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희망을 위한 찬가 - 변신시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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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은결은 가방을 챙기고 민성을 포함한 동물원 삼총사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유유자적 하고 있었다. 곧 뒷문에서 “오빠!”하는 발랄한 목소리가 들이닥쳤다. 이제 이 반의 학생들이라면 다소는 익숙해 졌을 미래의 행차다.
“아아.”
은결은 반가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래가 고무공이 튀어오르는 것처럼 활달한 걸음으로 그 곁으로 다가왔다. 곧 그녀는 은결의 오른 팔을 잡아채며 애교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배고파. 집에 가면 돈까스 해줘.”
“돈까스? 오늘 야참도 먹겠다고 나보고 빨리 돌아오라고 하면서 점심도 그렇게 거창하게 차려 먹으려고?”
미래의 요구사항에 은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는 어조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으라고 말하는 것 처럼. 미래는 냉큼 답했다.
“음, 그건 그거도 이건 이거지. 그리고 미래는 성장기라서 이 정도는 금세 소화돼! 설마 동생도 놔두고 약속 있다고 놀러가겠다는 사람이 그 정도도 못해주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아, 예. 알겠습니다.”
은결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조아리는 모양을 취해 보였다. 미래가 만족한 듯, 후훗 하며 “그래야지.”라고 말했다. 그 대화를 듣고 민성과 동물원 삼총사가 계절에 맞지 않게 굳었다. 은결의 약속 상대가 동생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때문이다. 그들은 당연히 미래일 것이라 생각하고 아침부터 은결을 놀려먹고 있었다. 은결은 가벼운 웃음을 그들에게 되돌려 보였다. 속이 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더해서, 은결은 자신의 옆에서 나른하게 창가를 바라보고 있던 쿠로사카의 입가에서 마치 이를 가는 듯한 ‘으득’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쿠로사카가 쓸데없이 이 따위를 갈리는 없다고 확신하고,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인식이 얼마나 가소로운 한계 가운데 있는 것인지, 은결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인식은 틀리는 경우 보다 맞는 쪽이 훨씬 더 많다.
토요일 오후의 시내는 바쁘게 붐비고 있었다. 무수한 인파의 가운데서, 복잡하고 완곡한 선을 그리는 조형물의 곁에 선 은결은 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결이 약속시간보다 십여분 정도 일찍 도착한 상태였다. 그의 나른한 눈길이 안으로 많은 이들이 들어섰다가 멀어졌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위로 아래로 움직이는 무수한 사람들. 은결은 그런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언제나처럼 상상력의 한계를 느꼈다.
그 상상력의 한계에서, 그는 이번에 싸웠던 사념의 원주인을 생각했다. 그는 결코 추상적인 개인이 아니었다. 그는 구체적인 한 사람이었다. 그의 기쁨, 그의 고통, 그의 슬픔, 그의 행위, 그의 위선, 그의 악의, 그의 실패, 그의 선의, 그의 인내. 그것들은 ‘한 사람’이라는 추상성 가운데 집어넣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그의 사념과 싸우고, 마침내 해체한다는 참혹한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그’라는 한 사람에 대해 은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부족한 상상력으로, 그러한 공백들을 메우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 상상력의 필연적인 한계, 혹은 부족에서, 은결은 말하기 어려운 어떤 서글픔을 느낀다.
“흠...”
은결은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씻어 내리듯이 문질렀다. 피로한 마음을 물리적으로 씻어내는 행위였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 사이로 작고 성급한 걸음을 걷는, 눈에 띄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지나가던 남자들은 드물지 않게 그녀의 모습을 돌아보곤 했다. 세연이었다.
“아, 기다리고 계셨어요? 죄송해요.”
작게 숨결을 흩트리며 세연이 말했다. 평소에도 아름다웠던 그녀는 가벼운 화장과 세련된 옷차림으로 한층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별 다른 준비 없이 무난하게 입고 나왔던 은결은 자신이 무성의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함을 느꼈다. 다행이라면 그나마 옷걸이가 부족하지 않다는 정도일까.
“방금 전에 도착했을 뿐입니다. 세연양이 늦으신 것도 아니고, 사과할 이유는 없겠지요.”
은결은 싱긋 웃으며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세연은 그 웃음을 보고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은결과 눈을 마주치기 어렵다고 여겼다. 심장이 벌써 두근두근 뛰었다. 곧 세연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 저기, 그럼 같이 영화 보러... 가실까요?”
