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희망을 위한 찬가 - 말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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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험 날 마지막 시간이다.이미 문제를 다 푼 은결은 입가로 펜을 물고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멍한 그의 시야는 외계의 모습을 물질적으로 담지할 뿐,의미를 가지고 그것들을 조직하지 않았다. 의미를 통해 구획되고 지정됨 없이 받아들여지는 세계의 모습은 단순한 어둠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은결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늘 꾸었던 꿈이었다. 그 꿈은 참혹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아프고 쓰린, 그런 꿈이다. 거기서 아버지는 날개 잃은 이카루스처럼 몰락했다. 그렇지만 은결에게 그 꿈을 무엇보다 참혹하게 만드는 것은 아버지의 몰락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 보다는 아버지의 맑은 미소가 은결에게는 더 슬프고 참혹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꿈꾸지 않는 자의 미소 같았다. 거기에서 은결은 소통의 불모함을 느낀다. 그러한 위기 앞에서 조차 결국에는 통합되지 못했던 균열의 면면들.
대화하고자 하는 이들이 정말로 꽉 막힌,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는 아집의 군상들이었다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핑계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소통할 수 없었던 이들의 거반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의 기준에서 존경받을만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과의 대화는 성공하지 못했다. 성공하지 못한 대화는 결국 그 괴물을 나타나도록 했고, 그 괴물을 상대해 아버지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 합의를 통해 막을 수 있었던 것을 결국 막을 수 없었다. 그런 순간에도 합의를 이루어낼 수 없었다는 사실, 거기서 은결은 완벽한 폐허를 느낀다.
'......'
세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녀에게는 미안한 짓을 했다. 아버지에 대한 꿈을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도 마찬가지로 이것이 최선이었던 것 같다.
'집에 돌아가면 논리철학논고나 다시 읽어볼까...'
은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줄기 그림자가 빛살처럼 공중을 날았다. 그 앞으로는 거대한 검은 덩어리가 있었다. 두 개체의 쫒김과 쫒음은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잡아낼 수 없다. 그것은 말 그대로 대기를 찢어발기며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이 주변으로 파급되지 않는 것은 광범위한 결계가 지속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었다. 한 순간이라도 그 결계가 무너진다면 그 주변은 소리만으로도 적지 않은 피해가 발생할 터였다.
한 순간, 검은 덩어리의 앞으로 흰 빛이 솟아오르듯 나타나며 옥상에 내려앉아 그 앞에 막았다. 그 빛은 한 사람의 인영이었다. 검은 덩어리- 사념체는 결국 그 빛을 피하지 못하고 멈춰섰다. 그렇지만 사념체는 자신의 몸체를 무수한 촉수처럼 바꾸어 앞길을 막은 사람을 공격했다.
그러자 사념체의 앞에 선 사람은 들고 있던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주변으로 진홍색 진이 떠오르며 그것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 인영은 공격을 막아냈을 뿐, 다음 동작을 이을 수 없었다. 사념체의 공격이 연속적이었기 때문이다.힘과 힘의 충돌로 인해 그가 만들어낸 마법진은 노이즈가 일어나는 TV화면처럼 일그러졌다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이소이데!(서둘러!)"
그 사람이 일본어로 외쳤다. 더해서 여성의 목소리였다. 지금 사념체와 물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쿠로사카였다. 그녀의 외침에 "알았어!" 하는 답이 돌아왔다. 이제껏 뒤에서 사념체를 쫒던 은결이었다. 그리고 사념체의 뒤꽁무니 쪽으로 쿠앙! 하는 폭음이 강렬한 빛과 함께 일었다. 동시에 푸른 빛을 띤 3차원적인 마법진이 사념체를 감싸더니 조여들기 시작했다. 사념체가 마법진에 묶여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것은 은결의 마법을 파괴할 수 없었다. 몇번의 원하지 않은 사고를 거쳐 지금 은결이 운용하는 기의 총량은 이 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도 높다. 물론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기의 총량, 좀더 세밀하게 말해, 단위면적당 일정시간 내에 투여할 수 있는 기의 총량은 예전에 비해 큰 상승이 없었지만, 기의 지속적인 투여가 필요한 술법에서는 그를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쿠로사카가 그 모습을 보며 깊은 숨결을 들이키며 보호진을 풀었다. 그리고 키리야미를 사념체의 앞으로 내밀었다. 힘을 머금은 키리야미의 날은 평소때 보다도 한층 성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하앗!"
