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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99화 (99/300)

#   99-희망을 위한 찬가 - 길가메시와 근친금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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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이에게 맡겨서 괜찮았겠느냐?”

바람을 전신으로 느끼며 할아버지가 물었다. 수행은 착찹한 얼굴로 답했다.

“은결이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대체 누가 그 쿠로사카라는 아이와 은결이만한 접점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무얼 걱정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은결이가 못한다면 최선의 경우라도 그녀의 기억을 무의식 수준에서 재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최면과는 격이 다릅니다. 기억이 존재를 구성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작업은 사실상 그녀를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후우...”

수행의 설명을 듣고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을 위로하며 수행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은결이는 착한 아이라 어떻게든 그녀와의 공감대를 이끌어 낼 것이라 생각합니다. 걱정해야 할 것은 그 공감의 결과로서 부수적으로 이끌어내질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부수적으로 이끌어질 것이라...”

“물론 그것은 은결이보다는 그 소녀에게 짐이 될 것입니다만,”

수행의 마지막 말은 다소 쓴, 하지만 분명히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 섞인 답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미소가 무슨 의미인지 물을까 하다가 그만뒀다. 필요하다면 말하지 않더라도 알려 주었으리란 생각에서다.

은결의 질문을 듣고 쿠로사카는 자신을 우러러보는, 자기 또래의 시선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친구일까? 답은 불필요 했다. 그녀의 대답은 결정되어 있었다.

“많이 있어. 나는 너 같은 왕따가 아냐!”

액체질소 같은 대답이다. 라고, 은결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 대답에 담긴 차가움과 거부감을 이해한다. 자신이 몇 년에 걸쳐 수용해야 했던 것을 그녀는 몇 시간 만에 수용했다. 물론 사실은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해석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은결이 접한바, 그 암시의 양식은 자신이 과거 판단했던 것과 같은 방식의 가치판단과 더불어 사태를 주입했다. 그것은 정말 거대한 정신적 폭력이다. 수행이 장래 대인 관계가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그래. 다행이다.”

그래서 은결은 기꺼워하며 그녀의 성마른 대답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은 이해하지만, 그 이해가 어떻게 그녀의 충격을 보살필 수 있는지는 모른다. 은결은 계속해서 자신의 언어를 공허에 맡겼다.

“다행? 알량한 말주변을 가지고 자기합리화는 하는 게 어때? 그런거 잘 하잖아. 그래서 왕따가 된 것이겠지만.”

돌아온 은결의 대답에 쿠로사카는 다시 위축됐었다. 은결은 위에 서려 하지 않는다. 그는 아래에서 우러러 보지도 않는다. 라는 생각이 그녀에게 반사적으로 한층 공격적인 대답을 하도록 했다. 참혹한 자기혐오가 전신을 핥는다. 그녀는 전신으로 소름을 느꼈다. 은결이 미웠다. 하지만 그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모순.

“말주변이라... 그래. 네 말이 맞아. 이 때문에 나는 어렸을 적에 많은 적을 만들었던 거 같애. 하지만 어쩔 수 없었는걸. 나는 학교의 친구들과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어. 무엇이 보통 대화인지 알 수 없었어. 내 대화 상대는 아버지였는걸. 아이들의 대화는 지루했고,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을 꺼내면 그 아이들은 항상 이상한 눈길로 나는 쳐다봤어. 내게 평범한 것이 그들에겐 평범하지 않았지.”

쿠로사카는 당장 날카롭게 은결의 말에 반박했다.

“그건 이유가 안 돼. 넌 지금도 변하지 않았잖아. 과거야 어쨌든 네게는 무수한 변화의 기회가 있었어. 그렇지만 변하지 않았지. 그 꼴사나운 잘난 척을 그만두지 않았어. 그렇지 않아? 방금 전에도 그랬잖아!”

“......”

은결은 침묵했다. 쿠로사카는 어떤 쾌감과 어떤 고통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쿠로사카의 생각과 달리 은결은 말문이 막혀 침묵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우연히 닿은 이 화제가 어쩌면 지금의 그녀에게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다소 괴로운 이야기지만, 그렇기에 그녀가 겪었던 그 체험에도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다. 은결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며, 다소 길어질 이야기를 이끌었다.

“...어쩌면 네 말대로 일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쿠로사카, 나는 처음으로 왕따를 당했던 날을 기억하고 있어. 그건, 꽤 참혹한 경험이었지. 지금이야 내 평소의 태도가 아이들에게 밉보였던 거란걸 이해하지만 당시로서는 영문도 알 수 없는 악의였으니까. 사실은 계속 왕따를 당했겠지만, 그때는 그 아이들을 견딜 수 없었어. 아버지가 쓰러진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니까. 세상이 모두 끔찍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이들도 굳이 그때 그런 일을 시작했던 건 그 시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해. 어쨌거나, 나는 힘으로 그들을 제압했고, 다음날부터 나를 향하던 모멸은 모두 사라졌지. 너무도 간단히, 가소로울 정도로.”

