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희망을 위한 찬가 - 변신시대(10)
#
도심의 불빛이 휘황하게 일구어내는 먼지구름 같은 빛의 대기 위에서 달은 혼탁하게 떠 있다. 은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건물의 옥상에 내려섰다. 먼저 와 있던 쿠로사카는 달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늘 점심, 학교에서 보여줬던 것과 같은 표정이다. 그녀는 그것을 ‘쓸데없는 고민’이라 말했지만, 그녀는 쓸데없음에 이렇게 고착할 성격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은결은 한동안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점심 때 처럼 면박이나 당하지 않을까 싶었던 때문이다. 그는 그저 근처에 걸터앉아 도심을 바라봤다.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결국 침묵이 견디기 어려웠던 은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무슨 생각해? 오늘 점심 때도 그렇고..."
쿠로사카는 달에서 시선을 거두어 서늘한 눈동자로 은결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은 물결처럼 일렁이다 고정되었다. 그 시선을 받으며 은결은 약한 안도감을 느꼈다. 갈등이 결의로 이어지는 모양새였다. 점심 때 처럼 면박받을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이번은 그렇지 않을 모양이었다.
“너, 그 아이 기억해?"
"그 아이?"
"내가 지내는 아파트 근처에서 알게 됐던 그 아이 말야.”
“아, 그 아이. 기억해. 무슨 일 있었어? 또 뭐 심하게 괴롭힘이라도 당했어?”
“실은-”
걱정어린 얼굴로 묻는 은결에게 쿠로사카는 간략하게 사정을 이야기 했다. 은결은 그제서야 오늘 종일 그녀가 보여줬던 우수에 찬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잠시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머물렀다. 쿠로사카는 입안이 텁텁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참기 어려워 은결에게 물었다.
“너라면 어떤 이야기를 해 주겠어?”
“글쎄... 모르겠어.”
은결은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결국 힘없이 말했다. 쿠로사카는 실망한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도심의 빛이 달빛과 어울리며 그녀의 옆얼굴을 비추는 모양이 희슴푸레하게 아름답다.
“유감이군. 너라면 무언가 한 마디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음 미안.”
“네 탓인 것도 아닌데 미안할 것까지야 없겠지. 나는 단지, 그렇게 어린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런 방식으로 고착되어 버린다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여겼을 뿐이야. 그렇 것이 아니더라도, 세상을 비참하거나 슬프게 여길만한 것들을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쿠로사카는 자신이 은결을 죽이려고 했던 때를 떠올렸다. 가슴 한 구석이 아팠다. 그녀는 지금도 그때의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옳다, 그르다, 슬프다, 기쁘다를 떠나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슬프고 괴로운 일이다. 예전부터 세상이 필요로 하는 많은 것들은 결코 아름다운 것들이 아니었다. 그 슬픔에 공명하며 은결은 말했다.
“음... 쿠로사카, 이성이란 본래 전혀 이성적이지 않아. 그것은 차라리 맹목적이지. 무수한 사태 가운데 공통되는 특정한 현상들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 현상들을 맹목적으로 연결하려고 해. 혈액형에 대한 가소로운 미신, 출신 지역에 따른 어처구니없는 편견, 피부색에 따른 역겨운 차별, 성별에 따른 추잡한 배척.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있어.”
희미하게 웃으며 하는 은결의 말은 쓸쓸했다. 인간 인식은 원래 게슈탈트 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인식의 모델에 대한 추구. 그것이 정말 의미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판단된다는 것. 그래서 사람의 인식은 세상을 의미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누고, 의미 있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없는 것을 무시한다. 인식이란, 그래서 필연적으로 타자를 만들게 된다. 그는 말을 이었다.
“칸트가 글을 적던 시절부터 이성의 그런 비이성적 특성은 인식되어 있었지. 순수이성비판의 서문에 칸트는 이성의 그러한 성향을 지적해. 이성은 이성적이지 않게도 모든 사태를 자기 가운데 포섭하려고 한다고 말야. 결국,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칸트의 엄정한 저술은 이성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엄밀하게 말함으로서 진정한 이성 사용의 정초를 놓으려는 작업일 뿐이야. 사람이란 본디 그러한 것 같아.”
