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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104화 (104/300)

#   104-희망을 위한 찬가 - 변신시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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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냐?”

민성이 은결에게 물었다. 은결이 민성의 시선을 좇아 뭘 가지고 그러는지 체크했다. 시선의 끝에는 그렇게 품질이 좋아보이지는 않았지만 불그스름하게 익은 사과 한 알이 있었다. 오늘 점심 디저트로 나온 과일이다.

“왜, 안 먹으면 너 주랴?”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지!”

“유감이지만 이걸로 할 게 좀 있어서 말야.”

민성의 기대를 싱긋 웃으며 짖밟은 은결은 마지막 한 숟갈을 떠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슬픈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민성을 향해 뻔뻔하게도 “뒷 정리 잘 부탁해.”라 말하고는 멀어졌다. 민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위 바위 보에서 졌기 때문이다.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참고로 은결은 정정당당하게 승부했다.

은결은 옥상에 올라갔다. 결계의 기운이 느껴졌다. 쿠로사카가 먼저 와 있는 모양이었다. 끼익- 철 소리를 들으며 그는 옥상 문을 열었다. 시야가 다채색으로 열리며 무겁게 가라앉은 대기 가운데 태양빛이 은결을 향해 강렬하게 내려쬐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쿠로사카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도 약간의 흔들림이 있는 것 같았지만 많이 나아져 있었다. 정리된 그녀의 폼세는 언제 봐도 감탄사가 인다. 완성된 검형이라고 할까. 그 이상이라면 형식의 완전성 문제가 아니라 아마도 형식의 자재함에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식(式)을 버리는 경지 말이다. 은결은 계속해서 쿠로사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한동안 검을 휘두르던 그녀는 은결이 제 할 일은 하지 않고 자기만 줄곧 쳐다보자 신경쓰였던지 검을 거두고 그에게 말했다.

“그냥, 역시 검을 잘 쓴다 싶어서.”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냐.”

쿠로사카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난번 쿠로사카가 그에게 보여줬던 기예를 기억한다. 한 동작으로 한 장의 종이를 세 장으로 바꾸어내는 믿기 힘든 수준의 기술적 섬세함. 거기에 비하면 그녀가 지금까지 보여준 완성된 폼세조차 아무 것도 아니다. 은결은 성큼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래서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부탁?”

은결은 환히 웃는 낮으로 쿠로사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그다지 잘 익지는 않은 사과 한 알이 들려 있었다. 오늘 은결이 급식 때 받았던 녀석이다.

“이게 왜?”

“키리야미로 사과 깎기 좀 해보지 않을래?”

“하아?”

“왜 있잖아, 만화 같은데 보면 사과를 공중에 띄웠다가, 손이 한 번 삭, 움직이고 나면 껍질도 다 깎이고, 살도 잘 갈려서 접시위에 올라앉는 기예! 그거 말야. 아, 나 한번 쯤 그런 거 보고 싶었거든!”

어처구니가 없었던 쿠로사카는 ‘사과 대신에 네 포를 떠주랴?’라고 응대 하려다가, 두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은결을 보자니, 일전의 빚도 있고 거절하기도 껄끄럽다고 생각해,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그 사과를 받았다.

“아, 사과 자를 때 말야, 껍질은 회오리 모양으로 자르고, 그런 다음 속살을 여덟 조각으로 부탁해! 그냥 사과 조각 낸 다음 껍질 자르는 건 너무 쉽잖아.”

쿠로사카가 사과를 받자 은결이 좋아라고 요청을 추가했다. 그리고 서커스를 처음 구경하는 어린이인양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쿠로사카쪽을 바라봤다. 아주 신이 났구나. 쿠로사카는 은결의 태도에 대해 그런 간단한 감상을 떠올리곤, 키리야미로 이런 짓을 하는 건 품위에 어긋난다고 찝찝하게 여기면서도 사과를 공중으로 던졌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무거운 대기 가운데서도 복잡한 대기의 운동이 강하게 이어졌다. 대기를 무겁게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거의 폭음에 가까운 소리가 났을 것이다. 그리고, 사라졌던 쿠로사카의 손이 다시 드러냈고, 그녀는 키리야미를 유려하게 휘수하며 허리춤의 검 집으로 가져갔다. 키리야미가 착,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검집에 수납되는 순간, 사과는 땅바닥에 닿았다. 그리고 껍질의 위쪽 절반은 부드러운 원을 그리며 사과 속살과 분리됐고, 밑의 껍질은 퍼져나가며 여덟 조각으로 분리되는 사과 속살을 밑에서 접시처럼 받았다.

“오오!”

은결은 감탄의 탄성을 올리며 박수를 쳤다. 쿠로사카는 기뻐해야 하는지 애매하게 생각했다. 써커스 공연이 무가치하단 건 아니지만 그녀는 이런 걸 위해 검을 수련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즐거워하는 은결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실컷 원하는 걸 해줬건만 반응이 시큰둥하면 그게 더 울화통 터지는 일이 아니겠는가.

“야, 역시 멋졌어.”

여덟조각으로 잘린 사과 가운데 네 조각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쿠로사카는 조금 놀랐다. 은결은 미리 사과의 낙착지점에 역장을 펼쳐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먹을 것으로 장난치는 것은 좋지 않다. 쿠로사카는 가볍게 웃으며 허리께까지 올라온 사과 조각 가운데 하나를 들고 먹었다. 은결도 네 조각을 자기 쪽으로 가져와선 먹었다. 사과를 다 먹고, 쿠로사카가 말했다.