“왜 그따위 이야기를 하는거지? 나는 네 한탄 따위 듣고 싶지 않아!”

“음... 들어봐. 그런 얘기 아니니까. 어쨌거나, 내가 그 경험을 겪으면서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아이들의 태도였어. 그들은 나를 괴롭히며 즐거워하고 있었어. 물론 그건 당연하겠지. 그렇지 않다면 괜히 타인을 괴롭힐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말야, 그게 뚜렷하게 기억되는 건 내가 단순히 이유 없이 괴롭힘 당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어. 그들이 나를 희생양 삼아 얻는 즐거움을 통해 그들 사이의 결속을 강화하고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지. 나를 타자로 만들고, 나라는 타자를 통해 그들 사이의 결속을 튼튼히 한다는 것. 그게... 참혹했지.”

그 이야기를 하며 은결은 어제 미래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미래는 ‘다른 아이들도’라고 말함으로서 자기의 욕망을 정당화 했다. 욕망은 슬픈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욕망의 이유가 타자인 것은 슬펐다.

“......”

쿠로사카는 침묵했다. 그녀는 그의 이야기가 조금씩 자신의 가슴에 어떻게든 맞물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감각차단에 걸려들지 않아. 그건 내가 감각차단실을 극복했기 때문이지. 나는 헤겔을 공부하고, 그것을 체화하기 위해 그곳에 들어갔어. 그 체험은 신비로워. 마치 사지 전부가 사라지고 의식만이 남아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빛도, 소리도 없는 완전한 어둠인거야. 아버지가 술식으로 처리를 해 뒀기 때문에 최소한 들려와야 할 나 자신의 심장박동이라던가, 중력의 감각 같은 것도 그곳에서는 없었어. 그리고 환상이 펼쳐졌지. 아름답거나, 무섭거나, 참혹하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그런 환상들이...”

곧장이라도, 깊은 심해에 잠겨 그 어둠과 그 수압에 짖눌려 사라질 것 같은 언어로, 은결은 말했다. 쿠로사카는 계속 침묵하고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런 환상이 왜 생기는지 아니? 그건 나라는 자아가 자아로서의 통일성을 지니려면 타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야. 감각차단실처럼 차이가 없는 세계에서 자아는 유지될 수 없거든. 자아는 타자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타자의 환상을 만들어내 자기를 유지하는 거야. 타자를 갈구하는 거지. 그러니까 그 체험은 참혹했지. 인간의 자아란 게 얼마나 알량하고 한심한지 알려줬으니까. 타자 없이는 자기조차 유지가 안 된다는 걸 알려 줬으니까. 자아는 원래 홀로설 수 없다는 걸 알려줬으니까. 헤겔 식으로 말하면 절대정신, 신조차 자기를 알기 위해 타자가 필요하단 말이니까, 인간 따위야 더 말할 필요도 없잖아?”

“그 이야기가 네가 왕따인 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

쿠로사카는 억지로 목소리를 일으켜, 가시를 돋우며 말했다. 은결은 쓸쓸한 미소를 지어 쿠로사카에게 보내며 말했다.

“그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스탠포드 감옥 실험을 떠올렸거든. 그건 세상이 지닌 악의의 구조의 한 단면을 가장 간단하게 드러내는 실험 같은 거야. 무작위로 추출된 평범한 사람을 간수와 죄수로 만들어 수용 했더니 정말 간수와 죄수인양 억압하고 억압당했다는 그 실험 말야. 어처구니없잖아. 그 실험의 결론은 가장 호의적으로 판단해도 개인의 자아는 구조, 즉 ‘타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야기지. 자아란 타자의 찌거기란 말이야. 더구나 최악의 방식으로 판단하면, 타자가 있는 한, 타자에 대해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자아의 욕망은 인간에게 사라질 수 없을 것이란 냉엄한 선고이기도 하고.”

“...엉터리.”

쿠로사카는 반발했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이 자신을 어떻게 규정했던가를 이제 이해하는 쿠로사카는, 은결의 이야기에 강하게 반발하지 못했다. 이미 그녀 자신이, 타자의 시선에 맞춰 자신을 규정했던 경험을 지니고 있다.

“그랬으면 좋을텐데. 하지만 레닌이 소비에트 연방을 세워야 했던 건 러시아를 노리는 외국 때문이었는걸. 제 3세계에 진정으로 ‘민족’이란 개념이 성립한 건 같은 ‘민족’이란 개념으로 무장한 침략자 때문이었는걸. 의식의 진화는 타자를 배제함으로서 자기를 확립시키는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나아갔는걸... 그렇게, 타자만이 자아를 가능하게 했는걸.”

