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희망을 위한 찬가 - 길가메시와 근친금기(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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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옥상 끝머리에 걸터앉아 다리를 퉁퉁 퉁기며 햇볕을 쬐고 있었다. 평화로운 바람과 햇살이 기분을 온화하게 다스려줬다. 그는 흐읍- 하고 심호흡을 하고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수행의 글이다.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시행되어 레이거노믹스라 불리 우는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영국의 대처리즘과 대동소이하다.
우선 레이건 행정부 역시 긴축재정을 실시했다. 이때 주로 축소된 예산은 사회복지 쪽이었다. 이러한 통화긴축은 금리를 인상시켜 중남미 국가를 이자로 인해 파산상태에까지 몰아간다. 하지만 국방비는 도리어 증가했다. 이 복지 예산 삭감은 레이건 이후 행정부에서도 지속적으로 이어져 부시 공화당 정권 말에는 70년대 초의 60%수준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고 레이건은 세금을 줄여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는데, 그 규모는 1100억 달러에 달한다. 그렇지만 이 감세는 상위 1%의 세금을 14%줄이나 하위 10%의 세금은 28%를 도리어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감세에 이어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각종 행정 규제를 완화한다. 이는 실효를 거두지만 그 효과는 일시적인 것으로, 기업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이로 인해 중소기업이 도산, 막대한 실업자가 발생하게 된다. 더해서 이렇게 중소기업을 청소하고 난 거대 기업으로 인해 독점이 발생해 고비용 저효율 서비스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레이건 행정부는 노조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81년 항공 관제사 파업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정부는 파업을 일으킨 직원들에게 직장복귀 명령을 내리고 따르지 않은 이들을 모조리 해고한다. 이후 미국 전체의 노동조합은 약화되기 시작하고, 79-82년 사이 미국 실질 평균 임금은 8%가 하락하고 89년 까지 미국 노동자의 80%가 임금 삭감을 경험하게 된다. 반면에 미국 고소득측은 호황기 20년 동안 소득의 1%가 증가되었으나 80년대 들어 4배의 재산 증가를 이루게 된다. 국가는 악이긴커녕 불가결한 자본의 파트너인 것이다.
결국 대처리즘도 레이거노믹스도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통해 경제를 회복시키기 보다는 경제적 모순을 심화시켰을 뿐이다. 기대되던 경제적 성장은 뒤메닐과 레비의 분석에 따르면 실패했다. 특히 미국은 레이거노믹스를 통해 일시적인 호황을 누리지만 이는 이면에는 ‘쌍둥이 적자’로 불리는 막대한 재정적자가 있었던 속빈 강정으로, 정책적 실효가 있었던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단지 미국이 패권국이기 때문에 그 적자에도 버틸 수 있었다.
또한 두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그 실천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측면을 내보였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표층적으로는 노동조합에 대한 철저한 공격과 노동인구의 국가 간 이동에 대한 통제, 그리고 자본의 이동에 대해 국가가 취하는 편향적 태도를 비교해 볼 때 확연하고, 심층적으로는 ‘민관협력’이라 불리 우는, ‘위험은 정부가 부담하고, 이익은 사기업이 챙기는’ 구조에서 선명하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이름을 내걸고 이루어지는 세계적 규모의 자본재편이 실질적으로 이루어내는 결과(경제적 모순의 심화, 경제활성화 실패)의 모습들과 더불어, 그것이 ‘신자유주의’조차 아닌 일종의 세계적 규모의 계급적 프로젝트, 촘스키의 표현을 빌린다면 ‘부자들의 사회주의’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의혹을 품게 한다. 신자유주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가장 주요한 축이 금융경제임을 생각하면 이 의혹은 한층 강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흐름은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선언과 더불어 한국에서도 거세게 몰아치게 되고, 그들 이론의 무비판적인 수용은 IMF 사태라는 거대한 경제적 위기로 이어지게 된다...
은결의 얼굴이 어둡다. IMF사태, 라는 단어 때문이다. 8년 전에 있었던 거대한 경제적 위기를 새삼 떠올리는 일은 씁쓸했다. 그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좋았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쓸었다.
삐꺽- 하고 옥상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결은 자리에서 일어나 올라온 소녀를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여.”
“음...”
쿠로사카는 다소 어색하게 목례를 하고는 곧장 검을 꺼내 수련을 시작했다. 평소처럼 대련하자고 할 줄 알았던 은결은 다소 의외다 생각했다. 아직 당시의 충격이 덜 가신 걸까? 하기야, 이틀 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사람이 벌써 그 충격에서 회복할 리가 없다. 은결은 조금 걱정스러워서 물었다.
“저기, 이제 괜찮아?”
“괜찮아.”
쿠로사카는 담백하게 말하며 검을 휘둘렀다. 깨끗한 검식이 이어지며 휘황한 몸놀림을 보였다. 하지만 은결은 평소처럼 그 동작에 찬탄할 수 없었다. 잘못 본게 아니라면 그녀의 동작은 평소에 비해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으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정말로 괜찮아. 몸은 최상이야. 나도 놀랐어. 아마 너와 요 근래 대련을 계속했던 게 좋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 일본에서는 맞상대할 사람이 없었거든.”
쿠로사카는 이어 답했다. 내용도 그렇지만, 이제까지 은결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부드러운 어조의 대답이었다. 그날밤의 대화가 통했나 싶어 은결은 쑥스러움과 더불어 약한 기쁨을 느꼈다. 그래서 은결은 쿠로사카가 역정을 내지 않을까 우려하면서도 충고를 더했다.