“그러지요.”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길을 걸었다. 한동안 인파를 헤치고, 잘 이어지지 않는 대화를 어떻게든 억지로 이어가며, 상당한 시간을 걸어 두 사람은 화려한 간판이 늘어선 극장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매표소 앞에 줄을 서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표는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에 시간에 맞춰 들어가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들이 보고자 하는 영화의 매표소 앞에서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기도 했다. 약속시간이 영화 시작 시간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던지라 두 사람은 곧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는 두 시간을 약간 넘기는 약간 긴 것이었다. 미묘한 상징이 많은, 조금 불친절한 영화였다. 그 상징을 일관된 방식으로 읽어내어 서사의 외연과 내연을 통합해 이해할 수 있는 관객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은결이 이 영화표가 단순히 ‘남은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다 끝나고 나왔을 때, 주변은 이미 어두웠다. 혼탁한 도심의 여름 바람을 맞이하며, 세연이 은결에게 물었다. 불안한 목소리였다.
“어떠셨어요?”
“저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보기엔 어울리지 않는 영화군요.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몇 번 정도 되돌려볼 필요가 있는 구조의 영화였으니까요.”
“그런가요. 저는 그냥 잘 모르겠던데.”
은결의 긍정적인 답변에 세연은 수줍게, 그렇지만 기쁘게 말했다. 은결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영화를 보면서 했던 자신의 생각을 굳혔다. 그녀는 은결의 취향에 맞춰주고자 한 것이다. 은결은 조금 가슴이 아팠다. 그는 그 쓰림이 전이 된 것 같은 부드러운 눈길로 세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해도 졌겠다, 어디 식사라도 하러 가실까요?”
“예! 아, 제가 이 근처에 자주 가는 곳이 있거든요.”
“기대하겠습니다.”
은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세연은 발랄한 인상으로 앞을 걸었다. 휘황한 빛을 내뿜는 가게가 걸음마다 이어졌다. 그 사이를 걸어가는 사람들도. 그들의 표정은 대게 즐거워 보였다. 주말의 저녁을 즐기러 나온 사람이 대다수인 것 처럼 보였다. 얼마쯤 걸어 두 사람은 한 패밀리 레스토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예요.”
두 사람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이 그들을 맞았다. 안은 이미 많은 이들로 붐비고 있었다. 주로 연인으로 보이는 이성 커플이 손님이었다. 은결의 얼굴이 붉어졌고, 이미 알고 있었을 세연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붉어졌다. 그녀는 쑥스러움을 무마하듯 과장되게 웃는 모습으로 은결을 이끌고 좌석에 앉았다. 곧 메뉴판이 두 사람 앞으로 배달되었고, 그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것을 시켰다. 그리고 시간의 공백이 생겼다. 세연이 이제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하고 우물쭈물하는 가운데 은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그 표 남은 게 아니라 저 때문에 일부러 준비하신 거 아닌가요?”
“에! 어, 어떻게...”
발갛던 얼굴을 한층 붉게 물들이며, 그녀는 메뉴판에 얼굴을 숨겼다. 은결은 쓰게 웃으며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찔러본 말인데, 역시 그랬나요. 아무래도 그런 영화를 대학에서 본다면 표를 구입하기보다 필름을 아예 대학 안으로 돌이는 쪽이 보통일테니까요. 또, 영화 자체의 성격이 제가 알고 있는 정보가 옳다면 세연양의 오빠가 운영하고 있는 동아리의 성격과 좀 차이가 심하기도 하고 말이죠.”
“......”
세연이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잘 차려진 음식이 나왔다. 그제서야 겨우 메뉴판을 거두고 세연은 식사를 시작했다. 그녀는 얼굴을 푹 숙여 은결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면서 서둘러 포크와 칼을 사용하는 세연의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은결은 갑작스럽게 물었다.
“...한길에서는 IMF사태 때도 직원들을 해고한 적이 없지요?”
“에, 예.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제가 아는 바로는 한길이 노동자에 대한 전략은 기본적으로 로우 로드 전략, 그러니까 적은 임금으로 노동자를 사용해 이득을 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이 로드 전략, 노동자 개인의 숙련도를 높임으로서 상품의 품질 우위를 취득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길에서는 구제금융 신청 때도 노동자를 해고하지 않았지요. 저는 그것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길제약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 그런가요. 저는 그런 걸 잘 몰라서... 오빠라면 잘 알겠지만...에헤헤.”
