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희망을 위한 찬가 - 말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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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악의 총체 같은 것이었다. 절망의 총체 같은 것이었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 때 뛰쳐나온 모든 것이 하나로 합쳐진 듯한, 그런 압도적인 부정성의 총체같은 것이었다. 은결은 두려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수행이 은결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음- ‘설마’가 ‘역시’로 전환되는 것은 별로 반갑지 않군요.”
“그저 각오하는 수밖에 없구나. 네게는 미안하다. 내 힘이 좀 더 큰 것이었다면 이 일을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요. 어차피 모두들 상상력이 부족했습니다. 종교란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기 마련입니다. 인식의 한계를 보조하는 상상력은 언제나 불온함을 요구하지만, 종교는 불온을 용납할 수 없는 에피스테메(인식틀)니까요.”
수행은 웃으면서 말했다. 서울의 성공에 떠 있는 저 검은 사념의 덩어리를 보고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은결은 아버지의 그 미소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연락해 뒀다. 늦어도 내일 까지는 적어도 삼백 명 이상이 도착해 퇴치를 도와줄게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에서는 곧 도착하겠지. 그때까지 시간을 버는데 주력하자꾸나.”
“그래선 늦습니다. 저 녀석이 숨어버릴 겁니다.”
“그럼... 어쩔 생각이냐?”
“싸워야 겠지요. 은결에게 창피한 꼴을 보일 수야 없지요.”
“무모한...! 아무리 너라고 해도-”
할아버지는 외친다. 그는 아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지만, 그래도 저 녀석은 개인이 상대할 수 있는 종류의 괴물이 아니다.
“무모한지 안한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저는 이제까지 전력을 다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이 일이 끝나면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뀔 것입니다.”
수행은 웃으며 할아버지의 말에 답한다. 그리고 그의 주변으로 백광이 펼쳐지며 모든 사기를 걸러낸다. 신성에 가까운 휘광이 공간을 장악하며, 복잡한 진이 그곳으로 촘촘히 스며들었다. 이제 수행을 중심으로 반경 9km이내는 그의 영역이다. 아름답고 위엄찬 광경이었다. 보고 있던 이들은 모두 다시 한 번 경악했다. 그 영역 안에서라면 수행은 생각하고, 말하는 것만으로 행위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수행이 보여준 것은 그런 것이다. 그는 이 영역 가운데서 신과 같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수행의 강함에 대한 인식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던 것이었다. 그는 전혀 격이 다른 강자였다. 모두의 마음 가운데 ‘어쩌면...’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보고 있거라. 어머니가 여자보다 강하듯, 아버지도 남자보다 강하다는 걸 보여주마.”
수행은 은결의 머리를 쓸고는 천천히 걸어나갔다. 세계가 그에 조응하며 술렁였다. 검은 악의의 덩어리는 붉은 눈길을 수행에게 보이며 갸르릉 거렸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모양이 그에게 두려움을 느낀 모양이었다. 수행은 손을 내밀었다. 공간이 폭발하며 그 검은 덩어리를 휘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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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적인 일격이었다. 사념체의 덩어리는 두려움을 증오로 바꾼 눈길을 수행에게 보낸다. 그것의 악의가 증폭되며, 안개 같은 사념이 밀집되며 탄력을 지닌 검은 물질로 바뀌어 뻗어 나왔다. 그것은 엄청난 스파크를 튀기며 수행이 장악한 공간을 파괴한다. 그러나 수행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은결은 느릿하지만 멈춤 없이 전진하는 수행의 등을 여러 감정이 복합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강렬하게 어린 은결의 뇌리를 장악하는 것은 아버지의 미소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미소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전력이라면 저 괴물을 상대할 자신이 있었기에 그런 미소를 지었던 것일까? 은결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의 웃음은 결코 저 괴물을 상대할 자신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 미소는 전혀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은결은 눈을 떴다. 그는 조용히 상체를 일으켰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다. 창가로는 진홍의 햇살을 예감케 하는 서늘한 푸른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은결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러 화장실로 향했다. 방을 떠나기 전 그는 방안의 책장을 바라본다. 다채로운 책들이 꽂힌 책장 가운데 그의 눈길이 머문 곳은 엉성한 제본의 얇은 한 책이다. 희미한 검은색 잉크로, 거기에는 ‘파블로프는 우리의 희망일 수 있는가?’라는 문장이 인쇄되어 있다.
“......”
은결은 눈을 감았다. 방금 꾸었던 꿈의 단면을 떠올린다. 그것은 사실의 한 단면이기도 했다. 거기서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어차피 모두들 상상력이 부족했습니다.’ 어린 시절, 은결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아버지가 왜 그런 말을 했던 것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은결은 여전히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아버지는 어떻게 그 말을 하면서 웃을 수 있었을까? 은결에게, 수행의 그 미소는 여전히 커다란 수수께끼다. 그것은-
“...이번 주에 어머니 제사가 있구나.”
