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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90화 (90/300)

#   90-희망을 위한 찬가 - 열쇠(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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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세연의 인사를 받으며 그녀의 집을 뒤로했다. 그녀의 얼굴은 마지막까지 아쉬워하는 빛으로 가득했다. 담장이 길게 늘어선 길을 빠져나와 버스에 올라탄 은결은 빈 좌석에 앉아 창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유리창에 투영된 자신의 반투명한 얼굴 모습이 빛이 물든 도심의 모습과 겹쳐졌다. 화려한 빛과 무감동한 눈빛이 한 자리에 있는 모습은 쓸쓸했다. 그 가운데서 은결은 오늘 푸른 이빨과 있었던 일을, 그 놈을 세연으로 착각하고 말았던 일을 생각했다. 그의 얼굴이 낮게 찌푸려졌다.

‘나도 참... 한심하군.’

세연을 세연이라고 너무 쉽게 단정하고 말았다. 분명히 푸른 이빨일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정관념 때문이다. 사람의 인식은 흔히 대략적인 모델을 만들어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그 모델에 맞는 것을 취하고 모델에 맞지 않는 것을 버리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어느 나라 사람이니까 어떠할 것이다. 어느 대학 출신이니까 어떠할 것이다. 어느 지역 출신이니까 어떠할 것이다. 어떤 피부색이니까 어떠할 것이다. 경험, 혹은 본능이 쌓은 대상의 경향성들에 대한 무반성적 지각. 언어부터 편견까지, 모두 그러하다.

이 모델을 통한 세상의 판단은 본능적이다. 사람의 사람에 대한 인상이 처음 만나는 짧은 순간에, 아무 것도 모르는 그 때에 대게 결정되고 만다는 것은 이 점에 대한 가장 즉각적인 증명이다. 대체 처음 만나 1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에 무엇을 상대방에 대해 알 수 있다고 그 인상을 결정하고, 유지한단 말인가? 그것은 넌센스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인간에게 가혹했고, 그래서 숙고하는 인간보다 틀린 판단이라도 재빠르게 행동하는 이들이 살아남았다. 뱀이 다가온다면, 독뱀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보다 그냥 도망가는 쪽이 생존율이 더 높은 것은 자명하니까. 진화란 그런 것이다. 편견이란, 정보의 질과 판단의 신속성 사이에서 태어난 기형아 같은 것이다. 되도록 빠른 시간에 많은 정보를 얻어 판단하기 위한 발악.

그러니 인간이 해석하고, 해석하고, 다시 해석하는, 모델을 포기할 수 없는 가련한 존재인 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를 진정으로 깨닫기를 꿈꿀 수 없는 미천한 존재인 한, 이 넌센스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아득함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은결은 한숨을 쉬었다. 가슴이 저리다.

칠월을 향하는 태양빛은 이미 뜨거웠다. 쿠로사카의 검격이 그 햇살마저 가르며 은결을 향해 쇄도했다. 은결은 속으로 숫자를 세며 그 검격과 자신의 거리를 가늠했다. 그가 속으로 셋! 하고 외치는 순간, 푸른 힘이 어른거리는 키리야미의 검날이 은결의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은결은 한 발자국을 움직였고, 그것으로 그 검격의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남과 동시에 쿠로사카의 등 뒤를 노릴 수 있게 됐다.

‘위험!’

당연히 은결이 역장을 펼쳐 공격을 막아 내리라 생각했던 쿠로사카에게 이것은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전개였다. 목 뒤에서 서늘하게 피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쿠로사카는 얼른 몸을 돌려 이어질 은결의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마하 수준의 속도에서 발생하는 관성을 그렇게 쉽게 처리할 수 있을 리는 없다. 꼼짝없이 패배하게 생겼다.

그때 쿠로사카의 뇌리로 한 가지 기술이 떠올랐다. 틀림없이 그 술법이라면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문제는 굉장한 고등기술이라 이런 상황에서 사용해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요즘은 어쩐지 몸의 컨디션도 좋고, 사용해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패배가 결정되어 있다면 이 기술을 사용해서 어차피 잃는 것은 없었다.

은결의 손이 쿠로사카의 새하얀 목덜미를 향해 날고 있었다. 검고 긴 그녀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그는 그게 꽤 볼만한 모습이란, 날벼락 맞을 생각을 하며 자신의 승리를 자신했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이 뜨거워졌다. 마하에 준하는 속도에서 전개되는 싸움에서 어지간한 온도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안 된다. 마찰열만 해도 굉장한 수준이니까. 그렇지만, 이 열기는 어지간한 온도가 아니었다. 쿠로사카의 등 뒤로 빛이 이지러지며 강렬한 아지랑이가 발생했다. 이건 철이라도 단숨에 녹여버릴 고열이었다.

“크읏!”

계속 공격을 하다간 교복을 홀라당 태워먹을 우려가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쿠로사카는 그 열기가 발생함과 동시에 있을 수 없는 부드러움으로 동작을 연결하며 이쪽을 향해 내쳐오고 있었다. 그녀의 방금 공격이 그녀 전력의 1/3이하가 아니었다면 생각하기 힘든 동작이었다. 마치 관성을 무시한 것 같은 동작이었으니까. 은결은 위기감을 느끼곤 얼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두 손을 들었다.

“내가졌어.”

“...흠. 너무 쉽게 인정하는군.”

쿠로사카는 불쾌한 얼굴로 검을 수납했다. 방금 전까지 완전히 승기를 잡고 있었고, 평소라면 틀림없이 그의 승리였을 것임에도, 은결은 아무런 집착도 없이 패배를 인정했다. 그건 마치 그가 전력을 다해 자신을 상대하지 않았다고 웅변하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그런 쿠로사카의 불쾌함을 달래는 것 처럼, 은결이 희미한 미소와 더불어 말했다.

