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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105화 (105/300)

#   105-희망을 위한 찬가 - 변신시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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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기분이 좋은 것 같다?”

은결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바람을 느끼고 있는데, 등 뒤에서 미래가 물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볍게 콧노래라도 불렀던 걸까?

“응? 그래 보여?”

“응.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좋은 일이라... 딱히 좋은 일이랄 것 까지야 있을까 마는.”

은결은 웃음을 짙게 하며 말했다. 그는 오늘 점심 때 있었던 옥상에서의 간단한 유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뒷맛이 좀 쓴 일이 있긴 했지만 그것까지 포함해서, 은결은 오늘 점심때 쿠로사카와 있었던 일이 ‘즐겁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유쾌한 기분이 겉으로 흘러나온 듯 싶었다.

“헤, 뭔가 있긴 있었구나.”

미래는 여유를 가장한 목소리로 유도 심문 하듯 물었다. 그러나 그 여유 이면에는 어딘지 모를 긴장의 기색이 진폭이 낮은 주파수처럼 잉잉 거리며 도사리고 있었다. 은결은 별 생각 없이 답했다.

“아니 별거 아냐. 그냥 오랜만에 치트키 안 쓰고 스타크래프트 해 본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은결은 스스로의 비유가 우스워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꽤 적절한 비유 같았다. 은결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아주 옛날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과 자신 사이에는 정말로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마하의 속도를 넘어서고, 비행을 하고, 일격에 거대한 빌딩이라도 부술 수 있는 에너지를 다루는 자신의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그들과 같기를 기대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었다.

그럼으로, 은결에게 거의 대부분의 타자와의 교류는 허망한 겉모습일 뿐이었고, 유희 역시 예정된 승부일 뿐이었다. 상대편과 달리 치트키를 쓰고 게임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은결에게, 어떠한 유희도 진지한 것이 될 수 없었다. 기쁨 없는 승리. 분노 없는 패배. 그건 그냥, 그런 척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은결은 아무런 주저 없이 그렇게 어릴 때에 이미 타자를 포기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타자와의 교류가 승리와 패배로 나뉘지 않는다. 그러나 은결은 자신이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을 벗어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를 참오한, 가령 수행 같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주인과 노예의 질곡을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 질곡 가운데 허망한 교류를 하는 것은 그 질곡을 다시 강화하게 된다.

그렇지만, 쿠로사카와 하는 것이라면 달랐다. 그녀가 세상을 보는 범주는 은결과 그렇게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와의 교류는 치트키를 사용 불가능한 스타크래프트 플레이 같은 거였다. 오늘 사과와 역장으로 교환된 서로의 재주넘기가 그랬다. 은결은 그녀처럼 사과를 깎아낼 자신이 없었다. 반대로 쿠로사카는 자신처럼 역장을 다루고, 막대한 힘을 운용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능력이 닿지 않는 부분을 서로가 가지고 있다. 그 교류에는 미지가 있다. 허망하지 않았다. 그것이 실감되어서, 은결은 괜스레 기뻤다.

‘사실은... 이런 걸로 기뻐하고 하면 안 되는데...’

다 죽어가는 풍선의 마지막 한숨 같던 웃음에 쓴맛이 더해졌다. 교류는 타자를 만들고, 타자는 모델을 만들고, 모델은 인식을 방해한다. 혹은 모델이 타자를 만들고, 타자는 모델을 강화하고, 그 모델은 인식을 방해한다.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은결은 타자 없이는 주체로 서지 못하는 그 모든 것들을 참혹하게 여긴다. 거기서 그는 계몽의 패배를, 역사의 끝에 선 슈퍼맨의 슬픔을, 자유의 몰락을 느끼는 탓이다. 그런 생각 앞에서, 비록 따스하다 하나 이런 느낌은 다소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와.”

“뭐가 그렇게 놀라워?”

“오빠가 스타크래프트를 다 했구나 싶어서.”

“......”

아무리 왕따라곤 하지만 정말 그 긴 학창 생활을 다른 학우들과 대화 한 마디 안 하고 살아온 건 아니었다. 은결은 정말 그를 고립시킬 수 있는 폭력적인 수준의 왕따에 대해서는 주저없는 폭력으로 분쇄했다. 그래서 대게 은결에 대한 인식은 ‘재수 없다.’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별로 친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녀석들도 있었고, 반 전체가 움직이거나 할 때 꼽사리 껴서 가거나 했다. 무인도에서 살다 돌아온 게 아니다. 대한민국의 정규교육을 받으며 커뮤니케이션을 한 이상 스타크래프트를 안 하긴 힘든 일이다. 그래서 동생의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심한 좌절감을 맛보고 있는 은결에게, 미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누구한테 뺨이라도 맞았어? 왼쪽 뺨이 좀 빨간데...”

“아, 아니. 책상위에 엎어져 자다보니 좀.”

“흠... 그런 거 치곤 모양이 좀 이상한데. 사람 손 같아.”

“우, 우연이겠지.”

미래는 여러 방면에서 예리하지만, 이런 쓸데없는 데서는 이상하게 더 예리한 것 같다고 은결은 생각했다. 그나저나 줄곧 기를 운행시켰는데 아직까지 뺨의 손도장이 다 지워지지 않은 것을 보니 역시 쿠로사카의 일격은 강력했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 손바닥의 일격이 어떠한 위력을 품고 있었는지는 당시의 고통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지간한 사념체의 공격 따위는 여기 댈게 못 됐다. 탱크를 날려버렸을지 모른다고 하면 역시 과장이겠지만, 경차정도는 충분히 날려보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연 양도 그런 인식의 범주라는 측면에서 굳이 나 자신을 감출 필요가 없는 사람이긴 하구나.’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은결은 세연을 생각했다. 수줍은 미소와 어처구니없는 욕설이 뒤섞이는 청초한 소녀다. 신과 사람이 뒤섞인 그녀는 어쨌거나 지금 은결이 구해내고자 노력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 역시 은결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러하기에 굳이 무의미한 자신을 연출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은결은 다시 페달을 밟았다. 바람이 그를 맞았다.