쿠로사카가 빌딩 옥상을 밟으며 대각선으로 날았다. 그리고, 한 줄기 빛이 공간을 갈랐다. 정적같은 시간이 흘렀고, 몸부림치던 사념체는 담배연기처럼 스러지기 시작했다. 쿠로사카는 공중에서 키리야미를 허리춤에 회수하고 가까운 빌딩의 옥상에 안착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역장을 펼쳐 진을 유지하던 은결은 가벼운 동작으로 뛰어 그녀가 있는 곳 까지 왔다. 그리고 밝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수고했어."
은결의 말은 일어였다. 쿠로사카는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은결이 말했다. 이번에도 일어였다.
"특히 마지막 검격은 정말 보고 있는 쪽이 다 상쾌해질 정도로 깨끗했어. 나야 검을 사용하지 않으니 잘 모르겠지만 오늘도 컨디션이 좋아보이던데,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좋은 일이랄까. 그냥 요즘 들어 몸 상태가 좋을 뿐이야. 기의 총량에는 변화가 없지만 효율이 좋아진 것 같아. 자동차의 연비가 좋다는게 아마 이런 게 아닐까 싶군.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싫어할 까닭은 없겠지."
"흐응."
은결이 건성으로 답했다. 쿠로사카가 컨디션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이 문제에 대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은 큰 가치가 없다고 여긴 까닭이다. 이어, 쿠로사카가 음, 하고 말 사이의 틈을 잡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아침부터 다시 내게 일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달리 무슨 이유라고 있었어?"
"왜 싫어?"
은결이 희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어딘가 슬퍼 보이는 웃음이었다. 쿠로사카는 그의 표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되는 탓이다.
"싫다기보다는... 좀 의외잖아."
"그런가. 뭐, 그냥 소통의 문제를 생각했을 뿐이야. 내가 네게 일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너를 배려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지만 이미 그 문제에 대해 화해를 이룬 지금, 그런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겠지. 그런 면에서 보다면 오늘에야 겨우 다시 네게 일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도리어 느린 거라고 볼 수도 있을거야."
은결은 담담하게 말했다. 상대에게 대놓고 말하기 어려운 내용이라 듣고 있던 쿠로사카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은결의 담담한 말 속 이면에 깃든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간 은결과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래서 그런 분위기를 읽는데 다소 익숙해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네가 우울한 거야 일상적인 것이지만, 오늘은 한결 더 한 것 같은데."
"그냥, 역시 사람은 나쁜 짓 하고는 편히 못 사는 것 같구나- 하는 뻔한 소릴 체감했달까. 뭐, 그런 정도야. 지난 주에 세연 양에게 좀 못되게 굴었거든."
은결이 답했다. 그로서 쿠로사카는 지난주부터 괜시리 신경쓰이던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아아, 그 카미가 깃든 그녀 말이군. 그런데 못되게 굴다니?"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러지 말라고... 차버렸거든. 음, 틀림없이 많이 울었을거야. 착하고 내성적인 아가씨라서... 그런건 별로 겪어보지 못했을테니까."
