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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91화 (91/300)

#   91-희망을 위한 찬가 - 길가메시와 근친금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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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왜 그래?”

미래는 걱정스런 얼굴로 은결에게 물었다. 자전거 주차장으로 향하던 은결은 괜히 시커먼 눈두덩을 손으로 쓸다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알면 좋겠다.”

쿠로사카의 공격은 무섭고 강렬했다. 반쯤은 살기도 담겼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키리야미의 손잡이에 한방 맞았다.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놓은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더해 은결의 눈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쿠로사카는 냉기가 풀풀 날리는 태도로,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옥상에서 먼저 내려가 버렸다. 누가 봤다면 은결이 무슨 몹쓸 짓이라도 한 줄 알았을 것이다.

“무슨 소리야?”

하지만 맥락을 모르는 미래가 그 대답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는 약간 얼굴을 찌푸리며 무슨 말인지 다시 물어봤다. 하지만 그때 두 사람의 뒤에서 밝고 높은 톤의 일본어가 들려왔다.

“(아! 은결이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생글생글 웃는 낮의 미소녀, 쿠로사카가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옆을 스쳐 앞으로 나선 다음 몸을 빙글 돌려 두 사람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린 듯이 부드러운 동작이라, 미래는 속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오늘도 사이가 좋네요.)”

은결은 무의식중에 뒤로 조금 물러섰다. 너무 상큼해서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어두운 사람이 아니지만, 물론 저렇게 발랄한 사람인 것도 아니다. 철혈, 냉혹, 무정이란 단어가 잘 어울리는 강철의 장미랄까. 미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살짝 은결의 옆구리를 찌르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물었다. 은결이 껄끄러운 표정으로 해석해서 전달했고, 미래는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물론이죠!”라고 답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쿠로사카는 한층 맑은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 오른손을 높게 들어 “(그럼 내일봐요!)”하는 말을 남기고 두 사람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녀의 보기 좋은 팔목에서 짤랑, 하고 팔찌가 아래로 조금 내려갔다. 은결은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주차장으로 향하려는데 미래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왜 그러고 있어?”

“...저 팔찌 아무리 봐도 오빠거랑 같은 거 같아서.”

미래의 불퉁한 말을 듣자마자 ‘국소결계해제술이다!’ 라는 말이 은결의 머리속에서 징징 울렸다. 원래 자신에게는 최면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알아볼 수 없었지만, 미래가 하는 말을 듣자니 자신이 정성을 다해 새겨 넣은 술식이 지금은 무용지물이 된 모양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원래 팔찌의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쿠로사카가 미래 앞에 와서 일부러 팔목을 드러내 보인 것은 일종의 시위이고, 그녀는 최면결계 자체가 무엇을 위해 필요했던지 꿰뚫어 보고 있다는 말로 파악해도 별 무리가 없을 터였다.

“오빠, 왜 그래? 어디 아파?”

미래는 은결이 갑자기 주저앉자 한층 걱정스런 안색으로 은결의 등을 쓸었다. 동생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은결은 앞으로 미래가 집에 있는 페키니즈 인형에 얼마나 화풀이를 하는 꼴을 봐야할지, 덕분에 세탁거리는 얼마나 늘어날지 걱정해야 했다.

“후후...”

쿠로사카는 상쾌하게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은결의 무너지는 표정을 보는 것은 유쾌했다. 남이 고생해서 익힌 기술을 그렇게 간단히 해냈으니 그 정도는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다. 좀 어른스럽지 못하다 싶긴 했지만, 지금은 신사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 후배가 있어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의 일탈은 괜찮으리라 싶었다.

