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희망을 위한 찬가 - 열쇠(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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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괜찮은건가요?”
“물론이죠.”
다소 어두운 기색으로 세연이 묻자, 안심하라는 뜻의 밝은 미소를 선보이며 은결이 상냥하게 답했다.
“예에...”
하지만 세연은 어쩐 일인지 별로 밝지 못한 안색으로 침대에 걸터앉을 뿐이었다. 은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이 뭔가 말을 잘못했나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되새겨 봐도 굳이 체육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을 뿐, 그녀의 성정에 거슬릴만한 말을 한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거참...’
여자는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은결은 손을 내밀었다. 그걸 보고 세연은 마주 손을 내밀어 은결의 손바닥 위에 팔을 얹었으며 한숨을 짧게 쉬었다. 사실 세연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좀 작은 체육복을 구해서 그걸 입어볼 생각이었는데, 실행해 보기도 전에 박살이 났다. 친우들의 말에 따르자면 그녀가 프로포션이 좋아서 좀 작은 체육복을 입으면 은결을 한 방에 KO시킬 수 있을 거라고 했고, 그 말을 믿고, 다소의 창피함을 견디고 엊저녁에 미리 체육복을 입어보고 거울 앞에서 헤실거려 보기도 했는데 말이다. 더구나 체육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때의 그 밝은 표정이라니!
하지만 세연의 우울한 상념과는 무관하게 곧 은결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팔을 통해 따스한 기운이 그녀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미리 말씀드릴게 있는데-”
“뭐, 뭔가요?”
팔에서 시작된 에너지가 가슴을 향해 뻗었다. 심장을 감싸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나온다던가 하는 일이 완전히 고쳐지지는 않을 지도 모릅니다.”
은결이 약간 주저하는 양으로 말했다. 세연의 반응이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기 때문이다. 그가 예상한 대로 세연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였다.
“그런...!”
세연을 달래기 위래 은결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너무 그렇게 울상 짓지 마세요. 그것 때문에 달리 준비해 온게 있거든요.”
“준비... 요?”
세연은 질렸던 얼굴을 풀고 은결에게 되물었다. 은결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작위적인 미소를 선보이며 말했다.
“별로 어려운건 아니예요. 간단한 호흡법이니까. 아, 하지만 이거 한다는 거 아무한테도 말씀하시면 안돼요.”
“에? 왜요?”
심장에서 상반신 전체를 돌고 하반신을 향해 돌기 시작하는 온기의 흐름을 느끼며 세연은 되물었다. 은결이 답했다.
“이게 불교 쪽 호흡법인데, 저번에 보셨던 그 일본에서 온 무녀에게서 얻은 거거든요. 누군가에게 이 호흡법을 들켜 그 출처가 밝혀지게 되면 저와 그녀가 많이 곤란해지게 됩니다.”
“조, 조심할께요.”
은결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땠다. 그때 그녀의 하반신을 은결의 기가 완전히 일주했다. 세연은 전신에 충만한 어떤 힘과 온기를 느끼며 신비로운 기분에 휩싸였다. 자신의 기를 받아들이고 다소 어리둥절하는 세연을 향해 은결이 부탁했다.
“그리고 잠깐 팔찌 좀.”
세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팔찌를 은결에게 넘겼다. 나무를 깎아 십자가 모양으로 만든 투박한 팔찌다. 혹시라도 이후에 그녀가 호흡을 통해 몸에 사소한 양이라도 기를 쌓게 되면 들킬 우려가 있었다. 은결은 그걸 방어할 겸 역장으로 팔찌에 새겨진 술식을 손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팔찌를 살피던 은결의 눈으로 사소한 이채가 띄었다가, 그의 입가로 미소가 피어오르며 사라졌다.
팔찌에는 수행이 손보고 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술식 전체를 알아보기는 힘든, 별것 아닌 기호의 흔적이었지만 누가 새긴 것인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방을 손보면서 같이 체크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착용하고 있는 것은 은결이 처음 만들어본 호신부니, 수행은 아버지로서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이 사소함에서 느껴지는 아버지의 마음 씀씀이가 그윽하니 기뻤다. 은결은 그 마음을 가슴 한 구석에 담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작업을 하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세연은 그의 팔목에 걸린 팔찌를 보고 물었다.
“그런데... 불교신자이신가 봐요?”