쿠로사카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돌이켜볼 때, 오늘 점심 때 했던 일이 역시 너무 경박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키리야미는 신성한 검이다. 단순히 신성하다고 칭해지는 게 아니라 그 검이 품고 있는 힘은 저절로 사람을 무릎 꿇게 한다. 그런 검을 가지고 한갓 사과 깎기 묘기 따위에 사용했다는 것이 역시 껄그러웠다. 일본에 있을 때만 해도 그녀는 새벽에 깨어나 몸을 정갈히 하고 키리야미를 보살피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그게 지금은...

‘그래서 벌 받은 걸까...’

쿠로사카의 얼굴이 붉어졌다. 은결이 보답이랍시고 무중력을 경험하게 해 주는 과정에 겪었던 수치가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사념체에게 정신공격을 당하고 깨어났을 때 그녀는 속못 만 입고 있었고, 그러니 은결이 그녀의 속옷 차림을 보는 것은 처음일리는 없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은 그런 게 아닌 법이다. 더구나 그녀는 여전히 무녀다. 키리야미의 후계자 문제도 있고, 장래 결혼도 할 테니 연애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조신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으음... 그래도 좀 너무했나 싶긴 하지만...’

아직 은결의 뺨을 때린 손바닥이 저릿하게 아팠다. 철문이라도 한 방에 우그러뜨려 저 멀리로 날려버릴 일격이었다. 그걸 그대로 맞았으니 얼굴이 무사할 리가 없다. 퉁퉁 부어 있던 얼굴이 하교 때쯤에 그럭저럭 가라앉은 것만 해도 그의 능력이 대단한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일본에 있을 때 그녀의 일격을 그런 정도의 피해로 막아낸 상대는 또래 가운데 아무도 없었다.

그래. 또래 가운데 아무도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같은 세계에서 장래 활동해야할 또래 가운데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현명했고, 아름다웠고, 강했고, 빨랐다. 모두가 그녀를 우러러봤다. 그녀는 의식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의식하고 있었다. 자아는 하나가 아니고, 그럼으로 욕망도 통일될 수 없었다. 노예와 주인은 모든 행위의 이면에 존재하고 있었다.

불현듯, 그렇다면 은결은 그러한 균열과 욕망을 언제부터 의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 날 새벽 자신에게 해준 이야기대로라면, 그는 적어도 10여세 이전에 이미 그러한 인식을 ‘완성’해 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은결의 인생 대부분에 있어 타자와의 교류란 자신을 조종하는 실을 바라보며 그 실에 따라 움직이는 것과 같은 행위이지 않았을까?

“......”

은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슬펐다. 웃고 있을 때도, 어딘가 우울했다. 그것은 그의 본질 같은 것이었다. 그 우울함을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은결은 어떤 표정을 하고 살아오고 있을까?

‘사실은, 밝은 성격이지 않았을까?’

기대어린 눈망울로 사과를 내밀던 은결의 얼굴을 생각하며 쿠로사카는 생각했다. 그가 처한 환경이 지금과 같지 않았다면, 어쩌면 은결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보여주며 지었던 것 처럼 기쁜 웃음을 언제나 머금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소년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쿠로사카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조용히 가방을 내리고, 기수식을 취했다. 이 일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슬슬 본격적으로 시작할 모양이다. 집과 골목 사이로 다시 어릿한 그림자가 보였다. 무기질의 허공을 품고 있는 것 처럼 텅빈 그림자들이었다. 그 그림자들 가운데 몇 개가 덜그럭 소리를 내며 쿠로사카에게 다가왔다. 굳은 인간의 표정을 한 기괴한 존재들. 식신이나 고렘 같았다.

쿠로사카가 바닥을 박찼다. 콘크리트 도로가 쩍, 깨지며 쿠로사카의 모습이 사라졌다. 동시에, 빛이 한 순간 섬연하게 번뜩이고, 쿠로사카를 향해 다가오던 정체를 알기 어려운 사람 모양의 두 존재가 두 동강이 나서 쓰러졌다. 그들 앞으로 쿠로사카가 나타났다. 조각난 그것들은 꿈틀대며 계속 움직이고자 했다. 쿠로사카는 냉엄한 표정으로 다가가 그것의 머리를 밟았다. 퍽, 소리가 나며 그것의 머리가 박살났다. 상체가 조용해 졌다.

“좋군.”

쿠로사카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키리야미를 다시 부드럽게 세우며 그것들을 향해 내밀었다. 복잡한 심경을 키리야미의 날처럼 깨끗하게 처리하는 것은, 역시 이런 전투가 제격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고 나면 아직까지 떨리는 검격도 어느 정도는 진정되어 줄 것이다. 검격이 정리되고 나면... 그래. 은결과 다시 대련을 시작해 보고 싶었다.

*은결도 쿠로사카도 먼치킨이죠. 이 글을 쓰면서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도시가 배경이다 보니 애들이 마음껏 설치질 못한다는 겁니다. 이계로 보내고 싶다고 한 이유 중 하나도, 이계에선 결계 안 펼치고 싸워도 된다는 사실 때문이죠. 쩨쩨하게 콘크리트 부술까봐 전전긍긍 안 해도 되죠! 스펙터클 액션 활극이 가능해진달까. 아, 그래도 다음 챕터 정도에는 스펙터클 대전이 펼쳐질 예정입니다.

*먼치킨 러브♥

*성원해 주시는 분들게 감사드리며,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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