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희망을 위한 찬가 - 열쇠(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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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흥흥~”
냉장고를 열어 물을 마시던 진경은 부엌에서 들려오는 콧노래에 미간을 좁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세연이 뭔가 요리를 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달콤한 냄새가 은근하게 퍼져 나왔다. ‘요리 더하기 콧노래’라는 기호가 함축하는 의미가 너무 달콤해서, 진경은 세연에게 무얼 물어봐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가, 주저하면서 물어봤다.
“...친구들이라도 오는 거냐?”
“응! 곧 올거야.”
해맑은 대답이었다. 그 해맑음에 진경은 절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집으로 친구들을 데려오는 것은 드물지만 없는 일은 아니었는데, 이런 행복한 기운을 뿜어내기는 또 처음인 것 같았다. 성격이 너무 착하고, 그것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뒤로 물러나는 경향이 있어 스트레스 좀 받지 않을까 좀 걱정되는 구석이 있었는데, 저런 표정을 하게 해 주는 친구가 생겼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오빠는 표정이 왜 그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이번에는 반대로 세연이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물어왔다. 진경은 얼굴에 감정이 드러난데 스스로를 질책하며 그녀에게 얼버무리며 답했다.
“음. 그럴 일이 좀 있었지.”
지난주 축제를 생각하고 진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비공식 과대항전을 했다가 왕창 깨진 덕분이다. 계산대로라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었는데, 웬 고딩 한 마리가 대박을 터뜨려 가장 비싼 상품-사람 크기에 육박하는 개 인형-을 받아감으로서 실패하게 됐다. 특별히 초빙했던 운동부 친구의 말에 따르자면, 물론 자신의 실패를 덧씌우기 위한 과장이겠지만, 그 소년은 장래 박찬호 이상의 투수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야 어쨌든 그 놈들 술값 댈거 생각하면... 으음.’
간략한 계산만으로도 시야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운동부 그 놈을 초빙하면서 패배에 대한 계산을 안 해두고 예산을 운용했던 때문이다. 아무래도 사비가 많이 깨질 것 같았다. 카오스(비선형) 경제학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진정으로 알게 된 듯한 기분이다.
“저기 오빠, 언제 나가?”
“...눌러 붙어있어 주랴? 걱정 마. 지금 나가니까.”
“에헤헤...”
그리고 ‘땡’소리가 났다. 세연은 얼른 오븐으로 가서 판을 꺼냈다. 그 위에는 노릇하게 잘 구워진 쿠키가 올려져 있었다. 수효는 많지 않았다. 아마 놀러오는 친구의 숫자가 많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오빠를 쫓아내려고까지 하는데 조금 섭섭함을 느꼈지만, 진경은 그것이 물고기가 물 아래로 얼굴을 내리고, 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는 여고생들 나름의 문화이리라 생각하고 납득하기로 했다.
“잘 구워진 것 같은데, 오빠도 하나 먹어 볼래?”
세연이 총총 걸음으로 다가와 쿠키를 하나 내밀었다.
“흠, 그래.”
과자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생이 만든 쿠키를 거절할 정도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븐의 온기가 남아있는 쿠키를 손으로 쥐고 깨물었다. 채 굳어지지 않은 밀가루 반죽이 부드럽게 씹혔다. 안에 깃든 말랑한 초코칩이 녹아들며 풍미를 더했다. 괜찮았다. 먹어본 적은 없지만 슈퍼에서 파는 거반의 쿠키보다는 질이 나으리라 싶었다.
“어때?”
“흠, 이 정도면 상당한걸.”
진경의 평가에 세연은 기뻐하며 쿠키를 작은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준비하는 모양을 보자니 정말 어지간히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진경은 그녀의 모습에 피식,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이곤 몸을 돌렸다.
“존내 빨리 준비해야지~”
진경은 딱딱하게 굳었고, 경직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세연이 뛰듯이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저기, 세연아?”
“응? 왜 오빠?”
