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희망을 위한 찬가 - 열쇠(2)
#
“후훗.”
미래는 기쁜 안색으로 걸음을 걷고 있었다. 그녀는 양손 가득히 커다란 인형을 껴안고 있었다. 특이하게 생긴 동물이었다. 설명에 따르면 페키니즈라는 종의 개를 희화화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개처럼은 안 보였다. 새하얗고 코가 완전히 없었다. 시츄보다 낮았다. 절벽이었다. 그리고 얼굴이 혀를 살짝 내밀고 있는 게 아주 귀여워 보이긴 했지만 눈매가 사나웠다. 성질이 더러울 것 같았다. 물어보니 실제로 더럽다고 한다. 은결은 그 털이 북실북실한 개 인형을 보며 저걸 어떻게 빨래하면 좋을 것인가 심각하게 걱정하며 말했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
“그럼. 이쁘고 귀엽잖아.”
“그야 그렇지만...”
빨래하는 사람도 부디 좀 생각해 다오, 라고 은결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털도 반짝반짝하게 새하얀 게 더러워지는데 한 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은결의 속은 모르고 미래는 그저 좋아서 다시 한 번 인형을 꼭 끌어안아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말했다.
“근데 오빠 의외다. 물 풍선 던지기 이런 거 못할 거 같았는데.”
지금 미래가 안고 있는 인형은 오는 길에 있던 사격 놀이장에서 딴 거였다. 물 풍선을 던져 안에서 요리조리 피하는 사람의 머리에 맞추면 준다고 했는데, 손님을 끌기 위해 일부러 맞아주는 걸로 보이는 걸 빼고는 아무도 제대로 맞추는 사람이 없었다. 표적도 큼직하고 해서 쉬워 보인지라 낚인 사람이 많았지만 그들은 가끔 주먹만한 인형을 하나 건졌을 뿐, 대부분은 그냥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걸 은결은 한 방에 맞춘 것이다. 원래는 다소 연극을 하려 했는데, 그만 물 풍선 한 발에 500원이란 말을 듣고 평정을 잃고 말았다. 조금 반성하고 있었다. 인형을 건내던 사내의 손길이 부들부들 떨리던 것을, 은결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으음, 너는 오빠를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미래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냉랭하게 그 말을 받았다.
“맨날 틀어박혀 책만 보는 샌님을 그렇게 판단하지 않으면 그거야말로 상식이 없는 사람이겠지. 교수님하고 이야기하는 것만 봐도 뻔한거 아냐.”
“...그거, 칭찬으로 듣지.”
한동안 가만히 서서 고민하던 은결은 진중한 얼굴로 답했다. 미래가 어림도 없다는 듯이 혀를 베, 하고 내밀어 보였다가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은결드 그녀를 따라 시선을 넓혔다. 사람과 사람과 사람으로 충만한 공간이다. 누군가는 걷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인사하고, 누군가는 대접한다. 이 무수한 사람들은 그렇듯 모두 각자의 목적과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무수한 사람이고, 무수한 감정이고, 무수한 실존이다. 은결은 다소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건 그렇고, 정말 여기도 저거도 전부 술집이네. 안주만 좀 차별화가 있을 뿐이지. 좀 특이한 행사도 술 빨리 마시기, 아니면 많이 마시기 정도고. 가수 초청 빼면 우리 같은 애들은 정말 볼 거 없겠다. 원래 대학축제는 다 이런 거야?”
미래가 믈었다. 간소하지만 꽤 잔인한 감상이다. 은결은 상식적인 대답으로 받아넘겼다.
“으음, 고등학생이 고등학생한테 물어봐야 알도리가 없지. 그래도 건물 안은 본 적이 없으니까 뭐 속단은 좀 이르지 않을까? 시설 문제 이런 것도 있을테고 건물 안에는 다양하게 할거야. 그렇지만 아버지 말에 따르자면 미래 니가 안고 있는 인형이 조니 워커가 아닌 것만 해도 양호하다 싶기도 해.”
“그것도 그런가. 후훗, 뭐 시간은 많으니까. 차분하게 한 바퀴 뺑 돌아보면 되지.”
미래가 인형을 안은채 빙글 돌았다. 예쁘기보다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은결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그거 안고?”
“무거우면 오빠한테 맡기면 되잖아.”
당연한걸 왜 묻냐는 듯한 대답이다.
“...아 그러세요.”
툴툴대며 답하던 은결의 시선이 한 곳에 잠시간 멈췄다.
“응? 오빠 왜 그래?”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어서 가자.”
말을 잃은 채 한 곳에 고정되어 있던 그의 시선이 미래의 말과 더불어 다시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있던 곳에는 세연이 당황한 얼굴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모습이었다. 은결의 발걸음이 멈췄다. 미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은결을 돌아봤다.
“왜 그래?”
“잠깐만, 아는 사람이 있어서, 인사만 하고 올게.”
미래의 얼굴이 일순 부루퉁해졌다가, “빨랑 돌아와!”하고 크게 말하고는 근처 나무에 기대서서 은결을 기다렸다. 그리고 은결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고, 인파 가운데서 은결이 누구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발견했다. 세연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이 일순 어두워지며, 소리 없는 벼락이 내려쳤다.
“저, 안녕하세요.”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세연에게, 은결이 먼저 인사했다. 세연이 어린애도 아니고, 자신은 선약이 있어 오늘 그녀와 함께 할 수 없었다는 점을 지난 일요일에 전했던 이상. 미래도 함게 있는 판국에 굳이 상관할 필요가 없다 싶긴 했지만, 그래도 그냥 발걸음을 돌리기엔 세연의 불안한 얼굴이 걸렸다. 은결도 다소 사서 고생하는 타입이다.
