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희망을 위한 찬가 - 열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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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벨을 눌렀다. ‘아, 잠시만요.’하는 밝은 세연의 목소리가 금세 돌아왔고, 문은 삐 소리를 내며 잠금을 풀었다. 곧 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다소곳한 모양으로 은결을 안내했다. 초록 정원을 지나 은결은 다소 부담감을 느끼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지난번과 달라진 것이 없는, 넓고 깨끗한 집이다. 은결이 이층으로 올라가려 하자 세연이 제지했다.
“잠깐만요.”
“예?”
“굳이 그렇게 급하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쿠키를 조금 구워둔 게 있거든요.”
싱긋 웃으며 세연이 말했다. 은결은 뒷머리를 긁으며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세연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안쪽 역시 입구와 마찬가지로 정갈하고 깨끗했다. 그 정갈함은 집의 크기와, 두 사람 만 있는 듯한 고요함에 떠밀려 한층 강하게 느껴졌다. 은결은 커다란 벽걸이 TV가 걸려있는 응접실의 소파에 세연의 안내에 따라 앉으며 물었다.
“저, 집에 다른 분들은 안 계시나요?”
“아버지, 할아버지는 일하러 가셨고, 오빠도 볼일이 있어서 나가셨어요. 아주머니는 오늘 쉬는 날이고요.”
“그렇군요...”
세연의 답은 낮았다. 은결은 괜한 질문을 했구나 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 가운데 할머니나 어머니가 들어가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그 역시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내 그녀는 그 분위기를 불식시키듯이 발랄한 낯으로 쟁반에 쿠기와 차 포트를 담아가지고 왔다.
“홍차를 같이 준비했거든요.”
세연은 쟁반을 살짝 들어올리며 말했다. 은결은 감사의 미소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마련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은결이 일어서려 하자 세연이 상체를 살짝 돌리며 “안 돼요.”하고 강하게 말했다. 은결은 “그러시다면...”하고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곧 그 앞에 찻잔이 놓아졌고, 잘 우려낸 홍차가 티포트의 주둥이를 통해 찻잔으로 들어갔다. 담백한 홍색 찻물이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피워냈다. 그녀는 다음 자신의 찻잔에 홍차를 채워 넣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조용히, 쿠키를 들며 홍차를 마셨고, 무의미할지도 모르지만 서로의 어색함을 덜어내기 위한 악의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요한 시간이 교환되었다. 담백한 찻물을 들이킨 다음 생각 외로 잘 구워진 쿠키를 씹은 은결은 놀란 감정이 다소 남은 얼굴 흘깃 세연을 바라봤다. 동작을 절제하고 시간을 리듬감 있게 분배해가며 차를 마시는 그녀의 모습에는 짙은 기품이 어려 있었다. 그로서는 생각하지 못한 세연의 새로운 면모였다. 평소의 조금 머뭇거리는 것 같은 태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자연스러움이 기품과 더불어 그녀에게서 숨결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세연은 아마 꽤 오랫동안, 그것도 엄격한 어른들과 함께 차를 마셔본 모양이다.
‘흐응...’
안락한 시간의 정취가 깊이 있게 흐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무게감 없는 일상적인 사담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어색한 분위기를 재빨리 차단해 내는 것도 좋았다. 은결의 입가로 저절로 작은 미소가 그어졌다. 세연이 말한 것 처럼 급할 이유는 없었고, 이러한 정취는 은결이 쉽게 접하지 못하는 사치다. 조금쯤 이런 사치를 즐겨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의 눈이 교환됐다. 은결은 세연을 관찰하다 눈이 마주친 것이기 때문에 다소 당황했다. 그러나 세연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눈웃음을 되돌리고 다시 홍차를 들이켰을 뿐이다.
‘와...’
이것에 한한 것이겠지만, 그녀는 손님을 대접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맞벌이를 할 필요가 없는 유복한 집안에서라면, 장래 그녀는 아주 좋은 안주인이 되어줄 것이다. 물론 그녀가 달리 사회활동에 대한 의지가 없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러니...’
