 방안에 홀로 남았다. 그는 고요 속에서 미래가 자신의 대답에 대해 돌려줬던 평가를 생각했다. 그녀는 은결을 향해 '천재'라고 농섞인 어조로 호의를 담아 말했다.

은결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미래는 자신의 대답에 만족했지만, 은결이 생각하기에 그 대답은 대단하거나 높이 평가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기껏해야 겨우 '도피'에 불과한 대답임을, 은결 자신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비트겐슈타인을 생각했다.

*제게 휴식을 종용하시는 분들의 의견에 대해서는 감사를 보냅니다. 계속 써보다가 아무래도 견디기 힘들다 싶으면 쉬거나 날자를 조정 하겠습니다. 어쨌거나 이 것이 올해 마지막 화입니다. 새해에 뵙죠.

*2006년 기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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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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