세연이 고개를 돌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경에게 용무를 물었다. 자기 동생이라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귀엽고 아름답고 청초한 모습이었다. 방금 전 그녀가 사용한 단어는 저 모습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만이 아니라 진경이 기억하는 세연에 대한 기억의 어느 한 구석에도 저런 단어와 연관될만한 어떤 ‘지점’은 없었다. 그래서 진경은 굳은 모습 그대로에서 한참 무언가 생각하다가, 결국 달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내 착각이었나봐. 미안.”
아무래도, 술 퍼마시고 껄쭉한 입담 늘어놓은 놈들 생각하니 환청을 들은 모양이다. -라고, 진경은 자기 합리화했다.
“흐응-”
진경의 대답을 들은 세연은 의아한 얼굴을 잠깐 해 보였다가 다시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의 올라가는 모양새를 바라보던 진경은 목덜미를 무의미하게 고쳐 쥐고는 집밖으로 나갔다.
은결은 버스에 올라타고 요금을 냈다. 버스 안은 붐비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좌석은 다 채워져 있었고, 사람들은 드문드문 서 있었다. 은결은 근처에 있는 지지봉을 하나 잡고, 주머니에서 접어뒀던 종이를 한 장 꺼내 펼쳤다. 버스가 출발했다. 풍경이 뒤로 쓸리며 은결의 몸이 밀렸다. 곧 그의 몸은 안정감을 되찾았다. 시선이 흔들리는 활자 위로 향했다.
-본디 신자유주의란 독일의 오이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론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70년대 후반 이후 하이예크, 프리드만 등의 이론을 신자유주의라 부르게 된다. 이들 신자유주의 이론은 통화주의, 공급중시, 합리적 기대론, 공공선택이론 등의 많은 학적 파벌을 가지지만 한 가지 강력하게 공통되는 지점을 가지고, 그것으로 인해 이들을 통칭해 신자유주의라 부르게 된다. 그것은 시장의 결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그로 인해 국가의 개입을 경제 활동에 있어 완전한 악으로 보는 것이다.
이들 이론이 현실 영역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를 통해서였다.
우선 대처리즘은 74년 영국 노동당이 승리하고 케인즈 주의를 고수하나 실패, 성장률은 2.2%에 불과하게 되는(이는 당시 EC국가 가운데 최하였다.)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그로인해 물가는 13%가 상승하고 실업률은 6%에 육박하게 되어, 노동당은 결국 현실적인 압력으로 인해 정책을 선회, 임금을 억제한다. 그러나 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 노동자는 분노하게 되어 다음 선거에 보수 세력이 승리하게 된다. 당시 선거에서 승리한, 대처를 대표로 내세운 보수세력은 노동조합과 국가가 영구 경제를 몰락시켰다고 주장하고 그를 통해 자국의 정책을 결정한다.
그 정책이란 크게 긴축재정, 감세, 민영화, 노동자 공격으로 나뉠 수 있다.
이 가운데 긴축재정은 통화량 줄이기와 정부 지출을 줄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양자 모두 경기를 침체시키게 된다. 대처는 경기 침체를 통해 경쟁력이 없는 기업을 도산시키고 막대한 실업을 발생시킴으로서 노동조합의 몰락을 꾀했던 것이다. 이로서 80년 대처 초기에 167만 명이었던 실업자는 83년이 되어 300만 명으로 늘어난다.
