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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83화 (83/300)
  • #   83-희망을 위한 찬가 - 열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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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내 여자 고등학교의 이층의 자기 교실에서, 세연은 상체를 책상 위에 기댄 채 쉬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묘했다. 한 때는 헤실헤실 거리며 주변에 꽃이라도 피울 듯이 웃다간, 어느 순간 길게 한 숨을 쉬며 혹여 모를 학교 건물의 부실공사를 걱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얘, 왜 그러고 있어?”

    한동안 세연을 바라보며 그녀의 다양한 표정변화를 감상하던 친구 한 명이 보다 못했던지 말을 걸었다. 세연은 그녀의 질문을 받고 몸일 일으킨 다음, 두 손으로 턱을 괴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기 말야, 나 별로 매력이 없는 걸까?”

    “......”

    질문을 받은 소녀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근처에 있는 친구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는 폰을 꺼내들고는 렌즈의 초점에 세연의 모습을 담았다. 세연이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해?”

    처음 질문을 받았던 소녀가 태연한 태도로 대답했다.

    “어, ‘미리내 고등학교 얼짱 세연 자뻑’이란 이름의 동영상 하나 만들려고. 이걸로 니 싸이는 융단폭격이다.”

    “얘는!”

    세연이 버럭 화내며 말했다. 두 소녀가 꽃봉오리가 터지듯이 웃으며 그녀에게서 멀어졌다가, 그녀가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자 다시 돌아와서는 툭하니 삐져있는 세연에게 사과했다.

    “미안미안. 하지만 네 방금 전 한 말은 누가 들어도 자뻑인걸. 원래 자기를 치켜세우는 것 뿐 만이 아니라 너무 까내리면 그것도 자뻑의 일종이다. 너무 뻔하잖아.”

    “아냐. 난 진지하단 말야. 휴-”

    세연은 여전히 어딘가 뚱한 기색으로 그 말을 받았다. 그제서야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흥미롭다는) 것을 알아챈 소녀는 과장된 표정으로 세연에게 다가가 그녀를 위로했다.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우리 세연이가 이렇게 좌절이람. 이 언니한테 다 털어놔봐. 내가 다 해결해 줄게.”

    “음-”

    세연은 얼굴을 붉힐 뿐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느 샌가 그녀의 주변에는 다수의 친구들이 모여 있었는데 방금 세연의 태도를 보고, 그녀들은 이것이 정말로 청춘사업에 관계된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상식의 기준에서, 그녀들은 세연이 청춘사업으로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성격, 용모, 교양, 집안- 세연은 어디 내놔도 빠지는 구석이 없는 미소녀다. 만일 저기서 뭔가 더 바라는 남정네가 있다면 정말로 벼락 맞아 죽어 마땅했다. 그런 만큼 침묵하고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진짜라면 괜히 옆에서 쿡쿡 찔러대면 더 말이 안 나오기 마련이니까. 숨막히는 긴장의 끝에 겨우 세연이 입을 열었다.

    “저, 그러니까, 지난주에 남학생이 한 명 왔었거든.”

    일동은 동시적이라 할만 한 시간차로 일전 학교 문 앞까지 찾아왔다던 남학생에 떠올렸다. 사실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당시 그녀의 태도를 보았던 친구들의 이야기로 인해 그게 세연 몰래 꽤 화제가 됐었다.

    “방에서, 두 사람이서 꽤 오래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

    볼을 붉히며 쑥스러운 듯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주변을 둘러싼 여학생들이 한결 그녀 가까이로 몰려들었다.

    “보냈는데?”

    “그냥 용건 끝나니까 가버리는걸.”

    그리고 세연은 맥 빠지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친구들에게는 창피해서 말할 수 없었지만, 그때 은결은 그녀에게 겨울 체육복으로 갈아입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가슴이라던가, 사타구니 등, 치부라 할 수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일일이 손으로 눌러가며 어떤 따스한 기운 같은 걸 몸속으로 보냈다. 그는 탁기를 완전히 처리하기 위한 것이니 양해를 부탁한다고 했었다. 말하자면 상당한 수준의 스킨십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설명하는 태도에는 다소의 쑥스러움이 느껴졌지만 정작 작업을 시행하는 동안, 은결의 손길에서는 아무런 떨림도 없었다. 창피함을 느끼며 그 부탁을 수락한 자신이 바보 같을 정도로, 냉정하고, 담백한 손길이었고, 그것을 끝내자마자, 은결은 다음 주에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그냥 떠났다. 그리고 세연은 몸은 개운했지만 마음은 석연찮은 채로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아하! 알았다. 그 남자애도 창피해서 그런걸 거야.”

