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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92화 (92/300)

#   92-희망을 위한 찬가 - 길가메시와 근친금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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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시간이다. 자습 시간 개시까지 한 이십 여분 정도는 자유시간이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들어온 은결은 책상에 앉아 창문 너머로 운동장을 바라봤다.

무의미하게 열린 동공이 운동장을 담고 있는 은결의 뇌리는, 다쳐도 금방 낫는다는 것도 꽤 고역이라는 사실을 오랜만에 곱씹고 있었다. 어제 점심때 쿠로사카에게 얻어맞은 눈의 멍은 저녁 즈음 순찰하며 기도 많이 운용하고 한 지라 자정 이전에 깨끗하게 나았지만, 인간인 이상 그렇게 빨리 나을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인 그의 동생과 친구들을 생각하면 그게 반가운 노릇일 수는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얼굴에 간단한 최면을 걸어 놓아서 해결은 해둔 상태였다. 한 며칠은 이렇게 생활해야 할 것이다. 최면을 남용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이런 때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이 나서 은결은 어금니 쪽의 역장을 살폈다. 평소처럼 튼튼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어금니가 아직 다 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지만 별 문제는 없었다. 그 동안은 역장이 계속 수고를 해 주어야 할 것이다. 효과가 좋아서 지난번에도 괜히 치과에 가서 비싼 돈을 날린 게 아닌가 싶은 기분도 들었다.

“여어, 은결!”

익숙한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결 득의양양한 톤으로 등 뒤에서 들렸다. 은결은 지루하지만 반가운 낮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성이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감탄의 표정을 하고 그의 뒤를 따르는 동물원 삼총사가 있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길래 그렇게 행차신가? 뭐, 로또에라도 걸렸냐?”

은결이 대뜸 로또를 들고 나오자 민성은 거만하던 자세를 약간 줄이고, 그러나 여전히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다가와서는 말했다.

“큼, 국민 계돈 로또에야 비할까마는-”

그리고 주머니를 뒤지더니 십원짜리를 하나 꺼내 은결에게 내밀어 보였다. 본래의 찬연한 구리 빛 광택을 잃은 꾀죄죄한 황색 동전은 틀림없이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십 원짜리 동전이다.

“짜잔! 어떠냐! 70년도 십 원짜리다! 후후, 이걸 경매 부처 팔면 50만원 까지 받을 수 있다는 거 아니겠냐! 잘 팔리면 한턱 내지.”

“헤- 정말? 어디 좀 보자.”

어제 저녁에 뭘 잘못 먹기라도 했나, 하고 민성과 그가 내미는 동전을 바라보던 은결은 그 말을 듣고서야 놀란 표정을 했다. 동전이 거래의 대상이 되곤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50만원이라니! TV와 별로 친하지 않은 은결로서는 접하기 어려운 정보였다.

“후후. 감을 생각 하지 마라.”

민성은 동물원 삼총사와 완전히 같은 태도의 변화를 보인 은결의 모습에 만족한 듯 오만한 미소와 더불어 동전을 넘겼다. 은결은 그것을 가져가 탐구하듯 자세히 살폈다. 1970년이란 년도가 엷게 닳긴 해도 분명히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그것이 있음으로서, 10원은 당장 오만배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어쩐지 기분이 아득했다. 그는 혼잣말을 흘리듯 말했다.

“그냥 보통 꾀죄죄한 십 원인데... 우표도 그렇고, 참 신기하지. 하나는 그 자체가 교환가치를 표징하고, 하나는 기껏해야 대량 복제된 그림조각일 뿐인데... 이런걸 보면 역시 아우라의 해체란 반쪽짜리 진실인 거 같아.”

“아우라의 해체?”

“아, 나 들어본 적 있어. 학원에서 논술 공부하면서 읽었어. 그 이름이 벤... 뭐였던 거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네.”

민성의 아리송함에 신이 나서 끼어든 여우가 시원하게 끝맺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아리송하게 말 꼬리를 흐렸다. 동전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은결은 답했다.

“벤야민이지.”

“아, 그래! 벤야민이다. 벤야민!”

