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희망을 위한 찬가 - 변신시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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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시간의 일이다. 평소처럼 은결은 책을 한권 들고 그늘 아래 앉아 활자중독자처럼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확실성에 대하여’다. 어렵고 엄정한 책이다. 그렇게 독서 삼매경을 보내고 있는 은결에게 쿠로사카가 다가왔다.
노출도는 높지 않지만, 선명한 몸의 굴곡이 드러나는 여름용 체육복은 그녀의 프로포션을 한층 강조하고 있었다. 운동장이 보이는 교실 창가에 앉은 남학생들은 선망의 시선으로 구경하곤 하는 성천 고등학교의 명물(?)이다. 미래도 미모에선 지지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쿠로사카와 그녀 사이엔 극지의 크레바스 같은 발육의 격차가 있어서 종합평가에서는 밀리는 편이다.
“요리 하는 방법 알려 줘.”
하여간 그렇게 찾아온 쿠로사카가 은결에게 말했다. 진지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한 순간 은결은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읽던 책을 덥고 3초 정도 생각을 정리한 다음 천천히 질문을 되돌렸다.
“하고 싶은 요리가 뭔데?”
은결의 침착한 반문에 쿠로사카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음, ...ㄱ”
되게 작은 목소리였다. 은결은 다시 물었다.
“안 들리는데?”
“음. ...죽...”
쿠로사카는 얼굴을 붉힌 채 다시 말했다. 마찬가지로 말끝이 겨우겨우 이어지는 작은 소리였다. 은결은 쿡쿡대며 웃다가 그녀를 놀릴 요량으로 “다시 말해봐, 안 들리-”라고 했다가 자신을 내려보는 쿠로사카의 삼엄한 시선에 입을 닫았다.
“큼. 알았어. 알려줄게. 닭죽 만드는 거야 뭐.”
은결이 대답했다. 쿠로사카는 만족한 듯 그의 옆에 앉으며 미리 준비해둔 수첩과 펜을 꺼냈다. 은결은 가벼운 흥미를 느끼며 그녀에게 닭죽 만드는 방법을 천천히, 상세하게 전달했다. 쿠로사카는 성실하게 그 방법을 적었다. 그 모습이 꽤 잘 어울려서,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서 농구를 하고 있던 민성은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리고 주의할 점은, 그렇게 만들어서 먹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뒷정리를 깨끗이 하라는 거야. 너는 집에 냉장고도 없으니까 이거 잘못 하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만드는 법을 모두 설명한 은결은 엄숙한 얼굴로 쿠로사카에게 충고했다.
“왜?”
“그야 냉장고도 없는 집에 음식 찌꺼기를 남겨두면 크고 검은 것들이...”
은결은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쿠로사카의 안색도 심각해 졌다. 바퀴벌레 형태의 사념체와 조우한 이후 두 사람은 바퀴에 대해 좀 과민한 반응을 보이게 됐다. 사념체를 통해 바퀴의 생김새를 너무 자세하게 알아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일전 은결이 다리털 수 까지 알 정도였다면, 지금은 그 다리털의 형태까지 알게 됐으니까.
“유의하지.”
“그러는 게 좋아. 그런데 갑자기 웬 요리야?”
“어제 말한 그 아이한테 가끔 식사나 대접해 줄까 하고. 말로 그 아이에게 아무 것도 설명해 줄 수 없다면, 친하게 지내주기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말야. 어쩌면 내 얼굴을 보고 그런 생각을 안 하게 될 지도 모르지 않겠어?”
“헤- 굉장하다! 내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 재깍 달려가서 도와줄게.”
은결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거의 존경의 염을 담은 것 같은 시선이었다. 쿠로사카가 되려 부담스러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쿠로사카는 어흠, 하고 낮게 기침을 한 다음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 그러지. 그런데 너는 집안일 하는 거 좋아하나보지? 요리도 이것저것 잘 알고, 집안 청소 이런 것도 여러 가지로 자세하고...”
“아- 뭐, 따지자면 좋아하지. 우선, 무엇보다 가족들을 위한 거잖아.”
창피하게 귀밑을 긁던 은결은 헤죽이 웃으며 쿠로사카에게 답했다. 드물게 보여주는 맑은 웃음이었다. 그건 무척 매력적이어서, 쿠로사카의 심장이 작게 두근, 뛰었다. 은결은 여전히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나는 가사 일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드물게 남아있는 대자적 노동, 그러니까 자기완결적 노동이라고 보거든.”
“자기완결적 노동?”
“그러니까 소외됨 없는 노동이라는 거야. 보통 현대 사회에서의 노동은 소외된 노동이잖아. 노동의 결과물은 임금으로 노동자에게 지급될 뿐, 노동의 결과물 자체가 노동자와 연관을 맺는 경우는 그다지 없어. 제조업이든 사무일이든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지. 그래서 대부분의 노동은 자기실현이기 보다 자기 억제의 형태를 띄게 되지.”
“흐응.”
“그렇지만 나는 모든 노동은 피그말리온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피그말리온은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 자신의 반려를, 가장 완벽한, 이상적인 타자를 만들어내지. 그건 자기완결적 노동이야. 노동의 본질은 실제로 그러한 거고. 인간은 세계를 대상으로 자신을 ‘노동’이란 수단으로 투사하고, 그 실현된 결과물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돌이켜 보는 거야. 즉자가 대자로 전환하는 거지.”
그리스 신화 가운데 나오는 피그말리온은 볼품없는 외모의 조각가다. 그는 조각을 통해 아름다운 여성의 상을 만들어 내는데, 그는 그만 그 조각상의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매일 밤 신에게 자신이 조각한 여성에게 생명을 깃들여 주길 기도하고, 신은 마침내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피그말리온의 반려가 되도록 한다. 완벽한 자기충족적 노동의 신화적 양태. 여기서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노동과 가장 아름다운 대자적 결합을 이룬다.
