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희망을 위한 찬가 - 길가메시와 근친금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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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마친 은결은 미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가벼운 죄책감을 느끼며 대형 마트에 들렀다. 오늘 저녁 찬을 사기 위해서다. 미래는 좋아라고 그 뒤를 따랐다. 가방을 보관함에 넣고 열쇠를 챙긴 은결은 바구니를 들고 이 코너 저 코너를 기웃 거렸다. 오늘 저녁은 간 고등어와 된장찌개 사이에서 결정할 생각이었다. 가격은 둘 모두 비슷했다.
“음- 미래 넌 고등어와 된장찌개 중에 어느 게 좋아?”
“나야 오빠가 만들어 주는 거면 다 좋은데.”
은결이 묻자 미래가 헤프게, 그러나 몹시 귀엽게 웃으며 답했다. 은결은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려 부담감을 표시하며 말했다.
“으음, 쓸데없는 순간에 기특한 소릴 하는군.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얘기해주는 게 더 기쁘니 사양 말고 선택해봐.”
“음, 그러면 고등어! 시험범위도 발표됐고 하니, 역시 등 푸른 생선을 통해 DHA를 섭취해야하겠지.”
웃으며 말하는 미래의 표정에서는, 그러나 긴장감을 읽을 도리가 없었다. 은결이 아는 한 미래는 시험이랍시고 긴장했던 적이 없다. 집안이 시험 성적에 무관심한 탓인지, 자신만만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언제나 태평무사다. 어쨌거나 그 태평무사에 걸맞게 은결은 미래가 특별히 철야를 한다거나 유별나게 공부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물론 성적은 언제나 최상위다. 그래서 보통 수능만점자가 학교 수업에만 충실했다고 하면 구라쟁이 취급을 받는데, 미래를 아는 사람은 쉽게 단언하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피식 웃으며 고등어를 바구니에 담은 은결은 오늘 아침 있었던 자그마한 소요를 기억했다. 동전 하나에 얽힌 (민성에 한해)슬픈 이야기. 그때 은결은 발터 벤야민과 그의 논문 하나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를 했다. 민성을 비롯한 친구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왜 예술 작품의 아우라의 해체와 동전 경매가 이어지는 지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그 연결을 이해한 것은 은결의 설명이 있고 난 다음이었다.
하지만 일전 버스 안에서 미래에게 프레이져를 언급하며 벤야민을 이어 말했을 때, 그녀는 간단히 요점을 선취하고, 은결에게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중요한 지적을 하며 반론했다. 그날 교수님과의 대화를 하고 건물을 빠져 나왔을 때,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대결에 대해 보여준 짤막하지만 핵심적인 통찰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그런 것을 하지 못한 민성과 동물원 삼총사가 멍청한 것일 리는 없다. 정보를 이해하고, 거기서 연역될 수 있는 어떤 논리적인 흐름을 읽어내는 데 미래가 탁월한 것일 뿐이다. 불행하게도 부전여전이란 말을 쓰긴 좀 힘들겠지만 그녀의 총명함을 부정하긴 힘들었다. 은결은 어쩌면 자신의 대화 방식이 다소 사람들이 친해지기 어려운 것도, 아버지와 더불어 미래가 가장 오랜 시간 함께 대화를 나눈 대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수행은 당연하지만, 미래 역시 지루한 이야기라고 툴툴대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확실하게 따라온다. 은결은 부드러운 미소와 더불어 그녀의 머리칼을 쓸었다.
“하기야, 우리 미래가 똑똑하긴 많이 똑똑하지.”
“에헤헤.”
그러자 미래가 얼굴을 녹이며 은결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은결은 얼굴을 붉히며 거리를 두려 했지만 미래가 꽉 잡고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은결이 당황하며 말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사람들 보는데 징그럽게.”
“뭐 어때, 오빠가 나 칭찬해 주는 거 오랜만이잖아.”
“그, 그런가.”
“그래! 매정하게시리.”
미래는 툴툴거리며 말했고, 은결은 어쩔 수 없구나 싶어 고소를 지으며 그 상태로 계속 장을 봤다. 간혹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곤 했지만 주변에 뽐낼만한 남매간의 우애인데 뭐 어떠냐 싶었다. 사실 남매치고 사이좋은 경우가 드물고 말이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장보기가 끝났다. 계산대로 가서 줄 뒤에 갔다. 줄이 길었다. 미래는 기다리기 지루한지 악세사리를 파는 코너로 향했고, 이것저것 뒤지더니 환한 표정을 하고 은결에게 머리핀 하나를 내보이며 “이거 예쁘지!”하고 물었다. 사달라는 뜻일 게다.
“집에 머리핀 많잖아.”
은결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여심이라고는 쥐뿔도 모르오, 하고 사방에 선전을 했다. 미래가 토라진 얼굴로 반박했다.
“흥, 다른 애들도 그 정도는 다 하는걸!”
그에 은결은 고소를 지으며 그 머리핀을 받아 바구니에 넣었다. 미래는 매우 기뻐하며 다시 은결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곧 차례가 돌아왔고, 점원 아주머니의 의미심장한 웃음을 마주하며 은결은 계산을 끝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미래가 비닐봉투를 받아들었고, 두 사람은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다른 애들도...라.’
저무는 햇살에 물든 바람을 맞이하며, 은결은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도 당연한 것에, 조금 가슴이 아팠다.
