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희망을 위한 찬가 - 열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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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끝은 마음의 저편에서 나타났고, 손끝은 인식의 너머에서 나타났다. 검과 손은 반응을 넘어선 곳에서 움직였다. 그러한 검끝과 손끝의 교환은 그 끝을 다시 휘두르는 에너지의 맞부닥침이고, 그 흐름의 충돌이 이끌어내는 강맹한 반발은, 그 에너지를 다시 각자에게 되돌렸다. 그리고, 검끝과 손끝이 교환되던 성천 고등학교의 옥상으로 정적이 되돌아왔다.
“후-”
은결은 바닥에 주저앉으며 긴 숨을 토했다. 어려운 싸움이었다. 쿠로사카의 검은 강하고 날카로웠다. 섬세함과 과격함이 그녀의 검끝에서 조밀하게 이어져 목표를 일관(一貫)할 때, 그것을 상대하는 일은 어려웠다.
“흠.”
쿠로사카는 가벼운 말을 흘리며 검을 허리춤으로 수납했다. 그녀 역시 은결의 주먹에 상당한 어려움을 느꼈다. 그의 주먹은 손의 움직임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역장의 장막과 에너지의 흐름을 두르고 그녀를 핍박했다. 그의 공격은 넓고 짙었다. 집중된 에너지로 그의 방어를 끊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 끊어냄은 날아오는 열 개의 화살 중 하나를 쳐대는 정도에 불과하다. 다른 아홉 개의 화살을 피하는 일은 용이치 않았다.
“결국 졌군. 마지막 검격은 정말 굉장했어.”
은결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 그녀의 검격은 은결이 펼쳤던 모든 역장을 없는 것 처럼 베어들며, 그의 목덜미를 노렸다. 그 앞에서, 결국 은결은 패배했다. 그 말을 들으며 쿠로사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 공격을 써야 했다는 것 자체에 대해 다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숨겨두고 있는 몇 가지 비장의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은결에게, 쿠로사카는 여전히 그가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묻지 않듯이 물었다.
“네 아버지는, 너를 어떻게 교육시킨 걸까?”
“응?”
그녀의 작은 속삭임을 듣고 은결이 고개를 돌렸다. 쿠로사카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뭐, 그럼 상관없지만.”
바람 불지 않은 공간의 적막은 두 사람의 침묵을 한층 강화해서, 그곳에 홀로 자연스럽게 내려쬐는 햇볕을 차라리 이질적인 것으로 뒤바꾸고 있었다. 은결은 쿠로사카의 손목을 곁눈질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왜?”
“그, 팔찌, 잠시만 주지 않을래?”
무슨 소린가, 잠시 미간을 좁혔던 쿠로사카는 이내 그것이 얼마 전 은결에게 받았던 팔찌를 말하는 것임을 이해하고 피식 웃으며 그것을 팔목에서 빼내 은결에게 던졌다. 은결은 부드러운 손동작으로 그것을 받았다.
“고마워.”
그는 그렇게 사의를 표하곤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겹쳤다. 푸른 역장이 그 손가락 주변으로 형성되더니 원뿔과 같은 형태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는 역장의 예리한 끝으로 팔찌에 무언가를 새기기 시작했다. 얼마 있지 않아 그의 손이 멈췄고, 은결은 후- 하는 긴 숨을 한번 뱉곤 다시 쿠로사카에게 팔찌를 던졌다. 쿠로사카는 그것을 받으며 은결이 작업한 곳을 살폈다. 거기에는 그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술직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이건 뭐지?”
“간단한 최면술식이야.”
“흐응... 그런데 갑자기 이건 왜?”
“그러니까, 나하고 너하고 같은 팔찌를 하고 있는 게 알려지거나 하면, 서로 좀 곤란하지 않겠어? 그래서 다른 형태와 색깔로 보이도록 간단히 최면 처리했어.”
은결은 그녀의 질문에 머쓱하게 답했다. 정확히는 대(對)미래용 예방책이었지만 그걸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그렇군. 하지만 그럼 네걸 하지 왜 굳이 내걸?”
“나는 최중요 인물이 이미 내 팔찌의 형태를 봤으니까.”
은결이 엄숙하게 말했다. 그가 말하는 최중요 인물이란 물론 미래를 지칭하는 말이다. 쿠로사카는 알겠다는 듯,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팔찌를 손목에 찼다. 애당초 그런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던 모양이다. 그리고 은결이 다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해봐.”
“너 무녀지?”
“...실없긴. 왜, 무녀차림세로 네 앞에서 카구라라도 춰 보일까?”