처음 이 곳에 올 때는 미즈하라 아저씨의 밑에서 은결 아버지의 글을 읽기 위해 한글을 공부했던 것 외에는 아는 바가 없어서 대화에 자신이 없었고, 그래서 이런 생활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다. 때문에 일주일 안에 일을 처리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고. 하지만 뜻하지 않게 체류기간이 길어지다보니 의외로, 정말 의외로, 이 곳 생활도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때때로 자신을 엄습하는 명료한 쓸쓸함은 골수에 사무치는 바가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결국 사람이 사는 공간에서, 사람과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한에는 큰 문제가 될 리 없었다. 이곳이 자신을 일부러 배척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여기서의 인간관계는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을지언정, 자신이 올려다보아야 하는 사람과 자신이 내려다보아야 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았다.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의외로 쓸쓸할지도.’

저무는 해를 가는 눈으로 바라보며 쿠로사카는 그렇게 생각했고 , 곧 볼을 붉히며 그 생각을 후회했다. 그리고,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밝은 미소로 풀어져 있던 그녀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

‘어느새...’

쿠로사카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며 자세를 잡았다. 연약한 스커트가 다소 불안했다. 전투를 하며 치마를 입어본적이 없었던 탓이다. 위험한 싸움은 언제나 밤이었고, 위험하지 않은 싸움은 언제나 준비할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장이 어쨌든 그녀의 기수식은 언제나처럼 완벽했다. 그녀의 주변으로 단절공간이 형성됐다. 누구라도 그녀의 검격 안으로 들어선다면 베일 것이다. 주변의 공간이 현실성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그녀의 주변 건물 지붕에서, 입구에서, 골목의 모서리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쿠로사카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나타난 사람의 형상을 한 것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 응당 지녀야할 것들이 그것들에게서는 결여되어 있었다. 고렘일까? 그렇지 않다면 식신? 좀비 내지는 강시? 가능성은 여럿 있었다. 그러나 쿠로사카는 그 가능성들 사이에서 망설이지 않았다. 그것들이 고렘이거나, 강시이거나, 식신이거나, 좀비이거나 상관없이 그것들의 목표는 자신이었고, 그가 의미하는 바는 저것들이 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적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교육받지 않았다.

쿠로사카가 술식을 전개했다. 주변으로 넓은 공간에 걸쳐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꿍! 하는 낮은 소리가 나며 아스팔트 바닥에 금이 가며 내려앉았다. 쿠로사카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리고, 사람의 모습을 한 사람 아닌 것이 두 동강이 나며 떨어졌고, 동시에 그것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 멀리 튕겨 나가며 박살이 났다. 그제서야 사라졌던 쿠로사카의 모습이 드러났다.

“유쾌한 시간이 되겠군.”

몸 상태는 좋았다. 이런 허수아비나마 마음껏 검을 휘둘러보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다. 키리야미의 손잡이를 쥔 쿠로사카의 손으로 가일층 힘이 가해졌다. 다시금 꿍! 하는 낮은 소리가 났고, 쿠로사카의 모습이 사라졌고, 사람 형상의 무언가가 조각났고, 거기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사람 모습의 무언가가 화염에 휩싸이더니 이내 재가 되었다. 그 바로 앞에 쿠로사카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만족스런 미소로 충만해 있었다. 이 기술을 이렇게 간단히 전투 중에 사용해서 성공시키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던 탓이다. 기의 흐름, 육체의 반응, 술식의 전개. 모두 최상이었다. 요즘은 정말로 몸 상태가 좋았다.

“아함.”

은결은 허공에서 하품을 했다. 발아래 바쁘게 오다니는 불빛들의 모습은 휘황하고 복잡했지만, 워낙 오래 봐온 터라 이제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것들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반성이거나 회한일 때 정도였다.

“그나저나... 오늘도 허탕인가.”

자정은 멀지 않았지만 오늘도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현상이 인위적이란 것은 명백했다. 어떤 형상으로, 어떻게 나타날 예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충실히 대비해 둬야 할 것이다. 실상 정말로 위험했던 것은 사념체를 모은 거대한 덩어리가 아니라 그것을 조종하던 녀석이긴 했지만, 사념체도 충분히 많이 모인다면 틀림없이 강대한 적이 된다. 8년 전 은결의 아버지 수행이 그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증명했다. 그렇게 모여들었던 사념체의 덩어리는 은결의 몸을 차지했을 때의 푸른 이빨조차 아득히 초월할 만큼 강대했고, 그래서 수행은 그 녀석을 쓰러뜨리기 위해 일신에 지니고 있던 모든 힘을 잃어야만 했다.