그러니 인간의 인식은 저열할 뿐이다. 라고, 은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연의 얼굴이 기억났다. 푸른 이빨과 세연에 대한 착각. 자기 역시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참기 힘든 어떤 토기가, 속에서 치밀 것만 같았다. 은결은 다시 말했다.
“그러니 그 아이가 보여주었던 것은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이지. 차별받는 자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을 리는 없는 거야. 어차피 사람이니까. 하물며 그 아이가 그러한 구분을 만들기 위해 정초했던 기준은 선명하고 강력해. ‘외국인은 어머니의 일자리를 뺏아 간다’는 것이지. 나는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설득할 자신이 없어.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이야기가 필요한걸. 그 아이는 설득되지 않을 거야. 현실은 진실보다 강하니까.”
현실은 진실보다 강하다. 보드리야르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이미지가 현실을 잡아먹는 논리에 대한 이야기. 그래서 현실이 되고마는 이야기. 그것은 인간 인식의 한계에 기초한 현실의 한계, 혹은 현실의 구성에 대한 이야기다. 루이비통을 사는 이들의 소비는 루이비통의 이미지이고, 벤츠 구매자의 소비는 벤츠의 이미지이다. 소비되는 것은 실체라기보다 아닌 의미이다. 그래서 진실한 것은 진실하다고 믿어지는 것 보다 못하다.
그래서 노동자의 적은 노동자를 질곡으로 몰아가는 자본의 구조가 아니다. 자기의 자리를 노리는 다른 노동자가 된다. 경쟁예찬. 실업예비군은 연대한 노동자의 발호를, 노동자의 연대를 막는 자본가의 가장 강력한 방패다. 은결은 그것을 슬프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슬픔의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방법을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반성이란 언제나 고되고 힘들잖아. 반성이란 당연했던 것들의 기초를 당연하지 않다고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니까. 그래서 반성하는 정신은 내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은 이들에서만 가능한 거야. 그리고 여유가 없는 이성은 고통 가운데 세상을 가장 강력하고 무의미한 기준으로 나누면서 타자를 내게 되지. 국가라던가, 민족이라던가, 신앙이라거나... 그런 것들 말야.”
눈살을 찌푸리며 쿠로사카가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은결은 서둘러 손을 들었다. 종교인을 앞에 두고 종교를 무의미하다고 단언하는 것 이상의 무례함은 찾기 힘든 법이다. 은결은 그런 뜻으로 종교를 부정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아, 여기서 말하는 ‘무의미’한 이란 수사적인 거야. 나도 월드컵 하면 언제나 한국을 응원하는걸. 그렇지만, 그것을 넘어가는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집착은 민족이나 국가라는 범주가 포섭하지 못하는 이들을 무가치한 자들로, 심지어는 적으로 만들잖아. 종교 역시 그런 성향을 대게 지니지. 나는 그런 걸 막아야 한다는 거야.”
그의 설명에 여전히 불편함이 남아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쿠로사카는 얼굴을 풀었다. 은결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아이가 외국인을 증오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마 알량한 몇 마디 말이라기보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술을 마시면서 울 필요가 없어지게 되는, 그러한 물적기반, 여유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면서 은결은 카프카의 ‘변신’을 다시금 떠올린다. 어느 날 갑자기 (바퀴!!)벌레가 된 그레고리 잠자. 그의 고통은 어떤 것이었을까. 은결은 그 지독한 소외를 제대로 상상하기 어려웠다. 단지, 그 무서움의 단편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신을 찾고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어지지 않을 그런 무력감.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타자에 대한 가장 맹렬한 증오는 거기서 탄생한다. 간수가 되어 죄인을 통제하듯, 선택받은 민족이 되어 더러운 인류의 쓰레기들을 청소하듯, 신의 사자가 되어 불신자들을 처단하듯.