난데없는, 그리고 생뚱맞은 은결의 질문에 쿠로사카는 피식 웃으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은결은 무녀복을 입고 카구라는 추는 쿠로사카의 모습을 상상하고 잠시 얼굴을 붉혔다. 그 카구라는 틀림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치고 말했다.
“으음,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그런 건 아니고, 몸을 청결히 하기 위한 호흡식을 알고 있다면 간단한 거라도 좋으니 하나 알려줬으면 해서.”
“이해하기 힘들군. 기의 운행을 통해 체질을 거의 신적인 것으로 바꾸어내는 네가 왜 겨우 몸을 청결히 하는 호흡식 따위가 필요한거지?”
쿠로사카는 다시금 미간을 찌푸리며 은결에게 물었다. 은결은 다소 어색한 모습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입을 열었다. 이 일에 얽혀있는 것이 카미인 이상, 쿠로사카에게 이 일을 말하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 그게, 내가 쓸게 아니니까. 내건 가르쳐 줄 수가 없어. 효능의 지나친 강력함도 문제지만 배우기 위해서는 기초 기호학부터 시작해야 하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급히 필요하거든. 그래서 간단히 호흡법만 가지고 몸을 깨끗이 할 수 있는 게 필요해. 현역 무녀인 너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보는 거야.”
그는 어제 세연네 집에 찾아가 그녀의 몸을 정화했다. 그러나 매주 그녀를 만나야 한다는 것은 은결에게 다소 부담스런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그녀에게 간단한 호흡식 자체를 가르쳐 주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흐응... 그 여자애구나? 카미와 관련해 또 뭔가 문제가 생긴거야. 그렇지 않아?”
은결의 말을 듣고, 쿠로사카는 곧장 냉랭하게 응대했다. 은결은 이 문제에 관련해 역시 그녀를 속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판단력은 그녀의 냉랭한 성격만큼이나 예리하다. 은결은 그녀의 말을 인정했다.
“으음, 네 말이 맞아. 그렇지만-”
그리고 은결은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다른 말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설명을 막으며, 쿠로사카가 간단하게 말했다.
“좋아. 알려주지.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그렇지 않아도 수행이 만든 팔찌로 인해 생긴 빚을 어떻게든 갚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던 차였다. 간단한 호흡법 정도를 알려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단학이니 뭐니하는 게시물이 여기저기 붙어있는 것을 봤다. 그녀가 전해줄 호흡법은 그런 것들보다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내부를 깨끗히 다스릴 수 있을 뿐, 축기(縮氣)를 할 수 있는 종류의 진짜 호흡과는 무관했다.
“고마워!”
하지만 생각 외로 쉽게 끝난 대화에 은결은 태양처럼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별 생각 없이 은결의 부탁을 들어줬던 쿠로사카는 되돌아온 그의 표정이 너무 맑아서 다소 당황했다.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감정을 다스리고자, 그녀는 일부러 냉랭한 태도를 보이며, 은결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는 이 일에 정말로 열심이군. 사실은 그 여자애에게 마음이 있는 것 아냐? 그녀는 굉장히 아름다웠으니까 말야.”
어느 정도는 은결을 놀리고자 하는 의도가 깃들어 있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은결은 담담하게, 너무나 담담하게, 그녀의 말을 받아넘겼다.
“농담은.”
아무런 동요가 없는 대답이었다. 마치 감정이, 욕망이 없는 것처럼 지독하게 안정되어 있는, 대답이었다. 쿠로사카는 잠시간 침묵했다가, 은결에게 말했다.
“그래. 농담이었어.”
그렇다. 틀림없이 농담이었다. 그러나 카미가 깃든 소녀에 대해 그간 은결이 보여준 절실한 노력과, 지금 되돌아온 은결의 무감정한, 욕망 없는 대답 사이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거리는, 그녀에게 농담의 연장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불교에서 흔히 쓰는 비유로, 진서림님이 말한 것이 맞습니다. 여기서는 언어에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비유하는 것으로 쓰였습니다. 카미의 말은 한국어의 욕이 자신의 감정을 잘 담는 다는 것을 과장해, 언어는 기표지만 기의 그 자체와 같은 수준이라 말했던 것이 맞습니다.
*이 글이 잘 끝나준다면 독자분들에게 신뢰를 얻어 글에 무관계해 보이는 작내의 언급들이 실은 글에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해받고, 그로서 잡담 등을 통해 더 이상 글에 대해 구차한 언급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클라우스 학원 같은 경우도 그것의 근대적 에피스테메 비판과 자유라는 개념의 계급적 연결을 무의미한 현학이라는 비판을 받은 끝에 결국 그 의미를 스스로 밝혀야 했던 터라, 다소 아쉬움이 있고 하니 말입니다. 원래 이런건 독자가 발견해내 주는게 기쁜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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