그리고 여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그로서 주변에서는 다시 침묵하곤 은결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뭔가 다른 말이 이어져야 하지 않느냐는 시선들이다. 익숙해짐을 넘어서 이제는 즐기게 된 모양이다. 하기야, 논술에도 도움이 되고, 익숙해지면 나름대로 유익한 이야기다. 은결은 일행의 시선에 다소, 부담을 느끼며, 흠. 하고 숨을 고르고는 말했다.

“아우라의 붕괴란 기술이 발달해 사물을 쉽게 복제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 기존의 예술작품이 지니고 있는 일회적인 현존성이 붕괴되면서 그것들이 지니던 어떤 고귀한 분위기도 함께 박살나게 될 거라는 말이지. 그를 통해 벤야민은 예술의 민주화가 가능해지리라 판단했고.”

그 말을 하며, 은결은 베블린의 유한계급론을 생각했다. 과시소비. 소비를 통해 부를 증명함으로서 이루어지는 상징기호에 대한 소비. 아우라란, 사실 그런 상징기호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헤- 그런데 그게 이 동전이란 무슨 상관이야? 동전이 예술작품도 아니고.”

민성은 다시 물었다. 은결은 기계적으로 답했다.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으음, 화폐는 복제되는 사물의 가장 대표적인 예잖아. 그 자체가 사용가치를 배제한 교환가치의 상징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동전이 수집과 경매의 대상이 됨으로서 특정한 동전의 경우는 그 특수성을 통해 예술작품이 지니는 것과 흡사한 일종의 ‘아우라’를 지니잖아. 그러니 벤야민의 주장은 반쪽짜리 진실이었다, 라는 거지.”

그 말을 하며 은결이 생각하고 있던 것은 수요, 그리고 공급의 문제다. 교환 가치와 사용가치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 지금 세상은 수요와 공급의 논리로 돌아갈 뿐, 사물의 본래적 가치 따위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생각. ‘의미’를 통한 수요, 혹은 수요라는 ‘의미’. 그리고 공급이라는 ‘의미’. 그것이 의미가 세상에 작용되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다. 그래서 십 원짜리 동전도 오만배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 외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거나 무의미해진다.

“아. 그런거군.”

그 말이 끝나자 민성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물원 삼총사도 뒤에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게 마찬가지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은결이 희미하게 웃으며 십 원짜리를 그에게 돌려줬다.

“잘 봤어. 잘 팔리면 한 턱 내는 거다.”

“껄껄. 그야 물론이지.”

그때 교실 뒷문이 열리며, 맑은 일본어가 들려왔다. 민성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고개를 돌렸다. 은결은 그 모습을 보고 파블로프의 개를 떠올렸다. 그는 얼른 쿠로사카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은결 일당이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어차피 그녀가 은결 옆자리란걸 생각하면 비생산적인 짓이다. 어지간히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여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은결 일당이 있는 곳 까지 끌려온 온 그녀는 은결의 얼굴을 보고, 쿡, 하고 아름답게 웃었고, 그녀에게 한마디 해 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은결의 고뇌가 끝나기도 전에 민성이 얼른 십 원짜리를 꺼내 그녀에게 은결에게 했던 것과 같이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쿠로사카는 환히 웃으며 일어로 답했고, 그 번역은 물론 은결의 몫이었는데,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은결의 얼굴이 기묘하게 찡그러졌다.

“에, 표정이 왜 그래? 쿠로사카 표정은 괜찮은데?”

민성이 은결의 표정에서 불길함을 읽고 물었다.

“...으음, 자기도 그거 안다고 하는데. 자주 가는 식당에 있던 신문에서 봤덴다. 그런데 보관상태가 안 좋으면 그냥 십 원이라는데?”

“에?”

민성이 얼어붙은 태도로, 은결에게 다시 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은결은 죄지은 것도 없는데 미안함을 느끼며, 다시 정보를 전달했다.

“그러니까, 그거 그냥 십 원이래.”

“푸하하하핫! 웬일로 니가 대박을 터뜨렸나 했더니, 결국 이 꼴이구만. 으하하하핫!!”

