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희망을 위한 찬가 - 파블로프는 우리의 미래일 수 있는가_(9)
#
“파블로프면,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에 나오는 그 파블로프요?”
미래가 물었다.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 파블로프란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조금 얘기할게 있구나. 그러니까 이 글이 왜 쓰여 졌는가 하는 맥락의 문제인데, 으음, 그러니까 이 글이 쓰여진 시점이, 군부에서 학교에 대해 유화정책을 시행하고 좀 지난 때였지. 프락치니 수사관이니 해서 학교에 상주하던 이들이 사라지고, 학교가 그나마 학교다운 모습을 되찾게 된 이후로 좀 지난 그때였단다.”
“다행이네요.”
미래가 밝게 말한데 대해,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다행이지. 그렇지만, 다행이었지만 그게 반드시 그렇지 만은 않았단다. 당시 운동권이 크게 두 파벌로 나눠져 있다고 이야기는 앞서 이야기 했지? 그 파벌이 학교에 수사관이 있고 프락치가 있고 할 때는 입장 차이를 무시하고 서로 협력해서 운동을 지속해 나갔단다. 적이 너무 강대했기 때문에 이론적 입장 차이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학교에서 그런 적들이 사라지고 나니 그 이론적 차이가 불거지기 시작한 거야. 그리고 그 이론적 차이 때문에 두 파벌은 사실상 분열하고 서로 상종을 안한달까... 그런 사이가 되어버리고 말지.”
“교수님 이야기 들어보면 굉장히 위험한 시절을 같이 협동해서 보낸 것 같은데... 이론적 차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거였나요?”
미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묘한 얼굴로 물었다. 교수가 입을 열어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은결이 말했다.
“인간은 언제나 타자를 갈구하니까. 의미를 통해, 범주를 통해 세상을 재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그러니까 타자가 없다면 타자를 만들어서라도 타자를 마련하는 거야. 적이 사라졌다면, 설혹 같이 협력했던 사이라도 타자로 돌리게 되는 법이지. 하물며 이론적 차이까지 있었는걸.”
건조한 어투였다. 그 건조함을 형용하기 위해 ‘지독하게’라는 수사를 붙여도 무방할 것이다. 미래는 침을 삼켰다. 은결의 말을 들으며, 어째선지 그녀는 몸이 조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상하좌우 어디를 바라봐도 똑같은 풍경의 무미건조한 사막 한 가운데 떨어져 있는, 그런 느낌. 잠시 손으로 턱 주변을 쓸며 은결의 말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던 교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쓴맛이 남은 어조로 말했다.
“타자를 갈구한다...라. 꽤 철학적인 표현이구나. 하지만, 아마도 그 말이 옳겠지. 그리고 너희 아버지의 그 글은 그런 시점에서 쓰여진 거였단다. 표현은 달리했다만, 그 글의 내용도 따져보자면 ‘인간은 타자를 갈구 한다’는 것과 대동소이하다고 볼 수도 있겠구나.”
“그렇... 습니까.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직접 읽어 보는 게 최고겠다만, 그 녀석이 쓴 글 가운데 가장 길고 내용도 어려워서 지금 너희들에게는 좀 무리겠구나. 굉장히 시니컬한 어조로, 읽는 사람을 별로 배려하지 않고 쓴 글이지. 그러니까... 시작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 시작하지. 소비에트 연방, 소련은 그 글로서 성립되었고, 그럼으로서 그 글의 이념을 잇고 있는 국가를 자처하고 있다고 말이야. 거기서 곧장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가 무엇의 영향을 받아 적혀진 글인가 하는 점을 다루지. 바로 체르니셰프스키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 말이다. 혹시 알고 있니?”
“아뇨.”
미래는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레닌의 것은 읽어 보았습니다만,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름만 알 뿐,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은결은 다소 건조하게 답했다. 교수는 은결에게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닌을 읽어 봤다니, 그것만 해도 대단하구나. 하여간, 그리고 글은 그 글의 이념에 대해 간단하지만 그 핵심적인 내용을 다루고 곧장 도프도예프스키의 소설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넘어간단다. 너는 아마 왜 그 소설이 다루어 졌는지 알고 있겠구나 싶다만.”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이성을 통해 수정궁이라는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반대를 위해 적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은결의 답변에 교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로 물렸다.