잠깐 대화가 끊어졌다. 쿠로사카는 은결의 말에 대해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해본적이 없었다. 물론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상대를 거절한다는 것' 자체는 그녀에게 익숙하다. 은결보다 훨씬 선배다. 그렇지만 쿠로사카가 거절했던 상대는 대부분 그녀와 거의 소통이 없었던 상대였다. 그녀는 그들을 차면서 아무런 고민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은결은 경우가 달랐다. 어쨌든 세연이라는 그 아가씨는 은결과 상당히 친밀해 보였다. 그런 상대를 거절한다는 것에 대해서 쿠로사카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왜... 찼어?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던거야?"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그 정도였다. 그 말을 하면서 은밀하게 가슴이 뛴다는 것도 쿠로사카는 짜증스럽게 여겨졌다. 은결은 허무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설마."
"그럼 왜 거절했어? 그녀는... 아름답고 선해 보이던데. 하다못해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라도, 사귀었으면 좋을 것을."
쿠로사카는 떠보듯이 물었다.
"그럴수도 있겟지. 하지만 연애를 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한다는 그런게... 못 견디게 불모한 것으로 느껴졌거든. 나와 그녀가 그런걸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내 세계는 그녀와 너무나 다른 걸. 그렇게나 다른 세계의 간극이 좁혀질리는 없을테니까.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그녀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그래서 해석되는 세계의 모습은 전혀 달라."
돌아온 대답에 쿠로사카는 화가 났다. 그녀는 이러한 은결의 태도가 싫었다. 그는 그녀의 분노에도, 그녀의 감탄에도 변하지 않는다. 그는 외계를 거절하고 그냥 혼자 걸을 뿐이다. 지금 은결이 한 말은 그러한 태도를 집약시킨 것만 같았다. 쿠로사카는 그런게 싫었다. 그렇게 한다면, 그때 자신에게 그가 했던 이야기는 모두 무엇이었던 걸까? 그래서 그녀는 열이 오른 어조로 은결을 향해 말했다.
"그건 네 부모님도 마찬가지셨을 거 아냐? 이 일을 하는 사람 가운데 가계 전부가 그러한 사정을 아는 경우는 많지 않아. 대게는 비밀이지. 하지만 틀림없이 두 분은 사랑하셨겠지.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 이 장소에 있을 수 있을테고. 네 단정은, 자칫하면 네 부모님에 대한 모욕이기도 할 수 있어."
"그게... 그렇게 되는걸까."
"그렇게 되는거야!"
"아냐. 나는 나의 이러한 감각이나 체험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아. 나는 진리를 말하고 있는게 아냐. 그냥, 내가 견디지 못하는 것일 뿐이야. 말하자면 취향의 문제겠지. 다른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런 간극을 화해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거야. 더구나 그런 경우는 그냥 비밀일 뿐이잖아. 그런건 소통이 아냐. 필요한 것은 침묵이지. 내 아버지와 어머니도... 아마 그러시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침묵하기에 그녀는 꽤 여러가질 이미 알고 있으니까."
은결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쿠로사카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의 의견은 견고한 암벽 같았다. 답답했다. 몇대 쯤 후려쳐주고 싶어서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갑자기, 은결이 다시 물었다.
"쿠로사카. 너희 어머니는 건강하셔?"
"키리야미를 쥔다면 여전히 나보다 강하실걸."
채 화가 풀리지 않은 쿠로사카는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헤에- 좋겠다. 나는 어머니에 대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해. 어머니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던가 하는 것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지. 그냥 그건 공백같은 거야. 어쩌면 그래서 네가 말하는 그러한 화해가 낮설기만 한 걸지도 모르겠어.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이좋게 있는 장면을 사진을 제외하고는 본 적이 없거든."
은결은 의견에 논리를 추가하듯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쿠로사카는 이번 주에 은결 어머니의 기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녀는 더 이 문제로 무언가를 말하지 않았다.
*지치네요... 요즘 글 쓰기가 되게 힘들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한 동안 쉬면서 플롯이나 정리해볼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갑자기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걸려 복구하느라 고생한 것도 한 몫하고 말입니다. -_-
*성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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