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119화 (119/300)

#   120-희망을 위한 찬가 - 변신시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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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끝내고 비용은 세연이 계산했다. 은결이 하려 했지만 세연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 사이에 있었던 대화는 어색했다. 가게 밖으로 나서니, 들어올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무수한 웃음들. 가벼운 걸음걸이. 날 듯한 설렘. 개인의 고통에 세계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명백함은 이런 곳에까지 뻗쳐져 있었다.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없이 길을 걸었다. 은결은 주변을 살피며 일부러 사람이 다소 뜸해 보이는 쪽으로 걸음을 걸었다. 세연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 주변의 사람들도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두 사람을 피하는 것 처럼 길을 비켜서 걸었다. 곧 골목은 한적해 졌다. 은결은 결계를 펼쳤고, 몸을 돌렸다.

“미친 새끼. 결국 저질렀군. 뭐, 언젠가는 이리 되지 않을까 생각은 했다만.”

은결을 맞이한 것은 푸른 이빨의 분노한 말이다. 그는 세연의 고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은결을 쏘아보고 있었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지랄. 이 계집이 질질 짜댈게 뻔한데 상관이 없긴 왜 없어? 내가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 다 까먹었냐? 이 씹어 처먹을 등신새끼야. 아, 진짜 마음 같아서는 노릇노릇하게 튀겨주고 싶은데, 그것도 못하겠고... 개씨발 좆같은!”

“너, 너무 오래 사람 속에 들어 있었던 거 같군.”

은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푸른 이빨이 불쾌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곱게 접힌 피부의 주름 사이에서 살기가 스며 나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앙?”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설사 그렇다 해도 별 상관없는 얘기겠지. 약속했던 대로 세연 양의 기억을 무의식 차원에서 손보도록 함으로서 육조의 게송을 지우도록 할 테니, 너도 좀 도와줘.”

“그러마. 좆병신아.”

‘좆병신...’ 뭔가 심금을 울리는 욕설이라서 은결은 내심 푸른 이빨을 말을 다시 중얼거려봤다. 그러면서 그는 왼손 엄지손톱을 세워 오른쪽 손목을 그었다. 피부가 갈라지며 붉은 피가 솟아나왔다. 그것들은 손목의 곡선을 타고 방울져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은결은 그 광경을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수인을 맺고 영창을 시작했다. 피가 춤을 추듯 움직이며 푸른 이빨 주변으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오, 정신 상태는 돼지 씹창 같은 게, 지 아비를 닮아서 그런가 역시 기술은 좋군.”

푸른 이빨은 감탄 같지 않은 감탄을 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진이 형성되며 기가 일정한 순서와 변형을 거치며 세연의 몸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로서 세연의 기억을 조작하기 위한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푸른 이빨은 그 기를 적합하게 안내해 부작용을 없애고 작업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은결의 손목으로는 피가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고, 그 피는 진으로 변화되어 나갔다. 한동안 영창을 지속하던 은결이 ‘후-’ 하는 긴 한숨을 쉬며 수인을 풀었다. 은결이 흘린 피는 희미한 붉은 빛을 뿌리며 완전한 하나의 마법진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에서 흐르는 피도 지금은 멎어 메마른 피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다음은-”

그러면서 은결은 세연의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 주변으로 빛이 모여들었다. 그 빛은 세연의 머리 주변으로 이어지며 아름다운 황색 빛의 구름을 만들었다. 그리고- 빛이 꺼졌다.

“끝났냐?”

푸른 이빨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마법진의 빛도 점차 스러지며 진 자체가 적갈색의 먼지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하지만 그녀가 그 게송에 얼마나 집중했던 가에 따라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어. 무의식 수준에서 기억을 조작하는 건 지극히 위험한 거라서 조심할 필요가 있고, 때문에 작업 자체도 그렇게 큰 효과를 보지 못할 수도 있지.”

“흐응.”

“하여간 이번에 도와준 것은 고맙게 생각해. 그 뒤에 한 행동은 최악이었지만.”

“흥. 그 벌레새끼가 그렇게 혐오스런 놈인걸 알았다면 네 제안 따윈 듣지 않았을거다. 그 무슨 씨발 좆같은 새끼가 다 있는지. 뒛! 그 대신 키리야미의 전승자를 데리고 논 정도로 끝낸 걸 고맙게 생각해. 마음 같았으면 이깟 도시 전부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었는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계집애를 너무 간단히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거다.”

은결이 대답 대신 의아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푸른 이빨은 은결의 눈길에 대답하지 않고 키득댔다. 그리고, 세연의 눈길이 풀리더니 한 순간 기절하는 것처럼 그녀의 몸 전체에서 힘이 빠졌다가 워래 세연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흐트러지려던 발걸음을 금세 바로잡고, 은결을 바라봤다. 다시, 슬픔과 부끄러움에 그녀는 볼을 물들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은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죠.”