“그래.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명백히 ‘무엇을 할 것인가?’를 비판하기 위해 적혀진 글이고, 소설 가운데 그것을 명백히 하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하지. 수행은 치밀한 필체로 그 두 사상의 대결을 소개하고, 그럼으로 소련이 도프도예프스키의 문학을 반동적이라 규정하고 억압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라고 설명한단다. 그리고, 파블로프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구나.”
거기서 교수는 잠깐 말을 쉬었다. 은결은 예감 같은 것이, 자신의 가슴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이상스럽게 가슴이 고동쳤다.
“이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 한한 이야기이긴 하다만, 소련이 파블로프를 정책적으로 지지하고, 그에 대항세력이 될 만한 학문은 마찬가지로 정책적으로 억압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지. 그래서 프로이트도 무시했지. 이 때문에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의 좌파 학자들 가운데서는 소련에 반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 이것은 명백히 이념적인 선택이었단다. 어떤 맥락인지 이해할 수 있겠니?”
이번에 교수는 부드럽게 웃으며 미래에게 물었다. 미래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생각을 굴렸다. 문득, 이곳에 오면서 은결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계몽의 이상을 통해 판단함으로서 미신적인, 비합리적인 것에 심취하는 사람들의 행태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던 은결. 그것은 이 이야기와 멀지 않게 느껴졌다. 미래는 답했다.
“음- 파블로프에 반대된다는 것은 이성을 통해 교정할 수 없는 것들이다? 라는 점이라거나... 맞나요?”
교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이 이야기의 흐름에서 결론을 유도해 내다니, 대단하구나. 그 아버지에 그 딸이랄까.”
“헤헷.”
“그래. 소련 정부는 이성적인 훈련과 교육을 통해 통제되지 않은 인간 본성 따위를 인정할 수 없었지. 파블로프가 초기 소련 정부에 비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파블로프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것은 바로 그 훈련이나 교육을 통한 행동의 교정이라는, 그들의 좌파적 이상에 따른 것이었단다. 수행도 이런 이야기를 다루며 소련 정부의 인간에 대한 시각을 정리한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미래는 은결을 바라봤다. 은결은 진중한 표정으로 교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수업을 듣듯이 엄격한 모습이었다.
“그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수행은 챕터를 바꿔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대결을 서술하지. 계몽의 이상, 그 특징. 중요한 사상가들. 그리고 낭만주의의 부흥. 중요한 사상가들. 대결의 과정. 동기 뭐 그런 것들. 어디서 다 읽었는지 인용되는 학자는 부지기수고, 유럽 역사에 대해서는 마치 전문가처럼 치밀하고 해박한 시선으로 서술하지. 그래서 불친절한 만큼 매우 어려운 부분이긴 하다만, 사전 지식만 충분하다면 삼국지 읽듯이 재밌게 읽을 수 있단다. 그 사상의 대결이라던가, 그로인한 영향력의 파급, 특히 30년 전쟁에 따른 낭만주의 사조를 강화 뭐 이런 것들.”
“응? 30년 전쟁이랑 낭만주의가 무슨 상관이 있나요?”
미래가 물었다. 은결이 답했다.
“30년 전쟁은 타자를 인정할 수 없었던 같은 기독교인들의 싸움이었으니까. 신 구교의 갈등은 너도 알지? 계몽적 이상에 따르면 그 같은 차이는 아무 것도 아니어야 하는데, 당시 독일은 그 아무 것도 아니어야할 차이로 인해 풍비박산이 났고, 그래서 이후 계몽적 이상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거야.”
“그렇... 구나.”
미래는 다소 당황스런 느낌이 뒤섞인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은결의 말은 가슴 한 켠이 조일만큼 건조했다. 그녀는 그러한 은결의 말을 듣는 것이 싫었다. 그것은 은결이 그 대답처럼 무미건조하고 삭막해서 언젠가 습기 없는 사막의 모래처럼 스러져 버릴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잘 아는구나. 그래. 그랬지. 그리고, 너희 아버지는 ‘결국 계몽주의는 낭만주의에 패배하고 말았다. 파블로프적 이상은 그때 이미 한 번 실패한 것이다.’ 라고 결론짓고 그 챕터를 끝낸단다.”