은결이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 때였다. 딸깍, 하고 세연이 들고 있던 찻잔을 우아하게 내려놓았고, 은결과 눈동자를 마주하며 얼굴 전체로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방금전까지 보여줬던 조용한 미소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조금, 이질감이 느껴졌다.
“크, 큭큭큭...”
그리고 세연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결은 사태를 명료하게 이해했다.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하하하하, 아하하... 아하하하...!”
풍선 입구에서 가늘게 새어나오던 바람 같던 웃음이 이제는 풍선이 폭발하듯 강렬해졌다. 왜 이런 당연한 것을, 뻔한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까? 은결은 속으로 자책했다. 그러나 어떤 강렬한 후회와 반성의 바람이 휘몰아쳐도, 지나간 일에는 소용없는 법이다. 은결의 새빨간 얼굴이 분노로 굳었다.
“...그쯤 해 두시지. 푸른 이빨.”
그리고 푸른 이빨은 웃음을 그쳤다. 그는 오만하게 어깨를 들며 두 팔을 소파 등걸이에 걸쳤다. 그리고 다리를 꼬며 은결을 향해 왼쪽 입술 끝을 오연하게 들어올린 얼굴로 말했다.
“새끼. 욕 듣기 싫다고 염병을 떨길레 고상하게 대접해 줬더니 그것도 싫다네.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랴?”
“...그런 걸 따지는 게 아냐. 세연양인 척 한게 문제지.”
푸른 이빨은 ‘하!’하고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냉혹하게 은결을 깠다.
“병신. 내가 언제 나갑니다, 하고 나가던? 나와서 너한테 꼬박꼬박 인사라도 하던? 무엇보다, 내가 인간이냐? 그리고 니 친구냐? 지가 못 알아봐 놓고 지랄이야. 신의 자아가 일반적인 인간의 것처럼 어떤 경향성에 지속적으로 고착되어 있을 리가 없단 걸 내 정신 그 자체와 접촉해놓고서 눈치 채지 못한 니가 병신이지. 누굴 탓해.”
“으음...”
구구절절이 옳아서 은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특히 두 번이나 푸른 이빨의 정신이 직접 닿았으면서 그것의 아이덴티티가 인간의 것 처럼 바꾸기 힘든 고정성을 지니리라 생각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물자체를 해석하는 선천적 범주가 사람과 다른 것은 제쳐두더라도, 그의 자아를 구성하는 정보량은 압도적인 것이고, 그 정보량으로 인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성격을 원하는 것으로 골라 표현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가장 뛰어난 배우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적인 수단으로 소통한다고 너무 간단히 인간적인 고정관념을 푸른 이빨에게 가져다 대고 말았다.
“깔깔깔. 하여간 그대로 속아 넘어가는 꼬라지가 너 되게 웃기더라. 아, 진짜진짜 재밌었어. 다음에 또 해볼까.”
“실컷 놀았으면 이제 됐잖아. 장난은 그만두고 세연양을 돌려 놔.”
“새끼, 까칠하긴. 뭐 그리 급하게 굴지 말라고. 이 몸이 직접 너를 맞이한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니까. 안 그럼 내가 미쳤다고 칙칙하고 꿀꿀하고 재수 없는 너 같은 새끼 마중하러 일부러 이렇게 나왔을까.”
푸른 이빨의 말에 은결도 거칠었던 태도를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음, 그러니까 니들은 어떻게 부르는지 잘 모르겠는데, 거 같잖은 새끼들이 저주인형 같은 거 만들 때 쓰고 하는 그런 주술방식 알지? 머리카락이나 손톱 같은 거 인형에 넣어서 그 새끼 조종하는, 그런 술법 말야. 요새는 따로 부르는 용어가 정해진 것 같더만.”
“공감주술?”
은결은 되묻듯이 답했다. 푸른 이빨은 현대에 나오면서 사념을 통해 막대한 지식을 얻었을 것이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가 인문학 분야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할 때 그에 대해 안다고 해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아, 그렇게 불렀던 것 같기도 한데... 하여간 뭐라 부르든 알바 없고, 뭐 아마 그런 종류일 거다. 니가 저번에 와서 깨끗하게 청소하고 가긴 청소하고 갔는데, 조금 늦었달까. 그런 방식의 전이가 일어났지.”