“그런데 남의 검술을 구경거리로 전락시켰으니, 너도 나름대로 성의를 보여주는 거겠지?”

은결은 쿠로사카의 말에 눈을 동그렇게 떴다가 팔짱을 끼고 고민을 하다가, 퍼뜩 생각난듯 말했다.

“기호 마법 진을 반경 300미터 짜리로 시전 할 수 있는데 볼래? 꽤 장관이야.”

“봉인진식보다 뛰어나?”

“그건 좀... 아버지하고 비교하면 곤란하지.”

“그럼 흥미 없어. 매일같이 네 아버지의 봉인진식을 보는데 어지간한 기호진식 따위, 감흥이 올 리가 없잖아.”

“으음...”

쿠로사카가 냉랭하게 거절하자 은결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은결의 최대 장기는 기호를 다루는 것이지만 수행에 비교되게 되면 장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걸 빼면 남는 밑천이 얼마 없다. 은결의 전투 방식 자체도 역장과 육체 강화, 스피드, 가호진식을 이용한 타격계 위주로, 쿠로사카의 검술처럼 섬세한 맛은 없다. 쿠로사카에게 보여줄 만한 것은 못 된다.

“아.”

생각을 거듭하던 은결은 한 가지 재밌는 것을 떠올렸다. 아마 그것이라면 쿠로사카도 꽤 재밌어 하리라 싶었다.

“쿠로사카, 가만히 있어봐.”

“뭘 하려고?”

“이걸 하려고!”

은결이 외쳤다. 그리고 쿠로사카의 몸이 하늘 저 높이 까지 솟아올랐다. 은결이 역장으로 그녀를 가두고 창공으로 날려 보낸 것이다. 막대한 압력이 느껴진다 했더니 순식간에 쿠로시카의 시야 거의 전부가 하늘과 구름, 따가운 햇빛으로 뒤덮였다. 쿠로사카는 아래를 내려다 봤다. 벌써 성천 고등학교의 옥상은 까마득했다. 역장 안에서 당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쿠로사카에게, 팔찌를 통해 은결의 목소리가 전달됐다.

-걱정 말고 그대로 있어봐. 곧 재밌는 경험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은결의 말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쿠로사카는 자신의 몸이 허공에 둥실 뜨는 것을 느꼈다. 중력이 사라진 것이다. 밀폐된 공간 가운데서 중력을 그대로 받으며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대기의 저항이 없는 역장 안은 무중력 상태가 됐다. 중력에서 해방된 육체는 기묘한 감각 가운데 공간을 유영했다. 지극히 신비한 체험이었다. 눈을 감으면 전후좌우, 상하가 사라졌다. 시각만이 겨우 그녀의 위치를 설명해 줄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쿠로사카는 몸을 빙글빙글 돌려보며 그 자유로운 감각을 만끽했다.

대략 30초쯤 되었을 까? 중력을 타고 유영하던 그녀의 몸으로 천천히 짓누르는 듯한 힘이 느껴졌다. 중력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원래의 중력이 감각적으로 회복되었을 때, 역장은 성천 고등학교의 옥상에 고요하게 안착했다. 쿠로사카는 유쾌한 기분으로 성천 역장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웃는 낯으로 은결에게 진솔한 감상을 전했다.

“꽤 멋졌...”

“아, 아아...”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은결은 그녀의 말을 정면에서 받지 못하고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볼이 살짝 붉었다. 쿠로사카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총명한 그녀는 금세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고, 따라서 그녀의 얼굴도 붉어졌다. 그러니까, 은결은 위에서 떨어져내리는 자신을 보고, 본의든 아니든, 치마 속을 감상하게 된 것이다. 은결은 쿠로사카가 자신이 뭘 봤는지 알게 됐다는 걸 눈치채고, 서둘로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쿠로사카, 오해하지 말고 들어. 이건 말야, 결코 고의가 아니었-”

그러나 이미 한 순간에 장검으로 사과 껍질을 깎아내고 덤으로 속살도 가지런히 나누는 신속의 손길이, 은결을 노리고 날고 있었다. 은결은 눈뜨고 맞을 수밖에 없었고, 막을 수 있어도 막으면 곤란한 손길이었다.

-짝!

변명도 허망하게 시원스런 소리가 성천 고등학교의 옥상으로 퍼졌다. 결계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은결은 어쩌다 분홍색 천조각 하나 본 값 치고는 되게되게 비싸다고 생각했다.

*와, 이런 유쾌한 이야기 얼마 만에 적는 건지. 역시 이런 것도 좋군요. 지난 챕터는 많이 빡빡했으니까요. 어차피 앞으로도 쑤셔 넣어야 할 내용은 치여 죽을 정도로 많으니.

*요즘은 일복이 터져서 죽을 맛. 그런데 피로하면 입안에서 재깍 반응이 일어난다는 것도 참 신기하죠. 혀 밑이 헤져서 따끔따끔합니다. 후덜덜...

*피로에 쩔은 작자에게 성원을! 아, 수능도 얼마 안 남았는데 수험생 여러분은 열공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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