“헤- 그런데 낭만주의란게 계몽주의랑 그렇게 많이 달라요?”
은결의 대답에서 그녀를 옥죄인 기분을 떨칠 겸, 미래가 물었다.
“많이 달랐지. 일단 낭만주의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어디서나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정답이 있다는 계몽주의의 주장을 비웃거든. 대신에 백 사람이 있다면 백 가지 이야기와 백 가지 정답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보지.”
교수는 그렇게 답하고 잠시간 말을 쉬었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음료수를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 시작되는 챕터에서는 그 당시 운동이 처해 있던 현실을 이야기 하면서 앞선 이야기들의 사례를 꺼내 비교 한단다. 그 논조가 지극히 냉소적이지. 한게 뭐가 있다고 벌써 분열이냐, 이 찌질이들아! 라는, 그런 분위기. 그리고 두 파벌의 분열을 비판하면서, 이른바 좌파를 자처하는 이들이 적의 존재를 통해서만 통합이 가능하다면, 그것도 눈앞에 적이 있는 것으로만 통합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인간이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이야기한단다. 그렇게 이야기 해 놓고,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끝맺지. 마지막으로 나는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묻는다. 파블로프는 우리의 미래 일 수 있는가?”
거기서 교수의 설명이 끝났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미래가 상기된 얼굴에 손바닥을 대어 식히며, 감상을 말했다.
“후아- 교수님 말만 들어도 어려운 걸요.”
“껄껄. 그야 어렵지. 읽는 사람한테 요구하는 사전지식도 많고, 개념을 굉장히 교묘하고 치밀하게 엮은 글이라서 한 문장만 놓쳐도 무슨 소린지 헤메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니까. 그래도 그만큼 잘 적혀진 글이 없단다. 굉장히 냉소적이라 읽고 있으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좀 비참하고 절망적인 기분도 든다만, 정말 잘 쓰여졌지. 이성적 인간과 감성적 인간이라는 판단의 충돌과 시도를 역사적으로 체크하고, 이성적 시도가 흔히 감성적 결과에 의해 부정되었던 것, 특히 타자를 만들고, 그 타자를 용납하지 못하는 인간적 특성을 통해 이성과 그것을 통해 완성되는 인간이라는 테제를 부정하는 그 글은 가히 아름다울 정도지.”
‘타자를 만들고, 그 타자를 용납하지 못하는 인간적 특성을 통해 이성과 그것을 통해 완성되는 인간이라는 테제를 부정하는-’ 이라는 말에 은결의 가슴 한 구석이 징징 울렸다. 교수는 과거를 되새기는 먼 어조로, 수행의 글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감상을 더했다.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그 글은 단순히 그 당시 운동권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소련의, 좌파 일반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비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하구나... 욕망이란건, 이성을 통해 간단히 교정될 만큼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 말을 들으며, 은결은 수행의 글의 마지막 문장이었기도 했다는 ‘파블로프는 우리의 미래일 수 있는가?’를 되새겼고, 속으로, 작게, ‘아니요.’하고 중얼거렸다. 무미건조하게. 아주 무미건조하게.
*저는 객관적으로 이 글의 진행이 느리지 않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판 크게 싸운지 10만 바이트를 약간 넘겼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에헴.
*이 글이 ‘희망을 위한 찬가’라는 제목은 포기하지 않고, 주인공을, 친인의 죽음과 같은 개인적인 사건을 통해 좌절시키는 것도 피하고 있는 이상, 다소의 정치색을 띄게 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절망, 혹은 희망은 가치의 문제이고, 가치는 언제나 기준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고, 기준이란 정치적인 것이니까요.
*처음에는 소련 정부를 싫어했던 파블로프도 지극정성에 감동했는지 나중에는 소비에트 연방에 우호적으로 돌아서고 만국 공산화를 기대했다고 하죠. 이걸로 자료 좀 찾으려니 하니 자료는 논문 하나 나오던데 비싸서 GG.
*이런 글 쓰는 자체가 따지고 보면 세상 참 좋아졌다는 증거입니다. 20년 전 같았으면 제가 감히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생각을 했겠습니까. 무림 파천황이란 글의 저자는 유물론 같지도 않은 유물론 살짝 언급했다가 잡혀갔는데.
*뭐, 이로서 골때리는 이야기는 대충 종결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