은결이 잔인하게 선언하자, 고릴라가 웃었고, 이어 늑대와 여우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민성은 멍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엊저녁부터 그 십원 동전을 팔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창창하게 세웠는데, 그게 한방에 허물어지니 심적 타격이 컸던 모양이다. 돈 문제로 나름대로 고민이 많은 은결이기에 웃기긴 했지만 그 모습을 차마 웃음거리로 삼을 수는 없었다. 민성의 고통 가운데 일부 정도는 공유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안쓰러웠던지, 쿠로사카가 민성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드러운, 정말 그린 듯한 미소로 “간밧떼네.”라고 말했고, 은결이 그 뜻이 ‘힘내라’라는 거라고 해석해 줬다. 그 말을 듣고, 민성은 그녀의 미소를 오십 만원에 산 셈 치기로 했다. 물론, 그렇게 쳐도 가슴 한 구석은 휑하니 썰렁 했지만 말이다.

아침 자습 시간이다. 은결은 사프 끝을 물고, 턱을 괸 채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과, 구름과, 산과 학교와 도시의 겹친 모습이 멀리까지 보인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은 그들 영상 중 그 어느 것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은결이 줄곧 생각하던 것은 오늘 아침에 보았던 십 원 동전. 그 동전이 본래의 교환가치를 넘어서는 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의미에 대한, 해석에 대한 생각이기도 했다. 무차별적인 복제에서 만들어진 동전. 그것에서도 결국 인간은 의미를 갈구하고, 부여한다. 다른 무수한 십 원과 다를 것이 없을 텐데도, 다름을 지어내어, 그 다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통해 가치를 만들어 낸다. 그 의미부여, 그 범주화, 그 차별화, 그 타자화. 거기서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가치판단- 사람은 도무지 ‘의미’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것이 인간. 기호를 벗어날 수 없는 해석자의 본령. 그렇다면-

은결은 창문에서 시선을 돌려 제 손을 빤히 바라봤다. 그 옆에서 쿠로사카가 은결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 담긴 감정이 깊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 감정의 정체는 읽기 어려운 모호한 시선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느라 그 시선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리고 종이 쳤다. 아침 자습 시간은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다. 곧 선생님이 오실 것이다. 은결은 생각을 거두었다. 쿠로사카도 시선을 거두었다.

*디스피어 님의 응원에 감사를~ 뭐 전에도 말했듯 출판은 별로 욕심이 없지만 독자 수나 늘어줬음 합니다. 누구 100화 기념으로 그림이라도 한 장 그려주실 분? 뭐 저는 이런 쪽에 더 관심이 있군요. 슬슬 100화 기념 인기투표도 준비해야 하겠고. 큼.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의 접점이 슬슬 드러나고 있군요. 슬슬 게임 이론도 집어넣을 준비를 해야 할 테고... 아, 복잡합니다.

*이번 챕터는 소제목이 예고하듯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어보시고 읽는 편이 훨씬 더 즐거울 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초의 신화 길가메시 서사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재미있는 글이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길가메시와 근친상간...으로 읽으신 분은 잘못 읽은 게 아닙니다. 수정했거든요. 근친상간은 아무래도 너무 강렬하다 싶어 좀 더 온건한 근친금기로 바꿨습니다.

*한글날입니다. 제가 서브라임의 원래 제목을 ‘숭고미’로 하려다가 또 제목 때문에 배척 당할까봐 영문제목 서브라임으로 바꿔서 사용했는데, 그런 거 생각하면 다소 회한이... 그래도 ‘숭고미’를 제목으로 하긴 역시- 음.

*은결과 수행의 비교는 사용할 수 있는 기의 총량을 기준으로 합니다. 그리고 기호를 다루는 부분은 석년의 수행을 은결이 능가합니다. 수행은 체계를 만들어야 했고, 은결은 체계를 만든 이에게 배웠으니. 전투력은 전투테크닉에서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 그리고 수행이 대단한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자의 돌에 가장 가까이 갔기 때문이죠. 그의 강함은 그 성과의 부산물로 봐야 합니다. 나중에 다루어질 겁니다. 음.

*하여간 즐겁게 즐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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