모든 거창한 자유와 실존과 주체의 분쇄. 아무도 감히 홀로서지 못한다.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것은, 얼마나 참혹한 이야기인가, 하고 은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으로, 나는 인간을- 은결은 뒷말을 짓밟아 죽였다.

“......”

타자의 시선으로 자기가 규정되었던 체험이 은결의 이야기를 통해 오버랩됐다. 쿠로사카는 은결의 이야기가 쓰디쓰다고 느꼈다. 은결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체험으로 인해 그런걸 생각하게 되니까, 굳이 아이들과 친해지려는 노력 같은건 아무래도 좋겠다고 여기게 됐어... 내 말투가 이런 건 일부러 고치지 않았다기 보다 아마 그 결과로서 자연히 이어진 거겠지. 그리고 어차피 그 아이들과 맞춰 이야기하는 건 아무런 재미도 없었는걸. 더구나 내가 정말로 관심을 가진 것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어. 그들과 나는 전혀 다른 범주의 세계에 살고 있잖아. 그러다보니... 나는 친구가 없게 된 거야. 내가 좋아한다면 몰라도, 그들에 맞춰 내가 규정될 순 없었어. 단순한 이야기야. 나는 타자를 넘어서고 싶었어. 가소로운 반항심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관철하고 싶었어.”

그렇다면, 왜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어차피 타자인 내게,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하고 쿠로사카는 강하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어딘가 저미는 것 같은 슬픔에 그렇게 묻지 못하고, 그녀는 다른 것을 물었다.

“그렇지만 너는 친구들이 있잖아.”

“아아, 그래. 나는 민성이라던가, 동물원 삼총사 같은 좋은 녀석들과 알고 지내고 있지. 올해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그런 괜찮은 아이들을 만났는걸. 하지만 그 아이들은 나를 친구라 생각할 수 있어도, 아마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거 같아.”

“...오만하군.”

은결은 보일리 없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평가를 부정했다.

“아냐. 이건 오만한게 아냐. 단지, 어쩔 수 없는 거야. 나는 그 아이들에게 나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보여줄 수 없어. ‘가장’ 까지 나갈 것도 없이, 나의 주된 관심사조차 내보일 수 없어. 나는 나의 표피밖에 보여주지 않았어. 그런데 그들을 내가 ‘친구’라는 따뜻한 언어로 칭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

“......”

“하지만 우습게도, 그렇게 민성이랑, 동물원 삼총사랑 지내다 보니까, 같이 있다는게 그게 참 마음에 들더라. 타자는 어째도 좋다고, 메꿀 수 없는 간격이 있다고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같이 있으니까 좋더라. 그래서 그 녀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진실로 교환하지 못한다는 게 꽤 쓸쓸하던걸. 그 녀석들... 가끔씩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도 해 보지만 역시 별로 좋아하지 않고. 요즘은 익숙해 진 것 같기도 하지만.”

쿠로사카는 그 말을 들으며 다시 사람들 마음에는 다리가 없다, 라는 말을 떠올렸다. 사람들 마음에 다리는 없고, 개인의 모든 개인에 대하여 물자체지만, 그래도 타자에 대한 갈구는 끊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그녀는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침묵했고, 은결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기쁜 기색으로 친구에 대한 은결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조금, 쓸쓸했다.

“......”

“그래서 쿠로사카, 너와는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그 중에는 도무지 좋게 생각할 수 없는 일도 있었지만, 하지만 너를 알게 된 게 사실은 무척 기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란 건... 생각해보면 네가 처음인걸. 아버지에게도, 동생에게도, 이런 이야긴 할 수 없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도 함께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

“......”

쿠로사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딘가 메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양 볼이 뜨겁다고 느꼈다.

*이번 화는... 음, 기뻐하시는 분이 많겠군요.

*스탠포드 실험 이야기도 앞에 나온 거죠. 감각차단도 그렇고, 헤겔도 그렇고, 왕따 사건도 그렇고, 타자론 일체도 그렇고. 그런 언급들이 다 체계를 갖추고 주제에 봉사하도록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 에헴.

*수행이 애들 옷 벗기라고 하는 건 단순히 옷 위에는 그리기 불편해서 그런 겁니다. 스쿠미즈 같은걸 입었다면 그냥 그렸겠죠.(...) 물론 자주규제도 강력하게 작동하지만.(...)

*은결의 윤리와 사상 점수는 몇 점이든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은 만든 사람들하고 같이 앉혀야 될 수준이기 때문에.

*지쳐서 좀 쉽니다. 서브라임도 써야되고. 큼큼.

*인기투표 중입니다~ 만족스런 투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99화에서 100화 사이의 텀이 매우 길어질 우려가 있으니 많은 참여를!(...) 마음에 드는 애 둘, 안 드는 애 하나를 선정해 간단한 설명과 함께 쪽지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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