다른 종류의 일상사를 입에 올려 삶의 한 국면에 처해 들끓었던 감정의 재생을 억누른다. 은결은 방을 나섰다. 걸음과 걸음을 따라, 오늘 해야 할 일을 정리한다. 우선은 아침 메뉴를 결정하는 일이 시급했다. 냉장고에 무엇이 남아 있더라? 그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은 어떤 것이더라? 은결은 생각했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자아가 자아를 잡아먹듯, 감정이 감정을 잡아먹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실체로서의 자아, 감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어차피 타자의 찌꺼기다.
“아함.”
자전거에 열쇠를 채우는 은결의 옆에서 미래는 하품을 했다. 잠이 부족한 것 같았다. 곧 자전거에 열쇠를 채운 은결이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시험이라고 벼락치기라도 했어?”
“흥, 시험은 평소실력으로 치는 거야. 벼락치기 같은 편법은 사용 안 해. 그냥 어제 읽던 책을 마저 읽느라 좀 늦잠을 잔 것뿐이야.”
미래는 당당하게 말했다. 수백만 학생들의 원성을 들을 지나치게 모범적인 답변이지만, 확실히 미래는 시험이라고 특별히 많이 공부를 하지는 않는다. 평소에 하던 것에 더해 지난 공부를 정리하는 정도랄까. 이어 그녀는 다소 답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오빠야말로 좀 더 위를 노릴 생각은 없어? 나는 오빠 책장에 있는 책 아무거나 꺼내 읽어보면 머리가 다 핑핑 도는 것 같던데, 오빠는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게 읽으면서 학교 공부는 도통 신경을 안 쓰잖아. 나 같으면 그런 거 읽을 시간에 교과서나 읽겠다.”
“글쎄다...”
은결은 가볍게 웃어 그 말을 받아넘기며 앞으로 걸었다. 미래는 은결의 애매한 대답이 불만스러워 하면서 그 뒤를 따랐다. 먼저 가는 학생들 사이로 긴 흑발의 소녀가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은결이 손은 흔들며 반갑게 불렀다.
“아, 쿠로사카!”
앞서가던 쿠로사카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하고 그림처럼 아름답게 생긋 웃었다. 옆에서 미래는 불퉁한 얼굴로 그녀를 째려봤지만 쿠로사카는 미소를 허물지 않았다. 은결이 바쁜 걸음으로 그녀가 있는 곳 까지 걸었다. 미래가 그 뒤를 따랐다.
“(지난주 토요일에 요리는 잘 했어?)”
“(네가 전해준 레시피 덕분에 괜찮았어.)”
“(다행이다. 그런 일이 있다면 언제든 또 말해. 도와줄게.)”
“(그래.)”
두 사람의 대화는 전적으로 일어로 이뤄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미래는 그 대화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대화의 분위기가 무척 부드러운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대화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미래의 불안이 한결 더해졌다. 결국 그녀는 불만스런 얼굴로 은결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무, 무슨 이야기 하고 있어?”
“아, 별거 아냐. 그냥 지난주에 미처 도와주지 못한 게 있어서.”
“혹시, 지난 토요일에 외출한 거랑 상관있어?”
미래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은결이 아니라고 대답하기에 앞서 쿠로사카가 즐겁게 쿡쿡 웃었다. 그녀는 적대적인 눈빛의 미래를 즐겁게 바라보다가 발랄한 목소리로 은결에게 말했다.
“(네 동생에게 오빠 뺏어가지 않는다고 좀 전해주겠어?)”
“에? 응.”
그리고 쿠로사카는 당혹해 하는 은결을 남겨두고 먼저 걸었다. 미래는 다시 은결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뭐야, 무슨 말 한 거야? 나한테 한 말 같은데.”
“음- 시험 잘 치래.”
미래의 재촉에 왼쪽 볼을 긁으며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은결은 결국 정보를 왜곡해 그녀에게 전달했다. 그 말을 듣고 미래는 한층 화난 얼굴을 하고는 쿠로사카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는 전교 1등의 자존심을 담아 자신만만하고도 앙칼지게 말했다.
“흥! 본인 성적이나 신경 쓸 것이지!”
“어련하실까요.”
은결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회한자 님의 추천에 감사의 마음을!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흑흑.
*인기투표 발표는 다음 화나 다다음화 잡담에 넣겠습니다... 가족과 함께 간단히 외식을러 나가야 하니 오늘은 좀 적어도 양해를. 이 글은 퇴고도 못한 상태입니다...
*이브군요. 사실은 예수님 생일이 아니라 태양신 미트라의 기념일이었다고 합니다만, 하여간 구세군에 적게나마 기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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