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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103화 (103/300)

#   103-희망을 위한 찬가 - 변신시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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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신발을 벗고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심연이 바람과 엉켜 깊이를 알 수 없는 허무를 드러내고 있었다. 허무. 그래. 허무였다. 그는 지금 자신의 심정이 모든 비참한 감정과 뒤섞여 종래에 완성된 하나의 허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그 자신이 허무한 존재라고 여겨졌다. 그가 직장에서 해고당한 것은 일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회사에서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일을 했다. 지각도, 결근도 하지 않았고, 휴가도 쓰지 않았다. 기꺼이 야근을 했고, 잔업 수당도, 승진도 바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모든 노력이 소용없었다. 그는 해고당했다.

해고당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두 사람은 이혼했다. 아이가 없었기에 갈라서는 것은 간단했다. 그리고 그는 혼자가 됐다.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새로 무언가를 배우기엔 너무 늦은 나이였다. 작은 식당을 열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식당이 있었다. 그의 손재주로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얼마 남지 않았던 퇴직금은 금세 사라졌다. 그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몇 푼 안 되던 퇴직금으로만 증명되던 그의 과거는 사업 실패로 허공에 떴고, 집도 대출을 위해 담보에 잡혔다. 펜대 굴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줄 아는게 없는 자신을 이 사회는 더 이상 바라지 않았기에 미래 또한 없었다. 주변에서는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모두 무능한 병신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도 자신이 병신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다른 길은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길로 베란다의 스테인레스 골조를 움켜쥐었다. 밤바람이 강하게 불어 그의 얼굴을 쓸었다. 그는 얼굴이 차갑다고 느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울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해 그 두근거림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는 베란다를 뛰어넘었다. 아찔한 중력이 심연의 바닥으로 그를 빨아들였다.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이 공포가 되어 그를 엄습했다. 대학 교양 시간이 떠올랐다. 왜 인지는 스스로도 모를 노릇이었다. 학점을 잘 준다는 소문에 등록했던 수업이다. 열심히 강의를 들은 적은 없었다. 문학과 사회라는 지루한 수업이었다. 그때 교수는 수업의 첫 시간을 이런 문장을 적고, 읽는데서 시작했다.

‘Als Gregor Samsa eines Morgens aus unruhigen Träumen erwachte, fand er sich in seinem Bett zu einem ungeheueren Ungeziefer verwandelt.’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안에서 한 마리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은결은 거창한 어조로 변신의 첫 문장을 읊었다. 주변에서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민성이 그들 시선의 대표로서 손을 들어보이며 물었다.

“...그게 왜 나오냐?”

“왜냐니. 지금 이제까지 읽었던 가장 무서운 책 대보는 거 아냐? 그래서 변신의 첫 문장을 읊어 본 거지.”

은결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표정으로 말을 되돌렸다. 그야 여름도 되었고 하다 보니 어쩌다 화제가 공포물로 넘어갔고, 그 와중에 무서운 책 이야기 하는 것은 맞는데, 다들 공포특급이니 오싹오싹 씨리즈니 하는 건전한 책을 이야기 하는 와중에 은결은 세계 고전 명작 가운데 하나를 당연하다는 듯이 거론하니 주변으로서는 당혹스럴 따름이다. 민성은 ‘이 녀석이 정말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 물었다.

“나도 변신 읽어 봤거든. 근데 잠만 잘 오던데 뭐가 그리 무섭더냐?”

“...너희들 바퀴벌레를 어떻게 생각하냐?”

은결이 답은 하지 않고 되물었다. 반응은 즉각적으로 이어졌다. 질문이 워낙 삶과 밀착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이라고 하냐! 끔찍하지!”

“어우! 소름이 돋지!”

“그야 역겹지!”

“닭살 돋아!”

