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79화 (79/300)

#   79-희망을 위한 찬가 - 열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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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이 바뀌었다. 누렇게 뜬 종이 위에 찍힌 검은 활자가 이루어내는 개념의 흐름처럼 걸쭉하니 짙었던 시간의 흐름은, 차분한 노안의 미소를 받으며 연구실을 나오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점차 옅어지고 물러져서, 마침내는 기구에 쏟아 붓는 가열된 공기의 운동처럼 가볍고 활달해졌다. 그 활달함에 추진 받는 것 처럼, 혹은 그 활달함을 추진하는 것 처럼, 주변은 무수한 사람의 흐름으로 충만했다.

“좋은 분이었지?”

“응. 얘기는 좀 어려웠지만 예전 아빠 이야기도 듣고 즐거웠어. 저런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그래. 미래 너라면 쉽사리 가능하겠지.”

“웅- 그래도 역시 집안 사정을 생각해 2인 재학 이상이면 주는 장학금을 노리고 오빠랑 같은 곳에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녀석.”

그리고 미래는 고개를 빼곰히 내렸다. 은결이 왼손에 들고 있는 종이가방이 보였다. 그 안에 담긴 낡은 책의 닳아빠진 모서리가 바람을 받으며 옅게 팔락이고 있었다. 교수가 은결에게 ‘너라면 무리 없이 읽을 수 있겠구나.’라며 전한 수행의 책이었다. 교수와의 대화 중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던 은결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고, 그녀의 작은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나는 낭만주의가 이긴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따지고 보면 계몽주의라는건 사람을 결국 일종의 기계로 만드는 거 하고 같잖아. 자유롭지가 않아.”

지나가는 투로, 그러나 강한 의지를 담고 미래는 말했다. 뜬금없는 말이라고, 은결은 여겼다. 다만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교수와의 대화는 그녀에게도 꽤 긴 흔적을 남긴 모양이라 짐작되긴 했다. 그리고 그녀의 지적은 그녀가 이 사안에 대해 가지고 있었을 관심과, 그에 관련된 독서의 정도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핵심적인 것이었다. 은결은 미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실제로 그건 계몽주의 비판의 가장 중요한 논거의 하나였지. 지하생활자의 수기 역시 그 부분을 비판하고. 하지만 미래야, 낭만주의가 계몽주의에게 이기거나 졌다는 것은 그 사상이 더 정교하거나 올바른 것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어. 단지 역사의 운행이 어느 쪽 생각과 닮아 있었던가 하는 문제에 따른 것이었지.”

“음- 그, 그런가.”

“살펴보자면 가장 이성적이라 평가되는 사람까지도, 실은 감정적인 것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그, 그래?”

미래와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과거에 아버지가 읽었다던 역사와 계급의식이 떠올랐다. 은결은 발걸음을 멈췄다. 미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은결을 올려다봤다. 그는 낮은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절절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 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러한 시대는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자기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헤에-”

미래의 입으로 감탄의 말이 흘렀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를 읊듯이 부드러운 은율 가운데 은결이 읊은 그들 문장이- 아득한 그리움에 젖은 채, 그 그리움으로 세상의 빛을 쪼개고 반사하며 스스로를 휘황히 빛내는, 그런 아름다움으로 충만해 있는 것 같다고, 그녀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멋지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서문 중 일부야. 가장 철저하게 이론적인 텍스트를 만들어냈던 사람의 가장 유명한 문장은 이렇듯 감상적이지. 이런 문장 앞에서 가슴 저림을 느끼는 나도 꽤 로맨티스트일지도 모른다 싶기도 하고 말야. 그런데 어떤 이들은 저 감상적인 문장에서, 잃어버린 별빛을 되찾기 위해, 루카치가 맑시스트가 될 것임은 이미 예고되어 있던 것과 같다고 말하기도 해.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세계를 노동이라는 이성적 수단으로 변혁하려 했던 20세기의 숭고한 시도는, 실은 가장 감상적인, 근대가 잃어버린 ‘신’이란 ‘절대타자’를 되찾기 위한 열망에서 비롯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싶기도 해.”

은결의 해설이 끝났고, 미래가 뚱 해져서 낮게 말했다.

“...오빠 말이 교수님 말보다 더 어려운 거 같아.”

“그, 그러냐. 미안.”

은결이 머쓱하니 사과했다. 그러자 미래는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주변의 빛을 퇴색시키는 밝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의외야. 오빠는 낭만주의... 좀 싫어하는 거 같았는데. 버스 안에서도 그랬고.”

그 말을 듣고, 은결은 놀랐고. 놀라움의 다음 순간 반성했다. 아버지의 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다소 감정을 자제하지 못했다 싶었는데 그게 미래에게는 여실히 드러났던 모양이다. 뜬금없다 싶었던 질문의 흐름이 이해되었다. 미래는 은결의 초조함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은결은 미래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설마. 그냥 역사를 돌이킬 때, 비극의 대부분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이 부족해서 저질러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뿐이지.”

은결은 자신의 말이 미래에게 얼마나 먹혀 들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안정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활달한 목소리로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오빠 말대로라면 아빠가 말한 근본적인 변혁이란 뭐였을까?”

교수가 말하길, ‘파블로프’를 쓴 것을 마지막으로 수행은 자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군대로 떠났다. 교수는 화도 나고 안타깝기도 해서 자퇴를 하련다는 수행을 심하게 질책했는데, 교수의 말에 다르면 그때 수행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한계라면서, 좀 더 근본적인 변혁을 시도해 보려 한다고 그에게 답했었다. 교수는 아직도 수행이 말했던 ‘근본적인 변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건-”

은결은 부지불식간에 현자의 돌을 떠올렸다. 그것의 그 압도적인 힘과 효용을 생각할 때, 연상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혁이 현자의 돌이라면, 그 변혁은 절반의 성공일 뿐이고, 완전한 성공이 되지 않는 한, 그것의 너무나도 거대한 힘에 의해 온전한 실패가 되어버리고 말 기획이다. 어쨌거나, 미래에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는 객쩍게 웃으며 미래에게 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는걸.”