“아, 불교 신자는 아닙니다. 종교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은결은 서둘러 부정했다.
“에? 무신론자... 세요?”
세연이 다소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녀는 은결이 무언가 종교를 가지고 있는줄 알았다. 그렇잖은가. 그는 귀신 비슷한 것과 싸웠으니까. 그녀의 표정을 보고 세연의 속내를 짐작한 은결은 뭐라 답할까 하다가, 자신이 연금술사라는걸 밝히는 것은 다소 껄끄러워 그냥 군소리 없이 본론만 이야기하기로 했다.
“신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있다고 말하는 것만큼 용감한 일이죠. 있다고도, 없다고도 증명할 길이 없으니. 저는 그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겠지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되도록 침묵하는 것. 그것이 올바른 이성의 사용의 제일보라고, 은결은 수행에게 칸트를 배우며 배웠다.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데 왜 염주를...?”
은결이 손을 들어 보이며 답했다.
“이거요? 그저 저희 집과 친한 스님 한 분이 계셨고, 그 분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 불교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에 비해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그 얄팍한함을 통해 그 세계관, 그 사유의 아름다움에 반해버려서 이런 걸 좀 좋아하게 된 정도죠. 별 다른 건 없습니다.”
은결은 도원 스님을 생각하며 답했다. 팔찌를 손보는 일을 그때 끝냈다. 그는 팔찌를 세연에게 넘겼고, 세연은 팔찌를 받아 다시 손목에 차면서 이게 은결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다 싶어 한층 호기심 어른 표정을 하고 물었다.
“헤...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던데.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요?”
무어라 담하면 좋을까? 은결은 자신의 전문영역이 아닌 것에 대한 이야기라 다소 주저주저하다가 어차피 오늘 그녀에게 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 하고 하니 망설일 이유는 없겠다 싶어 이야기를 꺼냈다.
“불교는, ‘공(空)’이라는 단 한 가지 기준을 통해 다른 모든 기준을 무의미하게 하니까요. 그래서 심지어 이런 말도 있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베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고.’ 진정한 깨달음을 위해 무엇에도 얽매여선 안 된다는 거죠. 이론상 불교는 어떤 도그마도, 심지어 불교 그 자체조차도 필요하다면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체계죠. 그래서 어떤 타자, 그러니까 어떤 소외받거나 억압받는 이도 인정하지 않아요. 그것이, 너무나, 아름답지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고... 그게 그런 뜻이었군요. 몰랐어요.”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결이 말하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의 말하는 태도가 어딘가 절실했다. 은결은 다소 열이 오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부처님은 욕계의 도솔천에 계신다고 하지요. 그리고 그곳은 지족천이라고도 하고, 그 뜻을 따르자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이들이 있는 곳이라고 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가장 높은 곳이어야 할 곳, 즉 신적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 타화자재천이 부처님이 거주하시는 곳이 아니라는 점이죠. 물론 부처님의 권능은 굉장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도솔천에 있다는 것이 상징하는 것은 놀라워요. 그것은 부처님은 권능을 지닌 자이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서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 즉 진정한 자유인이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와,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아, 으음...”
세연이 순수하게 감탄한 표정을 보이자 도리어 은결의 얼굴이 붉어졌다. 신자도 아닌 자신이 아는 척 이야기 한 게 부끄러웠던 탓이다. 도원 스님이 들으면 무어라 말하실까. 그 유쾌하게 웃는 목소리가 벌써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럼, 기독교는 어때요?”
쑥스러워 하는 은결을 보고 그녀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은결의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평소에는 듣지 못한 신기한 것이라 낮선 내용이지만 꽤 재밌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기독교를 믿지 않지만 집에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의 비율이 낮지 않아서 다소 관심이 있었다. 그가 불교도가 아니라면 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은결은 한 순간 몸을 경직시켰다가 느릿하게 말을 시작했다.
“기독교는... 또한 좋죠. 구약을 통해 세계종교로서의 틀을 성립해 나가고, 신약에서는 완연한 세계종교가 되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란 기준 앞에서 모든 종류의 구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인류를 형제로 성립시키게 되니까요.”
호의적인 평가였지만 말투는 조금 음울하니 무거웠다. 세연은 혹시 자신이 잘못 말한게 아닌가 싶어 조금 걱정스러웠다.