단어를 다양하게 사용되었지만 표현하는 감정은 일치됐다. 단적으로 말해, 거대한 혐오다. 은결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런 반응을 이해한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인 다음, 진지한 표정과 어조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변신에서는 사람만한 바퀴가 나온다고! 그걸 일일이 상상하면서 읽어봐라. 안 무서울수가 있나!”

은결이 역설했다. 가사 마스터이기도 한 은결로서는 바퀴에 대한 집착이 다소 강할 수밖에 없었다. 변신에는 사실 그레고리 잠자가 어떤 곤충으로 변했는가에 대해 명확히 나오지 않지만 묘사된 내용을 보자면 은결은 언제나 ‘사람만한 바퀴벌레’라는 이미지를 떨칠 수가 없었고, 그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은결은 상당한 데미지를 입어 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래봐야 글인데.”

민성과 동물원 삼총사는 그제서야 은결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그게 그렇게 무서울 수 있는지는 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자 은결이 귄위자의 표정을 하고는 주변을 향해 가르침을 내리듯 엄숙하게 선언했다.

“어허, 글이니까 더하다고. 묘사의 생생함 이런 게, 다년간 바퀴와의 전투를 수행해온 나 같은 사람의 경우는 거의 HD화질이니까. 바퀴벌레 다리 털 수까지 알 지경이다.”

은결은 청소를 열심히 하지만 바퀴벌레는 자기집만 깨끗이 한다고 해서 사라져주는 생물이 아니다. 다른 집과도 연결되어 오다니는 끔찍한 생물인 탓이다. 때문에 드물긴 하지만 은결도 바퀴와 싸움을 한다. 과거 수행이 세연에게 자랑한 수준은 유감이지만 아니다.

“음...”

주변에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게 떠오르면 많이 무서울 것 같았다. 엄지손가락만 녀석만 봐도 놀라는 판국에 사람만이라니, 상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리고 뒷문이 열렸다. 한 소녀가 들어서며 밝은 목소리로 ‘오하요-’라 말했다. 민성이 제깍 소녀에게로 다가가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거 참, 보람도 없이 부지런 하지.”

“그러게나 말야.”

고릴라와 여우가 측은하게 민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쿠로사카 옆에서 헤실헤실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공주와 그녀의 시종 같은 모습이었다. 은결은 그들의 평가에 괜히 민성이 불쌍하게 느껴져서 그를 응원했다.

“아냐. 의외로 성과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미운정도 정이라는데, 쿠로사카가 민성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잖아.”

고릴라가 피식 웃으며 반박했다.

“그렇게 따지면 니가 훨씬 가능성이 높지. 그리고 대화도 많이 하잖아. 주변에서는 아무리 봐도 쿠로사카가 가장 친한 사람은 너다. 민성이 아니라.”

“농담은.”

은결은 가벼운 웃음으로 넘어가고자 했지만 여우가 고개를 저으며 그 말을 딱 잘라 부정했다. 그리고 단호한 의견을 추가했다.

“농담 좋아하네. 필담 아니고서 대화할 수 있는 대상이 너뿐인데 당연하잖아. 더구나 옆 자리고.”

“음...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럴지도 모른다고 여겨졌다. 더구나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눴고, 좋든 나쁘든 사건도 많았다. 그러나 묘하게 납득하는 은결을 보고 동물원 삼총사는 배알이 꼴렸다.

“그런거지. 껄껄. 그래봐야 너하고 쿠로사카는 너무 격이 안 맞다만.”

“그러게. 음침한 죽상과 발랄한 미소녀라니, 너무 격이 안 맞잖아. 이런 건 한국인 이전에, 남자로서 억울하니까 응원할 수가 없지. 후후후.”

여우와 늑대가 작당하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것들이...”

은결은 ‘발랄한 미소녀’라는 쿠로사카에 대한 그들의 평가에 심각한 반감을 느꼈지만 지적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흐응. 무서운 책을 대라고 하니 ‘변신’이라. 답다고 해야 하나...”