“그렇지만,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손이 떨리는 것 같던데...”
“...잘못 본 거겠지.”
짤막한 주저 다음에 쿠로사카가 답했다. 하지만 그 짤막한 주저만으로도 자신의 판단이 틀린 게 아니었음을 은결을 확신할 수 있었다. 쿠로사카는 마음먹은 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 정도의 실력을 쌓은 이에게 이는 범상한 일이 아니다. 은결은 충고를 이었다.
“마음 편히 먹고 지내. 너무 긴장하지 말고. 무엇보다, 뭐든지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고. 어제도 얘기했었지만 그 사념체의 암시는 나를 노린 거였어. 다시 네게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을 거야. 걱정하지마.”
“...그래.”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지만 쿠로사카는 충고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은결은 대화가 너무 부드럽게 진행되는거 아니냐 싶어 머리를 벅벅 긁다가, 갑자기 퍼뜩 떠오르는 게 있어 그녀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네가 가지고 있던 그 패 있잖아.”
“패?”
“늑대인간이 가지고 있던, 그 패말야.”
“아아. 그게 왜?”
“아버지께서 가능하면 좀 빌려주지 않겠냐던데.”
“그렇게 해.”
쿠로사카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고마워. 그런데 있었다면 미리 이야기 해 줬으면 좋았을텐데.”
“숨기려고 한 거 아냐. 묻지 않았잖아.”
은결이 다소 아쉬운 낮으로 투정했다. 쿠로사카는 담백하게 잘라 말했다. 그녀의 말은 정말이다. 숨길 생각 따위는 한 적 없다. 나중에 우편으로 미즈하라에게라도 보내 분석을 부탁할까 싶어 가지고는 왔을 뿐이다. 그런데 막상 가지고 와 보니 별다른 마법적 작용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매일매일이 바쁘다 보니 잊다시피했다. 다시 챙겨본 것도 지난 만월의 밤에 은결에게서 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였을 뿐이다.
-지난 만월.
그걸 생각하니, 일련의 생각들이- 만월의 밤. 손의 이야기. 진화의 이야기. 이성의 이야기.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 주인과 노예를 넘어서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그런 생각들이 쿠로사카의 뇌리로 연달아 떠올랐다. 우스웠다. 그건 그 참혹한 시간에 그녀 자신을 유지시킨 마지막 ‘희망’ 같은 거였던 것 같았다. 쿠로사카는 시선을 돌려 은결을 바라봤다. 그가 자신에게 들려준, 인간에 대한 가장 찬연한 희망의 노래. 그렇지만 정작 은결 그 자신은-
“그거야 그렇지만... 응? 쿠로사카, 왜 그래?”
은결은 툴툴거리며 말을 더하려다가 쿠로사카가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걸 보고 물었다. 쿠로사카는 잠깐 시선을 피했다가 답했다.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어떤 패인지 네 아버님은 간단하게나마 알아내신 게 있어?”
“그 패 뒤에 새겨진 문자가 히브리어고, 해석하면 ‘그 신의 이름은 붉은 여왕, 그 적의 이름은 붉은 여왕’이라는 건 알아냈지.”
“붉은 여왕...”
은결이 한 말을 듣고 쿠로사카가 다시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무언가 짚이는게 있기라도 한 듯한 태도였다.
“응? 뭐 아는 거 있어? 히브리 쪽 신화는 아는 바가 없어서 나로선 붉은 여왕이라 불릴만한 캐릭터가 있는지 모르겠던데.”
어차피 아버지 손에 들어가면 다 분석해 내겠지만, 이왕 말문이 트이고 했으니 쿠로사카와 이런저런 대화나 나눠볼까 싶어 은결이 물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녀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아니, 나도 몰라. 그냥,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진 것 뿐이야.”
“흐응.”
“패는 오늘 저녁에 줄께.”
“응.”
은결이 조금 아쉽게 고개를 끄덕였고, 대답을 들은 쿠로사카는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약한 떨림이 느껴졌지만 방금 전 보다는 안정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은결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봉인진식을 펼쳤다. 거대한 빛의 구조물이 허공에 떠올랐다. 은결은 바쁜 손놀림으로 기호를 다루어 나갔다.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은 것에 미약한 섭섭함을 느꼈다.
*폭주기관차(천유마) 님의 추천에 감사를. 낚시 스킬도 훌륭하셨습니다.(...) 그래서 좀 더 쉬고 싶은 마음도 물리치고 이렇게!
*수행은 자부심이 센게 아니라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는 거죠. 제가 밀의 자서전을 읽으며 아무나 자기처럼 될 수 있다는 말에 그럼 나는 침팬지냐! 라고 울부짖었던 과거가 있어서 천재가 너무 겸손한 거 안 좋아합니다.
*이 글이 장르소설에 연재소설이란걸 좀 더 고려해야 하지 않았나, 하고 요즘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읽는 분들이 제가 무의미하게 무언가를 집어넣는 게 없었다는 걸 이해하시겠지만, 처음에 장치를 장기적인 텀을 가지고 설치해 놓으니 그 장치들의 의미가 들어날 때 까지 왜 그런걸 넣었는지 의아해 하거나 단순한 스노비즘이 아닌가 의심하시는 분들도 많았고, 어느 정도 드러난 지금은 다 까먹고 아아, 그런 게 있었지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고. 좀 보람이 없는 것 같달까. 흑흑. 그래서 일부러 드러낸 것들에 한해서는 좀 더 텀을 짧게 잡았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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