“갑자기 그런 엄청난 열량을 내뿜는데다 관성도 무시하고 공격해 오는데 당할 재간이 있을라고. 대체 무슨 묘기를 부린 거야?”

“술법을 하나 사용했을 뿐이야.”

“헤, 무슨 술법이길래 그런 묘기가 다 가능하냐.”

“운동 에너지를 열에너지로 전환시켜 등 뒤로 배출했지.”

“그렇군. 그래서 관성을 무시한 것처럼 공격이 가능했군. 관성이 무시된 게 아니라 네 몸 전체에 걸려 있던 운동에너지가 열에너지로 전환되면서 몸이 자유로워진 거야.”

은결은 손바닥을 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도 비슷한 술법을 때론 사용하곤 하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바닥을 부숴먹지 않기 위해 여분의 에너지를 해소하는 진법을 역장에 섞어 사용하는걸 말한다. 그 술법은 전투 전에 미리 작성해 필요할 때 꺼내쓰는 방식을 취하는데, 두 번이 한계다. 물론 쿠로사카의 기술보다는 훨씬 수준이 낮다. 에너지를 단순히 해소하는 것과 열에너지로 재활용하는 것 사이의 격차는 큰 것이고, 그녀는 저장해서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술식을 작성하는 것이니까.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나도 오늘까지 한 번도 성공해 본적이 없었어. 운이 좋았지. 식이 복잡해서 이런 전투 가운데 사용하기는 힘들었으니까. 오늘 최초로 성공한 거야. 요즘 몸이 가볍더니, 이런 것도 다 성공시키는군.”

쿠로사카가 만족스런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의 그 만들어낸 미소를 제하면 거의 보기 힘든 그윽한 미소였다.

“잘됐네. 그렇지 않아도 오늘내일 하면서 노심초사 순찰하고 있었는데, 네가 그런 기술을 성공시킬 만큼 컨디션이 좋다면 나로선 반가운 일이지.”

“으흠.”

은결이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며 웃자, 쿠로사카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서 은결은 허공에 주먹을 뿌렸다. 권투 선수가 잽을 연습하는 것 처럼 날카로운 동작이었다. 쿠로사카가 왠 달밤의 체조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해?”

“네가 했던거. 나도 그런 거 비슷한 걸 하나 알고 있거든 술식을 좀 조합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은결의 간결한 대답에 쿠로사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사용한 기술은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을 통틀어도 이 기술을 능숙하게 소화해낼 만한 사람은 한줌밖에 되지 않는다. 모든 술법이 기호를 통해 이루어지는 한, 은결의 술법에 대한 감각이 대단할 것은 인정하지만, 이것은 이세 고유의 기호로 이루어지는 복합 술법이다.

“흥. 무익한...”

“오오, 된다.”

쿠로사카의 충고를 끊어내며 은결이 말했다. 그의 주먹이 멈추는 곳에서부터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느냐, 과연 적에게 유효할 만큼 높은 온도를 발생시킬 수 있느냐, 이런 것은 모르겠지만 일단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은결이 해결했다는 말이다. 나머지 부분들은 은결이 숙련도를 올리면 자연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

쿠로사카는 저 술식을 익히기 위해 미즈하라 밑에서 했던 고생의 면면들을 떠올렸다. 그저 암담했다. 그런데 은결은... 그것은 은결이 손을 궁극기호로 사용하는, 인간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학파에 속하기 때문인 걸까? 특정한 신에 기대, 특정한 신의 속성에 따라 자신의 방법을 결정하지 않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술법을 짜 자신의 길을 가는? 쿠로사카는 짧은 시간 동안 그런 생각을 해 봤다. 그렇지만 역시나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싶었다. 다소 회한에 찬 표정을 하고 있는 쿠로사카에게 은결이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다시 대련하자.”

쿠로사카는 허리춤의 키리야미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얼른 은결은 뒤로 물러났다. 그는 별로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봉인 술식 해체도 해야 하고, 나름대로 할 일이 많은 몸이었다. 언제까지 대련에 목매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에, 내가 졌다니까.”

“또 하자.”

그러나 은결의 거절도 무의미하게, 쿠로사카는 성큼 은결에게 다가가며 요구했다. 위압적인데 더해 좀 노기도 섞여 있는 듯한 태도였다. 은결은 자기가 무슨 잘못을 하기라도 했나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노기를 돋울만한 일은 한 적이 없다 싶었다. 은결은 역시 여자는 알기 어렵다고 속으로 한탄하며, 위축된 어깨와 더불어 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알았어.”

칠월을 향하는 햇살이 뜨겁다. 성원 고등학교의 옥상에서는 한 층 더.

*서브라임(sublime)이라는 소설을 새로 연재하게 됐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몰라도 제게 있어서는 아주 혁명적인 글입니다. 무엇보다 취향의 억제를 목적으로 하는 글인지라. 뭐 그래도 일단 주 연재는 이 글입니다.

*희망을 위한 찬가 선작 5000이상을 달성하는 게 소소한 목표인데 3000을 넘기니 상승 속도가 낮아지는군요. 좀 유감. 성원을 합시다~

*90화입니다. 정말로 육 개월에 90화를 달성했군요. 이 글의 시작이 4월 4일이었으니. 100화 기념으로 인기투표라도 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왠지 카미가 일등 할 것 같네요. 껄껄.

*추석 잘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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