“......”

혹시 이 녀석들일지도 모른다, 라는 이야기가 은결의 가슴 속을 뜨겁게 지폈다. 사념체를 모아 이용하는 기술을 지닌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념체를 모으는 것이라거나, 만월의 그 날 보았던, 광대한 범위에 걸친 역장을 한갓 은빛 패 하나를 통해 실행하고 조정하는 기술을 볼 때, 8년 전에 있었던 일에 그들이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패배’이외에는--- 은결은 주먹을 꽉 쥐어 마음을 다스렸고, 다시 발아래를 바라봤다. 휘황한 도시의 모습. ‘죽음’으로서 지켜야할 사람의 터전이다. ‘죽음으로서’ 은결은 그 말이 무척 허망하다고 느꼈고, 무의식중에 꽉 쥔 주먹을 슬며시 풀었다. 무력감이 느껴졌다.

-뭐하고 있어?

그리고 일본어가 들려왔다. 쿠로사카였다. 은결은 허망함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쓸쓸하게 답했다.

“아니, 그냥 도시 구경이나 하고 있었지.”

-흐응.

건조한 목소리 이면에 느껴지는 배려가 고마웠다. 그녀는 오늘도 나름대로 다 돌아보고 이렇게 연락하는 것이리라. 이왕 배려해 준다면 미래 앞에서 본래 모습의 팔찌를 보인다거나, 괜히 사람 눈에 멍들게 하는 것부터 그만둬 줬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은결은 다소 정감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싸웠던 건 괜찮아?”

은결도 하교 즈음에 갑자기 나타난 기이한 힘의 낌새를 알아챘다. 그러나 쿠로사카가 도움을 거절했기 때문에 싸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대단한 싸움은 아니었어. 마음껏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는 걸 제하면 너와 싸우는 것 보다 훨씬 못했지. 그냥 짚단 베기 비슷한 거였으니까. 어디서 보낸건진 모르겠지만 정찰 목적이었던 모양이야. 문제는 ‘어디서’를 모른다는데 있겠지. 나머진 아무것도 아냐.

쿠로사카의 이야기를 듣고 은결은 장난기가 동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정찰 목적이라. 그러고보니, 너도 나한테 그런 적이 있지?”

-...으음, 이만 끊지.

"어, 어이!"

대화가 불리한 쪽으로 흘러간다 싶자 그렇게 연락을 끊은 쿠로사카는 은결이 불러도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은결은 대답 없는 팔찌를 바라보며, 쿠로사카가 괜히 까칠하다고 생각하고 피식 웃었고, 답답하게 도시를 바라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추천해 주신 jin마스터님께 감사의 마음을 보냅니다. 저도 다소 허망한 기분에 휩싸이곤 합니다만, 열심히 쓰겠습니다.

*은결은 같은 나이 때의 수행과 비교해 70% 정도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당시 수행은 대학민국을 통틀어 열손에 들어가는 강자였고, 대학에 들어갈 즈음이 되어 대한민국에서 제일 강했고, 대학 자퇴 때쯤이 되어 세계 최강이 되었고, 힘을 잃기 전에는 두 번째 강한 사람과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마술사 은결은 잘 모르겠네요. 뭐 동명이인이 있을수도 있겠죠. 알렉 볼드윈 같은 경우는 이름을 누구 모델로 하지도 않았는데 완벽한 동명이인이 있었으니. 무의식의 발현이었을까요? 핫핫핫. 참고로 이 글의 은결은 '오래된 정원'에서 따온 겝니다.

*즐거운 추석 보내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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