영문을 알 수 없는 화제에 잠깐 당혹했던 세연은 그것이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대주주로 있는 회사에 대한 칭찬으로 이어지자 기뻐하며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보석 가운데 부서진 빛살처럼 고왔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더했다.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겠지요. 주류언론에서는 잘 이야기 하지 않고, 이야기 하더라도 관심을 가진 이가 아니면 그냥 넘어가기 십상이니까요. 하지만 사실 장기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이러한 하이 로드 전략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노동력의 가격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로우 로드 전략은 이미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광대한 인력시장이 대기하고 있음으로서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노동자의 숙련도를 높여, 자사의 제품을 일종의 ‘명품’으로 만들어 내는 그러한 하이 로드 전략이 미래를 두고 볼 때 현명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이 로드 전략을 위해서는 노동자 개인의 생활이 가능한 기반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공부나 노력이란 사실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니까요. 또한 그러한 여유의 문제가 대부분 노동자에게 성취될 때, 현재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내수시장의 문제도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노동자에게 돈이 돌아갈 테고, 노동자는 대부분 국내의 상품을 소비합니다.
이런 점에서 수출과 내수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채 420조에 달하는 돈이 투자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처참합니다. 그것들은 아마 과거 우리나라를 몰락시켰던 국제투기단의 돈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의 금융시장을, 요컨대 주식시장을, 일초의 승부를 위해 투입될 것입니다. 어쩌면 부동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것들은 아무런 일자리도 낳지 않습니다. 심지어 투자국가의 발전을 방해하고, 저하시키고자도 합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디지털 기호의 운반만으로도, 경제는 ‘발전’한다고 기록됩니다. 자본이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
은결의 이야기는 어렵고 복잡했다. 세연은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무언가 대답을 해서, 그래서 은결에게 바보 같은 여자라고 여겨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무어라고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우물쭈물하며 세연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먼저 은결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생각 밖에 하지 못합니다. 저는 제가 보고 듣는 거의 모든 것에서 이런 종류의 생각들밖에 이끌어 내지 못하는, 지독하게 지루하고 재미없는 녀석입니다. 유쾌한 농담이나, 재치는, 제게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그런 건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걸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제게 맞추시려고 한다면, 그러니 앞으로 많이 피곤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척 재미없는 녀석이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세연양이 일부러 피로한 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미안합니다.”
“......”
세연은 침묵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은결은 포크와 나이프로 고기를 썰고, 입으로 가져가 그것을 씹어 삼켰다. 사람을 상처 입히고 먹는 음식은, 역시나 지독하게 맛이 없었다. 그렇지만 은결이 생각하기에, 이것이 최선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주변은 기쁘고 소란스럽기에 한층 강조되는 고통스런 침묵이었다.
*이런 벼락 맞아 죽을 새퀴!(복선?)
*양자터널효과는 무한속도가 아니라 존재가 확률적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양자의 상태결정이 특수상대성이론에 위배되는 것을 무한속도라 본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지...저로선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말이 그것을 설명하는 유명한 예시입니다. 이 이상 깊이가면 수학을 통해 양자역학을 설명할 수 없는 저로서는 감히 논할 영역이 아닙니다.
*참고로 그렉 이건의 쿼런틴이라는 소설이 이 양자역학의 특성을 사용한 무척 대담하고 매력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추천.(이야기 자체는 좀 재미없습니다. 전부 번역된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쿼런틴을 읽고 양자역학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시면 매우 곤란. 어느 정도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 그래서 이 글이 불친절하다고 질책하시는 분에게 권해드리고 싶은 소설이기도 합니다.(...어이;)
*미시차원에서 양자터널효과는 드물지 않다고 합니다. 체크 감사. 그리고 알아본 결과 아무래도 원숭이가 셰익스피어 쳐낼 확률이 더 낮을 것 같습니다. 은결이 양자터널을 해낼 결과는 170억년간 1초에 한 번씩 벽에다 박치기 하면 한번은 가능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원숭이가 셰익스피어 쳐낼 확률은 낮게 잡아도 1/30^10만(...)이죠.
*인기투표 발표는 이 챕터 끝나면 할 겝니다.
*그럭저럭 코피 쏟기는 피하고 이렇게 적어 올립니다. 아, 죽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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