    이야기를 다 듣고 친구 가운데 한 명이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주변의 다른 학우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의 상식으로 생각할 때, 그 외에는 달리 세연과 함께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아무런 감흥도, 재미도 없는 행동을 보일 사춘기의 남학생이란 상상할 수 없었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다른 의미로 여자의 적이라 해도 좋을만한 존재다.

    “그, 그럴까?”

    “당연하지! 아니 그 전에, 고자나 동성애자가 아닌 한에는 그래야만 해!”

    말을 꺼냈던 여학생이 역설했다. 주변에서는 다시금 공감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연은 하나같은 친우들의 의견에 마음 한 구석을 채우던 초조함이 녹아가는 것을 느끼며 헤실헤실 웃었다.

    “에헤헤...”

    그러고 보니 은결도 아주 무심했던 건 아닌 것 같다. 체육복 입어 달라고 부탁할 때나, 작업을 시작하기 전만 해도 꽤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이번 주말에 다시 한 번 만나기로 했다. 그때 확실히 진전을 시도 하면 될 것이다.

    ‘아, 토요일... 존내 기대된다...’

    무의식중에, 세연은 그렇게 속으로 읊조렸다. 유감, 혹은 다행스럽게도 그녀 스스로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은결은 황홀한 눈으로 민성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우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는데, 그 휘돌리는 모양세가 지극히 능숙하고 교묘했다.

    “이게 그렇게 신기하냐?”

    민성이 은결을 바라보며 물었다. 점심 먹던 도중 화제가 우연히 볼펜 돌리기로 넘어갔는데, 그때 민성이 자신만만하게 나섰고, 이렇게 실제로 돌리게 됐다.

    “신기하기야 할까마는... 너 되게 잘한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민성의 손놀림은 대단했다. 물론 하고자 한다면 은결에게 저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마하가 넘는 속도를 내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감지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 일반적인 인지능력으로 그를 판단할 수는 없다. 몸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가 이론을 아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사고 속도가 그 운동이 요구하는 속도보다 훨씬 느리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반복을 통해 몸으로 새겨야만 한다. 하지만 은결에게 그런 한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의 사고속도라면 이성에 육체를 완벽하게 복속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을 끌어올리지 않은 채 민성이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하고자 한다면 꽤 오랜 시간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정말. 민성 선배 그렇게 안 보였는데 손재주가 좋네.”

    은결 옆에서 미래도 감탄의 목소리를 흘렸다. 오늘 점심은 미래도 끼여 같이 하고 있었다. 고릴라는 무척 기뻐했지만 여기까지 쳐들어온 이유가 지난 토요일 대학 축제에 가서 자기와 안 놀아주고 세연이랑 놀았다는데 화풀이라는 걸 아는 은결로서는 매우 부담스런 방문이었다.

    “후후.”

    두 사람의 칭찬에 득의만만해진 민성은 자랑하듯이 펜을 빙그르르 돌렸다. 손가락 사이를 오가며 그의 펜을 화려한 원무를 췄다. 이내 그는 손가락 사이로 돌리던 펜을 교묘하게 비틀며 손바닥 위에 올렸다. 엄지 아래쪽의 살 두덩에 펜의 가운데 부분이 올라가며 천천히 빙빙 돌았다. 이쯤 되면 거의 묘기였다.

    “우와.”

    은결과 미래가 저절로 감탄의 박수를 작게 쳤다. 그러나 세상이 잡기에 그렇게 호의적인 평가만을 내려주는 것은 아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고릴라가 한심하단 눈길로 말했다.

    “니가 그 정성으로 공부를 했어봐라, 우리 반 일등이 문제냐, 전국 0.3%도 했겠지.”

    “그렇지.”