“이것은 인간을 인간이도록 하는 가장 소중한 작업이기도 해. 왜냐하면 이러한 노동의 과정을 통해 개인은 스스로의 모습을 진정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니까. 이것이 충실히 이루어질 때, 사람은 외부에 대고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필요가 없게 되지. 노동을 통해 가장 완벽한 타자를 얻을 수 있으니까 굳이 다른 타자에 기대지 않아도 좋게 되는 거야. 그때 인간은 자존할 수 있지.”
은결은 말을 잇는다. 정체성은 쌍무적이다. 그것은 ‘너는 누구다.’ 라는 외부의 규정과 ‘나는 누구다.’ 라는 내부의 규정으로 이루어진다. 노동은 그 양 측면에서 대답을 얻게 하는 행위다. 개인은 노동을 통해 사회 가운데 자신의 위치를 얻게 된다. 그러나 노동이 무엇보다 스스로를 돌이켜 보게 하는 행위라는 것은, 그 노동에서 소외되지 않을수록 ‘나는 누구다.’라는 자기규정을 확고히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나는 누구다.’ 라는 자기규정을 확고히 가지고 또한 실천하는 것이 다름 아닌 자기실현이다.
그러나 노동에서 소외되고, 그래서 노동이 고통스럽게 된다면, 자아는 자기에 대한 규정을 외부에 기대게 된다. 그는 스스로를 규정할, 세계에 실현된 자기 노동의 결과물의 모습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모든 다른 타자를 지배하고자, 주인이 되고자 달려들게 된다. 모든 자아는 본디 그러한 성향을 가지지만, 그것이 한층 심화된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노동의 물화된 양태인 돈, 명예, 지위 등에 집착게 된다. 그것만이 노동의 실현이다. 그래서 타자에게 주인으로 섬김 받기 위해. 그리하여 그 섬김의 노예가 되고 말도록.
“그런 의미에서, 내가 열심히 청소하면 집이며 옷이 깨끗해지고, 내가 열심히 만들면 가족들이 기뻐하며 음식을 먹는 광경을 볼 수 있는 가사노동은, 자본이 채 포섭하지 못한 자기 완결적 노동의 가장 일상적인 실례가 아니겠어? 여기에는 소외가 없지. 그래서 나는 집안일 하는 걸 꽤 좋아해.”
은결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쿠로사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결의 표정이 행복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과 더불어 그녀는 일전 은결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주인을 넘어, 노예를 넘어, 그 모든 타자를 넘어, 자신의 자유로 타자의 자유를 성립시키는, 이라던 그 아름다운 이야기.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쿠로사카가 은결의 생각을 끊고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차라리 예술이군.”
“그래. 나는 모든 노동은 예술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은 소외된 노동마저도 사라지고 있지. 제레미 리프킨의 책 제목처럼, ‘노동의 종말’이 다가왔다 싶을 정도인걸. 당당한 ‘나는 누구다.’ 라는 자기규정은커녕 소심한 ‘너는 누구다’라는 규정도 얻을 수 없어. 하지만... 스스로에게도, 사회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자아의 갈 곳이란 어떤 것일까?”
은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 말을 하며 은결은 한 마리 벌레를 상상했다. 절망의 키틴질로 자신을 감싸는 벌레 같은 인간.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그 속에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자본은 노동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에 대한 욕망은 무한하다. 한데 시장은 노동과 임금의 교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때문에 자본주의는 내부에 폭탄을 품게 된다. 과거, 1929년에 검은 목요일이란 사건을 통해 그 폭탄은 마침내 장대하게 터졌다.
노동은 이미 자본에 포섭되어 있었고, 모든 노동은 갈 곳이 없었다. 뿌리 잃은, 그래서 타자에 의해서도 규정 될 수 없었던 노동은 스스로 스스로를 규정 할 수도 없었고, 고통 받는 모든 노동은 ‘국가’와 ‘민족’이란 환상의 공통체를 향해 열광하며 돌진했다. 독일에서, 일본에서, 스페인에서, 이탈리아에서. 갈 곳 잃은 노동은 파시즘이란 찬연한 이름으로 피어났다. 이어지는 이질자의 배제.
“...잘 들었어. 그런데 네가 말한 자기충족적 노동을 실현했다고 했을 때, 그것이 현실에 드러나는 모습은 오타쿠와 뭐가 다르지?”
그리고 쿠로사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오타쿠(お宅)’는 일본어로 댁, 그러니까 집이란 뜻이다. 그것이 특정한 계층의 인간을 뜻하게 된 것은 집이라는 원뜻에서 손쉽게 추리할 수 있는 바 대로, 자신의 취미에 열중해서 도무지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은결의 말문이 막혔다. 은결이 규정한 대로라면 그들은 가장 완벽한 ‘자기실현’을 하고 있는 이들이다.
“큼...”
“......”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침묵이 싸늘하게 흘렀다.
“나, 나는 오타쿠 역시 인정받아야 할 삶의 한 양식이라고 생각해.”
은결은 어렵사리 답했다. 그 대답을 듣고, 쿠로사카는 뭔가 납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 황폐한 기분입니다. 서브라임 연재 이후 너무 글을 많이 쓴 것 같습니다. 좀 쉬고 싶네요. 하나를 한동안 쉬든가 해야지, 마감에 쫒기는 만화가도 아니고 이건 뭐...
*앞으로도 읽어야할 텍스트의 양, 그리고 그것들의 난이도를 생각하면 외로움 같은 거 느끼기 힘들죠. 죽을 때가지 읽어도 반의반도 못 읽을 것을. 하하하.(...)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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