쿠로사카는 간단히 순찰을 마치고 늘상 가던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은결이 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있었다. 쿠로사카는 그의 옆 얼굴을 보고 은결이 평소에도 죽상인 얼굴이지만, 오늘은 미묘하게 더 죽상이구나, 라고 생각하곤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런 얼굴의 미묘한 변화를 읽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지냈다는 게 좀 창피스럽게 여겨진 탓이다. 그녀는 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은결을 향해 물었다.
“왜 그러고 있어?”
“그냥. 별건 아니고 생각할 일이 좀 있어서.”
다소 지루한 목소리로 은결이 답했다. 그 힘없는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쿠로사카는 아미를 낮게 세우며 날카롭게 말했다.
“언제 그 녀석들이 나타날지 모르는데, 좋지 못한 태도군.”
“그건... 그런가.”
조금 쓸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긍정한 은결은 시선을 쿠로사카에게 돌렸다. 그녀는 끌끌 혀를 차며 제안했다.
“몸이라도 움직여 기분전환을 하는 게 어때?”
“그런 거야 몇 바퀴 휑하니 돌며 했는걸.”
“나는 다른 걸 제안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쿠로사카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발검 자세를 취해 보였다. 주변의 공기가 긴장되며 강한 기운이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은결은 전신이 찌릿찌릿하게 느껴지는 힘의 파동을 느끼며 고소했다.
“이건- 거참, 점심때론 부족한 모양이시군.”
“하겠어?”
쿠로사카가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은결은 잠시 생각하다가, 확실히 그녀의 제안처럼 대련을 한다면 기분 전환에는 가장 좋은 방법일 거라고 생각했다. 전력을 다한 쿠로사카와의 대련이라면 다른 생각을 할 여유 따위는 없다. 잡다한 상념들 따위는 폭풍에 휩쓸린 것처럼 깨끗이 청소될 것이다.
“좋-”
은결은 웃으며 말하다가 얼굴을 굳히고 시선을 다른 곳을 돌렸다. 쿠로사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저 곳에, 저 휘황한 야광의 한 곳에 사념체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녀석이었다. 긴장이 실핏줄 끝까지 채우는 것을 느끼며 은결을 쿠로사카를 향해 말했다.
“가자!”
쿠로사카는 답하지 않았다. 답하기 전에 그녀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도천시의 어떤 자동차 보다 빠른 속도로 두 사람은 달렸고, 곧 사념체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사념체는 멍게의 가시가 흐릿한 연기의 실로 바뀌면 저러한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기이하고 검은 안개의 무리였다. 일대는 죽은 것 처럼 고요했다.
“무슨...”
그리고 은결은 불길한 기운에 주춤 뒤로 물러섰다. 쿠로사카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키리야미의 손잡이를 잡은 손에 강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앙 다운 입술 끝으로 그녀의 긴장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태도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이 녀석은 정말로 이상했다.
우선, 이 사념체가 지금 위치해 있는 곳이 골목이 아니었다. 물론 대로변도 아니지만 차나 사람이 얼마든지 흔히 지나다닐 만한, 그런 밝고 넓은 곳이었다. 보통의 사념체는 본능적으로 그러한 곳을 피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 사념체의 가장 중요한 특정이 아니었다.
이 사념체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그 분위기에 있었다. 압도적이라고 밖에 말할 도리가 없는 존재감이었다. 사념체는 말 그대로 사념의 집결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어떠한 강렬한 분위기를 지닌다. 그러나 이것은 그 정도가 지나쳤다. 은결과 쿠로사카마저도 어질어질하니 불쾌감을 느낄 정도였다. 이 일대의 고요는 필연적이었다. 산자가 이런 존재의 사념에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모두 강박적으로 이 장소를 피했을 것이다. 이렇게 까지 농염한 사념을 지닌 사념체를 은결은 물론 쿠로사카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농염한 사념은 그 전에 이미 자아를 구성해 하나의 개체가 되는게 원칙이다.
“이건 뭐야...”
은결이 침을 삼키며 다시 의문을 반복했다. 기를 운행하며 흐트러졌던 정신은 다시 맑아졌지만 그래도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정체를 모르는 한 섣불리 싸움에 돌입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마치 제거해 달라는 듯 요동도 않고 정지해 있는 모습이 지독하게 불길하고, 불쾌했다.
“상관없어. 제거해버리면 그뿐이지.”
은결의 옆에서 쿠로사카가 짤막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순식간에 결계를 펼치고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쿵, 하고 그녀의 발바닥에 찍힌 아스팔트가 무거운 소리를 냈다. 은결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무거웠다.
*그렇습니다! 이 글의 연재는 매우 성실하죠! 그러니 응원을! 그건 그렇고, 플롯이 대충 다 정해진 덕분에 연재에는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다만 정해져있다고 강행돌파 하는 것 보다 속에서 품고 숙성시키면 같은 플롯이라도 더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시 나흘에 한화가 좋지 않은가 싶기도. 큼.
*동전의 가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 주신 분이 있습니다. 저는 손때 많이 묻으면 안 쳐준다고 알았는데, 아니라고 하시는 군요.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행히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내쉬는 영화에선 그냥 괴팍한 천재로 나오는데 전기에선 완전 씹빠빠죠. 하여간 내쉬 평형은 이 글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ㅋ~
*길가메시 서사시의 핵심을 지적해 주신 분이 계시는군요. 그게 백미죠. 덜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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