또한 대처는 감세 정책을 취하는데, 이는 투자 계급을 위한 것으로 경기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이 정책을 통해 최상위 계급에 대한 세금이 83%에서 40%로 반 이상 깎이게 되고, 중산층 이하에 대해서는 33%에서 25%로 감소한다. 그러나 간접세와 보험료가 올랐기 때문에 소득 수준이 낮은 계층에 대해 이 감세정책은 도리어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민영화란 공기업 민영화를 말하는 것으로 79년 영국 공기업은 전체 기업의 11%정도였으나 대처정부는 이를 경쟁력을 핑계로 매각하고, 동시에 각종 특혜를 약속한다. 이로 인해 영국 공공서비스 산업의 요금은 인상되나 질은 극적으로 저하된다. 이 과정을 통해 79년 206만 명이었던 공기업 종업원은 89년 당시 84만 명으로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마지막으로 영국 정부의 노동자 공격은 84년 탄광노조의 파업을 실패시키는데 성공함으로서 그 의도를 거의 완전히 달성한다. 당시 영국에는 명문화된 노동법은 없었으나 작업장 내부의 관습이 이를 대신하고 있었고, 그 관습을 지탱하는 것은 노동자 세력의 굴강함이었다. 그러나 탄광 노조의 몰락으로 인해 이 구도가 무너져 노동계급은 급격히 약화된다.
이런 과정에서 대처 정부는 노동조합을 정책결정 과정에서 배제시키고, 단체행동권을 비롯한 노조의 활동을 제약, 고용보호에 관련한 법의 폐지와 최저임금을 부분적으로 폐지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실현한 것이다...
분량 문제상 레이거노믹스는 이후에 다룰 모양이었다. 은결은 종이를 접었고, 주머니에 그것을 집어넣었고, 사실상 시카고 보이들의 대부인 밀튼 프리드만을 생각했다. 그는 플레이보이와의 인터뷰에서 노동조합도 최저임금도 부정했다. 심지어 그로인해 독점이 발생한다 해도 국가의 개입보다는 독점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어쨌거나 국가는 모든 경제활동에 개입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는 인비지블 핸드의 전능함을 믿어야 한다. 아, 시장이 우리를 구원할 지어니. 그것이 신자유주의.
‘개소리...!’
은결은 속으로 작게 이를 갈았다. 무엇이 16세기 스페인을 부강하게 했더라? 엔코미엔다로 규정되는 잔인한 식민지 지역의 착취였다. 무엇이 영국을 강성하게 했더라? 높은 조세를 통한 방어 무역이었다. 덕분에 인도의 모직 산업은 그야말로 개박살이 났다. 무엇이 유럽을 강대하게 만들었더라? 식민지. 식민지. 식민지들. 지금 그 식민지는 어떻게 되었지? 미국은 자유무역을 했던가? 천만에 그들은 보호무역을 했고, 그럴 때만 성장할 수 있었다. 한국은 어떨까? 일본은?
“후.”
은결은 눈을 감고 지지봉에 머리를 댔다. 푸른색 페인트로 도장된 차가운 철의 감촉이 엉킨 머릿속을 조금 풀어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어차피 생각해도 무의미한 문제였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고, 버스가 멎었다. 내려야 할 곳이다. 은결은 버스에서 내렸다.
*무궁화, 천유마, 야우님께서 추천해 주셨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보냅니다. 성원에 보답할 수 있도록, 가능하면 더 친절해 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껄껄껄.
*완결은 완결이 가까워서 완결내고 싶은 게 아니라 멀어서 그런거죠(...)하지만 2부 기획이던 걸 1부로 줄이기로 가닥을 잡았으니 완결이 훨씬 가까워지긴 했네요.
*이 글이 많이 어려우셨던 분은 저번 화 은결이 한 이야기를 중점삼아 다시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꽤 많은 것들이 드러나 보일 겁니다. 사실 저걸 조각내고 해체해 여기저기 쑤셔넣어서, 독자분들을 위한 퍼즐 맞추기 게임으로 만들려다가 이 글을 읽는데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완전한 형태로 드러낸거라서 꽤 강력한 실마리가 되어 줄 겁니다.
*퍼즐기획이 무산된 건 아쉽지만, 전부 무산된건 아닙니다. 칸트와 헤겔과 진화인류학의 종합을 통해 다른 거인이 이름을 가린 채 등장했죠. 후훗. 맞춰보세요. 눈치 채신 분은 침묵하기. 모르겠다 싶으신 분도 나중에 가면 다 등장할 겁니다. 핫핫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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