“예...에.”

세연은 힘없이 답했고, 두 사람은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정류장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곧 그곳에 도착했고, 은결은 말없이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간 시간이 흘렀다. 도로 먼 곳에서 노랜 빛을 뿌리며 버스가 한 대 달려왔다. 은결이 타려는 버스였다.

“그럼... ”

그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난 은결은 한동안 그녀에게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헤메다가 결국 간단히 인사를 하는 정도로 그쳤다. 지금 상태로는 무슨 말을 해도 어색하고 괴로울 것만 같았다. 버스가 도착했다. 은결은 버스에 올라탔다. 세연은 황급히 말했다.

“저- 다음에 또, 뵈요.”

“그러겠습니다.”

은결이 답했다. 그리고 버스의 문이 푸쉭- 하는 공기소리를 내며 닫혔다. 버스는 무감정한 기계음을 내며 멀어져 갔고, 세연은 한동안 그 버스를 바라보다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씨발... 씨발...”

어울리지 않는 말을 어울리지 않는 어조로 중얼거리며 세연은 잠시간 그곳에 서 있었다. 움직임이 괴로웠다. 마음의 괴로웠다.

버스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며 은결은 좌석에 앉아 있었다. 아직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녀가 아예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상관없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연애조차,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은결의 인생 거반은 그러한, 자신과 전혀 다른 범주에 사는 사람들을 상대하기 위한 가면을 쓰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은결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고, 그래서 도리어 함께 하기 힘들었다. 그 필연적인 범주의 차이를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했으니까. 전혀 다른 범주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범주의 차이를 뛰어넘어서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 은결은 그런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불모함 마저 느낀다. 과거에 괴롭힘을 당했던 때 이후로, 은결은 그러한 노력을 방기했었다.

“후-”

다시 한 번 한숨을 길게 내어쉬고, 은결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번 주 아버지의 사설이었다. 이미 읽었던 글이지만 그는 복잡한 마음을 쓸어내고자 그 종이를 펼쳐, 다시 한 번 그 글을 읽었다.

-1997년 한국정부의 구제금융 신청은 전 세계에 충격을 준다. 동남아시아 쪽에서의 금융위기가 있긴 했지만 그 여파가 한국에까지 미치리라 생각했던 이들은 거의 없었다. 흔히 IMF사태라 불리는 이 금융위기는 실제로 전후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위기였다. 여기에 비교할만한 경제적 사건은 전쟁 이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태에 대한 통속적인 분석은 관료 집단의 무능과 부패가 재벌이란 비효율적인 자본집단과 엮이며 일어난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지만 이 분석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은 당시의 재벌은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것 만큼 무능하지 않았고, 그들과 정부 사이의 유착도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이루어져 있던 것은 아니었다. 흔히 이러한 정경유착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대마불사의 논리, 즉 큰 기업은 그 영향력으로 인해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 억지로 지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만 지난 기업 순위를 살필 때 한국 재벌 기업들의 순위변동과 탄생, 소멸은 그렇게 고착적이지 않고 유동적이었다. 오히려 고착적이 된 것은 IMF이후로 보는 것이 옳다.

또한 당시 기업들의 순이익이 매출에 비할 때 적었다는 것이 그들의 비효율성의 증거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순이익이 적었던 것은 많은 부분 이자를 갚기 위한 것이었고, 그 이자는 다시 당시 한국의 많은 저축자들에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소비자와 노동자와 기업 사이의 일종의 선순환적 구조가 이루어져 있었다. 도리어 현 포스코의 경우처럼 순이익이 높더라도 그 이익의 대부분이 배당금이란 형식을 통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국가나 시민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는 문제시 되어야 할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과잉투자에 대한 지적이 있다. 당시에 과잉 투자라 불릴만한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한국 기업이 직면한 상황을 생각할 때 그것은 무능이나 비효율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세계시장을 무대로 활동하기 위해 한국 기업은 공격적인 시장 개척과 한국 시장 수비에 동시에 나설 필요가 있었고, 그들 작업은 대자본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과잉투자는 여기서 발생했다. 때문에 이는 단지 실패한 투자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의 위기는 어떻게 해서 발생했는가? 이는 단적으로 말해 ‘이행실패’였다. 박정희의 죽음 이후 한국 자본은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게 시장활동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하게 되는데, 수십년의 과정을 걸쳐 이에 국가가 동조해 나서며 시장 활동을 자유주의적으로 풀어주는 방향으로 시책이 짜여지게 된다. IMF는 이러한 국가 주도의 경제활동에서 기업 중심의 경제활동으로의 이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때문에 벌어진 사태였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금융 자유화와 그 운영의 부실함이었다. 결국, 여기서의 ‘이행실패’란 ‘발전국가’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이 실패한 과정을 통한 것이었음을 말한다...