“아...!”
은결의 인사에 세연은 화급하게 고개를 돌렸고,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크게 떠졌던 그녀의 눈망울이 은결의 얼굴을 확인하고 촉촉이 젖어가더니 이내 그렁그렁하게 눈물을 맺었다. 단정한 오관을 빛내는 생의 보석 같은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빛을 뿌리는 모습은 틀림없이 아름다웠다.
“우애앵-”
그리고, 은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은결은 간이 철렁 내려앉는 경악을 맛보며, 최대한 그녀에게서 몸이 닿는 범위를 좁히기 위해 두 손을 들었다. 주변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됐다. 놀란 탓인지, 거대한 천둥번개가 내려친 것 같은 가벼운 환청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은결의 당혹감과 무관하게 세연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아, 아니 저기, 일단 근처 휴게실이라도 가시죠.”
은결은 당혹해 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끌었다. 수많은 시선이 호기심에 충만한 채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은결은 그 시선 가운데서 상당한 수준의 살기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출처는 뻔했다. 속편한 놈들이었다. 그는 일단 미래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미래야, 잠시 세연 양이랑 할 이야기가 좀 있거든. 금방 끝나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지 않을래?”
미래는 마뜩찮은 얼굴로 세연을 바라봤다.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다른 한 손으로는 은결의 옷가지를 잡고 있는 모습이 덩치만 컸지 꼭 강아지 새끼 같았다. 속에서는 천불이 들끓고 있었지만 저 모습을 보고도 매정하게 그러면 안 된다고 반대할 만큼 그녀가 상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속으로 끝없는 투덜거림을 반복하며, 미래는 “빨리 얘기 끝내는 거야!”라고 말하고 은결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곧 야외 맥주 집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미성년자에겐 술을 팔지 않지만 대신 음료수와 주스도 팔고 있었다. 물론 세 사람은 그곳에서도 인기만점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집중됐다. 그 시선에 다소 부담을 느끼며, 은결이 세연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그게, 그, 그, 그러니까... 그게...”
은결은 머리를 긁었다. 엉망이었다. 심하게 당황한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는 걸까? 옷매무세는 여전히 단정하고 깨끗한 것을 보면 상해를 입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자면 대체 뭘까? 알 도리가 없었다.
“자, 심호흡. 하나- 둘. 하나- 둘. 어때요? 좀 진정이 됐어요?”
은결이 심호흡을 시켰다. 세연은 그의 지시에 따랐다. 미래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주변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세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분하게 말해 보세요.”
“그러니까, 그게-”
여전히 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처음에 비하면 많이 나아져 있었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부들부들 떨리던 손이 점차 안정됐다.
“-말이, 말이 막, 헛 나와요. 이상해요.”
은결은 작게 주문을 외우며 엄지를 튕겼다. 뚱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던 미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비켰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각자의 용무로 돌아갔다. 무수한 사람 가운데, 두 사람만의 완벽한 단절공간이 만들어졌다.
“어떤 방식으로, 말이 헛 나왔나요?”
“요, 욕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던 욕이, 갑자기 막... 제가 저 자신이 아닌 것 처럼... 막...”
그녀의 설명을 들은 은결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안했다.
“...한번 욕 해보지 않겠어요?”
“모, 못해요.”
세연은 거절했다. 강한 거부감이었다. 은결은 다시 제안했다. 차갑고 냉혹한 목소리로.
“해봐.”
“못, 해요.”
세연은 몸을 움찔 떨며 거절했다. 은결이 이번에는 그녀의 손을 잡아채며 한결 강압적으로, 거의 협박하는 것 같은 태도로 말했다.
“해봐.”
세연의 표정으로 공포와 흡사한 것이 한 순간 지나갔고, 표정이 바뀌었다. 그리고 세연은 믿을 수 없으리만치 거칠게 외쳤다.
“니기미 개좆같은 게! 사람이 못하겠다니까 계속 지랄이야! 귓구녕에 좆을 쳐 박아놨냐! 씹 빨아먹을 새끼가!”
“......”
“아...”
세연은 자신이 무엇을 말했는지 깨닫고, 다시 공포와 당혹에 질린 얼굴을 했다. 은결은 그녀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고 작게 무언가 읊조렸다. 세연이 기절하듯 푹 쓰러졌다. 그녀의 정신을 안정시키고 방금 전의 기억을 삭제하는 동시에, 그녀 안에 거주하고 있는 존재를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 부름에 응해, 세연은 거칠게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몸을 세웠다. 그리고 매우, 매우매우 거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 씨발, 재수 없는 눈깔로 꼴아보지마. 안 그래도 이거 때문에 너 만나려고 했거든.”
*까먹고 설명을 빼먹었는데 교수가 찌질이와 같은 단어를 아는 것은 커뮤니케이션 영역을 연구하는 분이라서 그렇습니다. 인터넷에 강하죠. 저서로는 ‘인터넷 시대의 자본주의’가 있다는 설정입니다.
*독자분들의 의견은 폭넓게 참고하려고 합니다만, 제 인용이 무의미해 보인다는 비판은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것입니다. 제 고집이라거나 그런게 아니라, 제가 어떤 이유로 그런 것들을 삽입했는가를 여러분이 판정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 이 글이 완결되고 나서입니다. 그 전에 인용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독자 분들에게는 판단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글은 제가 쓰는 거고, 저는 여러분께 이 글의 디테일한 구조에 대해 말한 적이 없습니다. 실제로, 최초에 무의미하지 않느냐 비판되던 수행의 사설은 현재 분명히 이 글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고, 그것이 글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