    여우가 옆에서 보조했다. 민성의 얼굴이 심통 맞게 변했다. 하기야 자기도 이 기술을 쌓을 노력으로 공부를 했다면 꽤 놓은 곳에 등수를 둘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분석이었다. 자존심 때문에 말하긴 좀 그렇지만, 공부가 안 되다 보니 펜을 돌린거지, 펜을 돌리다 공부를 안 한건 아니었다! 그러나 늑대는 다른 의견을 가진 모양이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민성을 변호했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진짜 잘 돌리긴 잘 돌린다.”

    “그래. 나도 저쯤 되면 괜히 까지 말고 인정해 줘야 한다고 봐.”

    은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게 무슨.”

    고릴라는 완강하게 코웃음을 쳤다. 사실은 다소 감탄하고 있었지만 미래가 보고 있는 앞에서 꺾일 수는 없었다.

    “아냐. 예술이란 단어에 대한 개념 정의에 달린 거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예술이란 수준 높은 자기표현의 객체화이기 마련이니 저쯤 되면 예술이라 이름 붙여도 좋지 않겠어?”

    은결이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면서 말했다. 그에 힘입어 민성이 껄껄 웃으며 한층 복잡기괴하게 펜을 돌리며 고릴라를 향해 가슴을 펴고 말했다.

    “껄껄. 이 자식들아 들었냐. 이게 바로 45억년이란 시간이 이루어낸 기억의 한 성과인 거다. 니들은 뭐냐 45억년이나 걸려 탄생한 기적을 두 개씩 달고 있으면서 겨우 밥 먹고 똥 만드는 거 이외에는 생산적으로 사용해 본 적이 없지? 껄껄껄.”

    은결이 한 말이 무슨 소린진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건 은결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자신을 변호해 준다면 반론은 전부 ‘셔터 마우스’라는 거다. 괜히 반론하다 박살나면 본전도 못 찾는다.

    “으음...”

    고릴라와 여우는 나중에 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침음성을 흘렸다. 일단 펜 잘 돌린다는 건 인정했지만 늑대도 지금 민성의 웃는 꼴은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미래는 꺄르르 웃으며 그런 일동의 모습을 즐겁게 바라봤다. 맨날 칙칙한 책이나 읽는 오빠 친구라는게 안 믿어질 만큼 재밌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군. 이게 탄생하는데 45억년이 걸렸지.’

    한편 은결은 자신의 왼손을 쥐락펴락 하고 있었다. 정묘한 손가락의 운동이 그의 의지를 부드럽게 따랐다. 관절 하나하나의 분절적인 움직임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무의미한 혼돈 가운데 기적과도 같이 탄생한 45억년 세월의 걸작이다. 그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엄지에서 새끼까지 차례대로 쥐락펴락 했다. 이 동작을 위해서 뇌의 팔 할에 달하는 부분이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간단함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이 간단함에서, 인간의 언어가 비롯되었다. 그래서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인간의 정신이고, 물화된 영혼이다. 그때부터 세계는 객체화 되었고, 인간은 객체화된 세계에 자신을 투영하며 조정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지는... 만 년.’

    그렇기에, 수행의 연금체계에서 그것은 가장 중요한- 정신의, 이성의, 인간의, 신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은결은 쥐었던 손을 쫙 펴며, 마음을 끊어내듯 작게 중얼거렸다.

    “진정으로 세계를 변혁한 적은 없지만.”

    식사는 끝났다. 슬슬 옥상에 올라가 봐야 할 시간이다.

    *정보량이 다소 많기에 모니터보다는 책에 더 어울리는 텍스트이긴 합니다만, 시장에 맞지 않다면 별 수 없는 거겠죠. 그래도 매니악한 글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럭저럭 대중적인 텍스트로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렇게 계속 쓰고 있는 거고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홍보를 통해 이 글의 독자수를 늘립시다~

    *슬슬 이글을 쓴지도 반년이군요. 따지고 보면 거의 이틀에 한 화 꼴이었네요. 많이도 썼다. 플롯이 정해져 있으면 글 쓰면서 막히는 일이 없다는 게 장점이죠. 디테일한 부분에서 막히면 그냥 닥치고 강행돌파 해버리면 되고.(...) 뒤돌아보면 너무 급하게 썼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현행 고등학교 교육이 교양과 지식의 측면에서 다소 불만족스러운건 사실이지만, 마셜님은 좀 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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