“다만... 하나님이란 기준은 선명하고, 또한 완강해서, 저처럼 기독교를 믿을 도리가 없는 이들은, 그 하나님이란 통합의 기준을 통해 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타자가 되어버리게 되니, 때때로 그들과 함께할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는 거대한 통합이기보다 타자 양산의 체계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서글픈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죠. 뭐, 종교가 기본적으로 특정한 도그마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건 기독교의 문제라기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어야 한다’고 말하는 불교가 독특한 것으로, 종교일반의 문제이겠습니다마는...”
은결의 고소어린 말을 들으며, 세연은 그의 이 말이 단순한 평가라기보다는, 그의 몸 어딘가에 새겨진, 삶의 흔적 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그는 과거에 지금 말하는 내용과 관련된 것으로 인해 좋지 않은 경험이라도 했었던 것일까?
“그런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불화가 운명적인 것이거나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것은 또 아닌 것 같습니다. 종교인이 아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자신이 믿는 신앙의 원리와 배재되더라도 다른 이들과 부드럽게 지내는 이들도 있으니까요. 원리주의자라면 이런 게 단순히 믿음이 부족한 것이라, 혹은 악마의 굴에서 그들을 구하기 위한 일시적인 위징이라 잘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글쎄요, 결코 믿음이 덜해 보이지 않는 이들 가운데서도 그런 걸 진정으로 성립시키는 이들도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믿는다고 해도 그게 꼭 일률적인 믿음은 아닌지도 모르죠. ‘자연’이라는 단어가 철학자마다 독특한 자기식의 해석을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런 게 가능할까요?”
되묻는 세연의 말이 은결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다소 무거웠다. 은결은 그 분위기를 씻고자 밝은 목소리를 지어내어 말했다.
“불가능할 건 없겠지요. 따지고 보면 기독교 가운데서도 과거에는 그노시즘, 그러니까 영지주의같은 독특한 신앙체계도 있었으니까요. 그들은 성경의 하나님을 부정하고 그 하나님은 세계를 망친 악마로서, 이성을 통해 그 신을 넘어설 때 진정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판단했죠. 물론 이단으로 규정되고 그 믿음의 비교(秘敎)적 전승으로 인해 절멸되었다곤 합니다만, 그렇게 완고해 보이는 기독교의 신앙체계 가운데서도 그런 파격적인 신앙의 형태가 나왔는데, 다른 신앙과 공존하는 체계도 가능할 수 있겠지요.”
은결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말이 공허하다고 여겼다.
“그러면 좋겠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지막 은결의 긴 말에 담긴 공허함을 느끼며, 세연이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고, 은결은 그 미소에 마주 웃어 보이며, 눈동자 끝으로는 아직 씻어내지 못한 감정의 여운을 담고 답했다. 은결은 무의미한 이야기가 다소 길었다고 생각했다.
*초딩 논술 교재로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사용하는 천재의 나라에서 인문학의 위기라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껄껄.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현대에 들어 뇌 연구가 발전하면서 그가 전개한 개념의 많은 부분이 부정되었습니다. 의식, 무의식, 초자아로 구성되는 자아의 구조라거나, 꿈을 꾸는 이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타나토스, 트라우마의 구조 뭐 많이 박살났죠. 그 전에도 정신분석을 통한 트라우마의 극복률이 너무 낮았던 것으로 인해 비판 받았고, 체계 자체가 반증 가능성의 원리에 들어맞지 않는다 하여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무의식이 있다’ 정도 제외하고는 별로 남은게 없죠. 그러니 프로이트 읽고 심리학 공부했다고 하면 진짜 공부한 사람한테 돌 맞습니다. 그러나 현대 인문학에 끼친 영향력이 막대함으로, 읽고 인간의 심리를 알았다고 자랑하거나 써먹을 생각이 아니라면 읽어두는 것도 좋습니다. 프로이트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은 텍스트들을 몽땅 폐기해야 하는가 하는 건 논쟁적이고 어려운 문제라서 말이죠. 너무 많기도 하고. 전부 라캉 같았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손 씼었을테지만. 하여간 그래서 제가 클라우스 때부터 프로이트적인 언급은 거의 없었죠. 클라우스 당시 의식분열에 대한 설명도 실은 모듈 모델에 따른 것으로 프로이트와는 무관합니다. 프로이트가 대중적이라 그걸 빌려 의미해설은 했지만. 큼큼
*곧 추석이네요. 작가에게 성원을 합시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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