“설마...!”
“아마 그 설마가 맞겠지. 나로서도 의외였지. 청소만 하면 깨끗하게 해결될 줄 알았는데 이 계집의 무의식의 일부가 전이적인 방식으로 변질됐다. 그것도 꽤 강력하게.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다만, 드문드문 표면으로 나타날 정도지.”
“망할!”
은결은 이를 갈았다. 형상의 유사함이나 접촉을 통해 존재의 본질이나 힘 같은 것이 전이되는 일은 이쪽 세계에서는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다. 때로 봉인된 귀신이나 요괴와 같은 존재가 이러한 공감주술적인 방식을 통해 자신의 원래 힘을 발휘하게 되기도 한다. 더구나 이는 많은 술법의 근본 원리이기도 하고 기호를 통해 힘을 운행, 구성하는 은결의 방식도 넓게 바라보자면 그러한 공감주술의 한 분파라 판단 못할 것도 없다.
그것은 인간인식의 본질적이고 가장 기초적인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쪽 세계에서 기본적인 원리로서 작동한다. 그렇지만 정신 자체가 그런 방식으로 오염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보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도 모르겠으나, 은결이 아는 한 이런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예상할 수 없었다.
“뭐 앞으로는 조심하는 것 밖에 수가 없지. 앞으로는 쌍욕을 하는데 대해 저항감이 많이 줄어들테고 행동도 어느 정도 그에 맞춰 조정될 가능성이 있겠지...”
그건 다시 말해 그녀의 가치관 자체가 바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은결의 얼굴이 한층 일그러졌다.
“그러니 자칫하면 정말 이 계집애 성질 버리는 수도 있다. 니가 지랄발광을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시간을 들여 일부러 이야기를 해주는 거니 알아서 잘 처리를 해 봐라. 여기까지 와서 처리는 무슨 처리겠나 마는. 클클.”
악의 원흉이 흥, 하고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은결은 한방 먹여주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의 꽉 쥔 주먹은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세연 양의 몸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벌써 한방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깔깔. 그럼 나는 쉬지.”
하지만 은결의 그러한 분에 찬 표정에 푸른이빨은 도리어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눈을 감았다. 세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가, 졸다 깨어난 사람처럼 갑자기 깨어나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녀는 은결과 눈을 마주치곤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아, 응... 자, 잠이 좀 부족했나 봐요. 죄송해요.”
최면을 준비하던 은결은 손을 거뒀다. 푸른 이빨이 물러가며 기억에 충분한 조작을 한 모양이다. 그 더러운 성격을 생각하면 나름대로의 배려라고 못볼 것도 없었지만, 물론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고맙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분함이야 어쨌든, 은결은 그녀의 수줍은 미소에 대해 “아뇨.”하고 부드럽게 받았다.
*은결은 전속력을 내면 마하 2가까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신속한 기동을 위한 탈것은 필요 없습니다. 달리기만 해도 충격파로 수십만 대군을 궤멸시킬 수 있고, 어깨치기의 운동에너지만 해도 어지간한 소설의 소드마스터는 안드로메다일겁니다. 이런 놈이 약하다는 소리나 듣고... 안습. 뭐 세계관의 문제지만요. 그나저나 저도 아우라 사용하는 소드 마스터 사용해 보고 싶네요. 역장 사용하다 아우라 쓰면 많이 답답할거 같긴 합니다만. 이런 클리셰는 어차피 활용이 문제지 사용자체가 질을 결정하는 요소가 될 순 없죠.
*황금가지의 영향력이 막대하긴 합니다만, 책상에 앉아서 문헌만 가지고 연구한 책이라 요새는 인문학 관련 책들 처음 읽는 사람 아니면 그대로 읽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현장연구를 통한 비판도 많이 됐고. 프로이트 읽고 심리학 공부했다고 하면 돌 맞는거 하고 비슷한 거랄까요. 주의요!
*프리드만의 학적 업적이야 케인즈주의를 KO시켰다는 하나로 충분하겠죠. 이 동네 있는 사람답지 않게 글도 잘 쓰는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매력은 없지만. 하여간 앞으로도 종종 거론될지도 모르는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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