“...어려운 이야기군.”
“그래. 어렵지.”
은결은 희미하게 웃었다. 쿠로사카는 그 희미한 웃음을 바라보며 혼돈을 느꼈다. 그녀는 은결의 인간에 대한 관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장 숭고한 경이와 가장 가열찬 경멸이 한 장소에서 억지로 뒤틀려 공존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은 사념체가 나오지 않았다.
자전거가 아침 바람을 가르며 콘크리트길을 달렸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자전거 뒤로 밀리며 멀어졌다. 자전거에 타고 있는 사람은 은결과 미래였다. 두 사람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로 가고 있는 길이었다.
“...오빠 물어볼게 있는데.”
바람을 느끼며 미래가 의혹어른 목소리로 물었다.
“응? 뭔데?”
“어제 누가 왔어?”
“아, 아니. 그런데 그건 왜?”
“집에 들어가니까 웬 향수 냄새 비슷한 게 나잖아. 누가 왔다 갔었나 하고.”
은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서둘러 변명했다.
“그, 그건 새로 나온 바퀴벌레 퇴치 약을 좀 뿌렸거든. 그 냄새일거야.”
“헤- 요즘 살충제는 그렇게 향기가 좋아? 어지간한 향수는 비교도 못 하겠던데. 방향제로 써도 되겠더라. 이름이 뭐야? 얘들한테 추천하게.”
미래가 감탄해서 물었다. 물론 그런 살충제가 있을 리가 없다. 은결은 위기감을 느끼며 머리를 팽팽 돌렸다. 다행히 금세 그럴듯한 변명이 마련됐다.
“그, 글쎄 나도 몰라. 그 진경이란 사람이 아버지한테 선물로 보낸 거거든. 신제품이라나봐. 시중에는 아직 안 판데.”
“그런가. 아쉽네.”
미래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은결은 집으로 돌아가면 어서 수행과 입을 맞춰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거짓말도 손발이 잘 맞아야 하는 법이니까. 계속 대화가 이쪽으로 가면 위험하다고 판단한 은결은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미래 너 집에서 군것질 같은 거 안 하지?”
“무, 물론이지!”
이번에는 미래가 간이 철렁 떨어지는 표정으로 답했다. 사실은 방에 꿍쳐둔 게 좀 있다. 성장기 소녀의 식욕은 다소 왕성한 법이다. 은결은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요 며칠 열심히 청소도 하고 약도 뿌렸는데 어제 또 한 마리 대물이 나와서 말야.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거야. 아니라면 문제없겠지. 역시 바퀴 근절을 위해서는 앞으로도 한동안 신경 써서 청소해야할 모양인 가봐.”
“그, 그러게나 말야.”
그렇게 남매는 시시한 잡담을 교환하며 학교로 향했다. 하지만 은결은 속으로 집 말고도 퇴치를 해야할 바퀴를 생각하며 이럭저럭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보신 분은 알겠지만 타이틀을 받았습니다. 가정법님께 감사의 마음을! 역시 못 먹으나마 감은 이리저리 쿡쿡 쑤셔보아야 하나 봅니다. 꼽사리 추천을 해 주신 블루윈드 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역장으로 바퀴를 가두는 것도 고려했었는데, 일단 역장에 가두기 무척 힘들고 그렇게 해도 안을 공격하기가 힘든데 바퀴의 꽁무니 탄이면 역장파괴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주로 내보내도 사념체는 생물이 아니라서 안 죽기 때문에 헤엄쳐서 돌아옵니다.
물론 역장에 가둬두고 그 동안 수행이 그 아래에 진을 그린 다음 신성을 일으키고, 그때 역장에서 풀어 죽이는 것도 방법이긴 한데 세연을 등장시키기 위해 그 방법은 탈락시켰습니다. 그 외에는 연출의 문제도 있고 이게 다음 챕터로 연결되는 부분도 있고 하여 카미를 사용하는 것으로 낙착! 사실 이게 가장 쉽고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하죠. 담보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만 빼면.
*성원해 주시는 분들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