미래는 볼을 부풀리고 부- 하고 은결을 비난했다. 은결은 하하하, 하고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아넘겼다. 미래는 장난스레 화내던 얼굴을 지우고, 은결의 팔을 잡으며, 그를 앞으로 이끌다가, 그의 앞으로 가 몸을 돌려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흐-응. 뭐 하여간 이제 심부름도 끝났으니 남은 시간은 즐겁게 놀아야지! 그러려고 온거 아냐.”

“그래.”

미래의 밝은 얼굴을 보면서, 은결은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저런 웃음을 지을 자신이, 그에게는, 없었다. 은결은 시간을 확인하고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휴대폰은 잡히지 않았다. 사복으로 갈아입으며 깜빡 잊었던 모양이다.

‘흐응... 뭐 어디 전화 올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은결은 가볍게 생각하고 미래에게 시간을 물었다.

소녀는 왼손을 들어 자신의 목덜미 부근을 불안하게 잡고 있었다. 암벽을 등반하는 등산가가 자신의 몸을 허공에서 지탱하는 한 줄기 굵은 밧줄을 잡고 있듯이, 간절한 모습이다. 물론 든든한 대지 위에 굳건히 두 발을 대고 있는 소녀에게 그 손모양은 무의미한 것이었지만, 친구들과 떨어진 채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헤메고 있자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불안할 것 같았다.

휴대폰이 있으니 전화를 해서 다시 합류하면 되겠지만, 그러기엔 또 친구들과 헤어지기 전에 그녀의 동공에 각인되었던 모습이 화인처럼 강렬했다. 분명히, 은결도 이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래. 분명히... 와 있었는데...’

그렇지만, 돌아다닌 지도 벌써 한 시간을 넘겼다. 앞서 은결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 보긴 했지만 받지 않았다. 들고 있지 않거나...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는 일은 꽤 괴로웠다. 연락도 안 되고, 더 이상 돌아다니기도 힘들었다. 다시 친구들과 합류해야 할 것 같았다. 쓸데없는 질문들이 따라붙겠지만, 그런 거야 뭐, 대충 맞장구 쳐 주며 상대하면 그만이다. 그보다는 은결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많이 서운했다.

“하아...”

세연은 한 숨을 쉬었다.

“저기, 학생.”

“예?”

세연은 고개를 돌렸다. 밝은 표정의 남자 대학생이었다. 상체의 정면과 후면으로 마분지로 만든 광고판을 대고 있었다. 100%부킹 따위의 말이 매직으로 강렬하게 적혀 있었다. 모양새를 보니 그는 어느 동아린가의 호객을 맡고 있는 모양이었다.

“혼자예요? 그러면 여기 와 보지 않을래요? 싸게 해 줄께요.”

그는 사근사근하게 세연에게 권유했다. 아무래도 축제에 클럽 종류의 것을 운영하는 모양이었는데, 그렇다면 세연과 같은 인재는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물론 세연은 별반 관심이 없었다.

“아, 아뇨. 괜찮아요.”

“에이, 그러지 말고. 이왕 온 거 괜찮지 않아요?”

대학생은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거절하는 모양새가 기가 약해 보이는 소녀였다. 그렇다면 좀 끈질기게 부탁하면 넘어와 줄 것 같았다. 좀 무례한 방법이란건 그도 알고 있었지만 원래 호객이란게 다 그런 것 아니겠냐고, 그는 생각했다. 약속한 대로 서비스를 잘 해 주고자 생각했던 것도 물론이다. 운이 좋으면 그걸 인연으로 이 소녀의 핸드폰 넘버 정도라도 받게 될지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저, 좀 곤란한데...”

“자자- 경품 행사 이런 것도 있거든요. 학생이라면 틀림없이 일등 할 거예요. 그러니-”

“이 씹새끼가! 좆도 필요 없다니까!”

손을 떨치며, 세연이 외쳤다. 주변의 시간이 정지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세연에게로 집중됐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그녀를 데려가려던 대학생도 물론 얼어붙었다.

“......”

“아, 죄, 죄송해요.”

세연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달렸다. 사람들은 그녀의 앞길을 비켰다. 모세가 홍해 가르듯 했다. 그 정적 가운데서, 세연은 자신이 왜 그랬는지, 심하게 당황했다. 그러보니 기억은 잘 안나지만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알 수 없었다.

*촏잉(...)님께서 추천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이 글은 취미삼아 하고 있는 공부의 부산물로, 글을 쓰기 위해 따로 공부한 것은 아닙니다. 수치를 명확히 하기 위해 따로 책을 참고하거나 하는 경우는 있었습니다. 여담인데, 크진 않지만, 복습과 같은 효과가 있기도 했습니다.

*은결 말고 저도 저 문장을 아주 좋아합니다. 유명한 문장이죠. 루카치 외에 인간실격,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칼의 노래, 설국, 공산당 선언, 죽음의 한 연구, 태백산맥 등등등등등, 좋아하는 첫 문장(혹은 문단)은 많습니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첫 문장은 죽음의 한 연구였죠. 이것도 못 읽는 놈은 이 글을 읽지 말 것. 이라는 포스가 풍풍 풍겨 나온 달까. 후덜덜덜덜덜덜...

*정보 수정합니다. 근친관련 조혼 제도의 국가는 타이완이었고, 각인 기간은 생후 30개월 이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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