다 읽은 다음 은결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머리를 창가에 댔다. 버스의 진동이 머리를 통해 전신으로 전해졌다.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다. 이 이행실패를 통해 한국에서는 ‘변신시대’가 열렸다. 수단으로서 자신을 팔 수 없게 된 무수한 사람들의 좌절과 공포... 그리고-

은결은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스쳐지나가는 건물들 사이로 밤하늘이 보였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별은 보이지 않았다. 달만이 혼탁한 하늘에 떠서 빛을 뿌린다.

“내 머리위의 별이 반짝이는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율...”

은결은 쓸쓸하게 중얼거린다. 칸트의 말이다. 그는 그것들만이 정말로 경이롭다고 말했다. 은결은 그 말이 별이 반짝이는 물자체의 세계와 의무로서의 윤리를 숭고로 엮어, 실천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위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욕망으로 충만한 도시 위에서 별은 더 이상 빛나지 않는다. 은결은 생각한다. 그렇다면 별이 빛나지 않는 도시의 하늘 아래, 이제 도덕율 역시 꺼지게 되지 않을까? 라고. 욕망만이 진정한 정의를 이룬다는 인비지블 핸드의 전능함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사회에서,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후...”

은결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역시 칸트 따위는 모르는 쪽이 좋았던 것 같다. 이미 모든 타자가 수단으로서의 타자로 존립함으로서 성립되는 이 사회에서, 의무로서의 도덕을 말하는 그의 이야기는 낡아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만이 위대한 사회에서, 자본의 증식에 기여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타자만이 위대했고, 자본의 증식에 도움이 될 수 없는 목적으로서의 타자는 저열할 뿐이니까. 수단이 될 수 없는 타자는 그 사람처럼 한 마리 벌레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칸트를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저리다.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그의 주장은 언제나 가슴 깊은 곳을 울린다. 은결이 생각하기에, 목적으로서의 타자를 실현할 수 없다면, 손을 가지고, 이성을 가졌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겨진 때문이다. 욕망을 실천함으로서 균형을 이루는 것은 굳이 손이나 이성이 없어도 이미 많은 생물들이 해오고 있던 일이니까. 그렇기에, 칸트를 몰랐더라면, 이러한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조금은 덜 괴로웠을 지도 모른다고, 은결은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은 오늘 세연에게 어떤 일을 했던가?

“---”

은결은 거기서 마음을 접었다.

*문피아에 문제가 생겨 오늘 올립니다.

*이번 챕터를 통해 사설과 이야기의 관계는 명확해 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이 글 쓰면서 제일 힘든 부분이 사설인데, 가장 인기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는 게 안습. 저거 쓰는거 상당히 힘듭니다. 무엇보다 A4한 장 분량에 이야기를 다 담아야 한다는 게 많이 괴롭죠. A4 한 장에 담길 내용이 아닌데, 더 길게 하기도 그렇고... ㄷㄷㄷ

*지난 화에 너무 길어지는걸 피하다 보니 지칭 대상이 명확해 지지 않았습니다. 하이 로드 전략은 중소기업이 사용하긴 힘들고, 어느 정도의 대자본 기업에게 유효합니다. 도요타 같은 경우가 그렇죠. 로우 로드 전략 사용하다 좌절당한(당하고 있는)기업은 소니가 있겠습니다. 품질하면 소니라던 등식은 다 옛날 말이죠. 배터리 폭죽 사건이라던가. 도요타도 지난 기사를 보니 외국 공장에서 만들었던 차를 20만대 리콜 했다고 합니다. 이런 기업들에게 있어 숙련공의 위치를 무시하기 힘들죠. 그리고 한국에서는 특히 하이 로드 전략이 의미 있습니다. 한국의 대기업은 대게 가족끼리 해먹는 재벌기업이고, 재벌의 특수함은 특정 국가에 의존함으로서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이익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이죠. 가령 적은 주식으로 기업을 지배하는 것은 그들 기업이 외국으로 옮겨가거나 하게 되면 힘들어 집니다. 한국에서 하이로드 전략의 사용할 시에 핵심은 재벌의 지배구조를 인정함으로서 그들에게서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이 로드 전략은 꽤 정치적인 제안이기도 합니다. 재벌이 하이로드 전략을 사용하게 되면 다른 중소기업에도 어느 정도 파급되리라 생각합니다. 중소기업이 먼저 사용하긴 아무래도 힘들겠고. 그리고 하이로드 전략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기 힘들겠죠. 그것도 좀 문제. 하여간 나중에 이 부분도 좀 손봐야 하겠군요.

*개인 출판은 적어도 완결 후에 생각해 볼 문제라고 봅니다. 음음.

*그럼 이만...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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