조소 섞인 웃음을 보내면서 쿠로사카가 말했다. 아침에 민성 일당과 가장 무서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의 대답을 말해주자 되돌아온 그녀의 감상이다. 은결은 조금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다.

“진짜라니까. 거대 바퀴 생각하면 소름 돋지 않아?”

잠시간 쿠로사카의 말문이 막혔다. 역시 여자인지라 바퀴벌레는 싫은 모양이다. 하긴 요즘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들 바퀴벌레에 대해 공포에 가까운 혐오를 품고 있다.

“...물론 생각하면 소름 돋지. 하지만 네가 변신을 말한 건 그런 농 섞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떨까? 내 말이 틀려?”

“웃...”

정곡을 찔린 은결은 말을 되돌리지 못했다. 은결이 변신에서 공포를 느낀 것은 물론 거대 바퀴벌레의 공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심층적으로는 소외의 문제와, 그것에서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파시즘’의 아우라가 그 글에서 읽히기 때문이었다.

“역시.”

피식 웃으며 쿠로사카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옆얼굴 선이 부드럽게 드러났다.

“그런데, 너도 오늘은 어쩐지 표정이 좋지 않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화제도 돌릴겸 은결이 걱정 어린 어조로 물었다. 평소처럼 발랄한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요 몇 시간 살펴본 결과 쿠로사카는 다소 지친 듯한 모습을 보아고 있었다. 그의 질문을 받은 쿠로사카는 가볍게 고개를 젖고 은결에게 ‘아무것도 아니다’고 답하려다 그의 우려 섞인 표정을 보고 대답을 꺾었다.

“근처 아파트에서 사람이 한 명 투신자살을 했어. 그것 때문에 기분이 좀 좋지 않아. 아침에 나오면서 봤을 때는 아직 시체도 치워져 있지 않더군.”

다시 생각해도 기분이 나쁜 듯, 쿠로사카는 짤막하게 답했다. 그녀가 비일상적 존재와 싸우는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건 사념체다. 살아 있는 것이 찢어지고 부서지고 조각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산 것이 찢어지거나 베어지거나 조각나서 그 내용물을 쏟아내는 장면은 그녀는 물론 은결로서도 전투의 흥분이 더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녀는 불과 얼마 전에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겪었고, 지금도 완전히 회복했다고 보긴 힘들었다.

“투신자살이라...”

“나는 잘 모르겠지만 지나가면서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라 추측되고 있는 모양이야.”

“......”

생각해도 별 수 없는 흔한 이야기였다. 어차피 대한민국의 한해 자살자 수는 만 명을 넘어간다. 투신자살은 이제 뉴스거리도 되지 못한다. 흔하지 않은 것이라면 직접 가서 볼 수 있는, 가까운 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정도였다.

“사람의 시체를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머리가 터져 뇌수가 주변으로 흩뿌려진 장면을 보는 건 처음이었어. 아무래도 유쾌하긴 힘들지.”

“...너무 신경 쓰지마.”

“그래. 너무 신경 쓰는 건 좋지 않겠지.”

쿠로사카는 힘없이 은결에게 웃는 표정을 보냈다. 은결은 그 표정을 보고 그녀를 걱정했고, 동시에 그녀가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대답을 되돌려 온다는데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물론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쓰부님의 추천에 감사의 마음을! 지금 소득은 없이 일복만 터져서 글 쓸 시간 없는데 위기를 무릎 쓰고 올립니다. 흑흑.

*사설과 글의 관계에 의문이 있었던 분들은 이 챕터에서 그것을 선명하게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벌써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음...

*진짜로 앞으로 한 동안은 글쓰기 힘들것 같네요... 일복이 터졌습니다. 지금도 이게 뭐하는 짓인지. 매우 힘듭니다. 하여간 인기투표는 주변이 진정되면 그때 정리해서 발표하겠습니다.

*바퀴벌레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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