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희망을 위한 찬가 - 파블로프는 우리의 미래일 수 있는가_(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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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이 천재라는 평가를 듣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은결과 같은 세계에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렇지만, 역시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천재라는 단어로 정립되는 데 대해, 은결의 가슴은 새삼 두근거렸다. 미래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눈망울을 초롱초롱히 빛내며 교수의 말을 듣다가 물었다.
“천재라니, 어떤 면이 천재였어요?”
“우선은 학부 일학년이 원서로 ‘역사와 계급의식’을 읽고 있는 걸 보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겠지. 아무리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한다고 해도, 아직 군대도 안 갔다 온 일학년이었는데 말이다. 하물며 그 녀석은 독어뿐만이 아니라 한국인이 쓴 책 이외에는 모두 원서로 읽고 있는 것 밖에 외부에 보인 적이 없다는 기괴한 기록을 소지하고 있거든.”
정영철 교수는 과거를 담은 눈길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미래는 그 말을 듣고 알겠다는 듯 표정을 밝게 하며 말했다.
“아! 아빠 지금도 그런데.”
‘역사와 계급의식’이 무슨 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수행의 서재에 한국어로 된 책이 많이 없다는 것은 그녀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겠지. 그리고 그때는 광주 항쟁이 있은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라서 많이들 운동에 투신했었고, 진지하고 열정적이었거든. 그래서 누구 할 것 없이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잘 쓰고 논쟁에도 강했는데, 네 아버지 같은 경우는 그 가운데서도 특별했었단다. 내가 아는 한에는 한 번도 졌던 적이 없지. 그때는 골방에 틀어박혀 술만 마시면 주로 그런 논쟁으로 이야기가 흘렀으니까 거의 매일 그런 논쟁을 했다고 봐야 하는데, 그 수백회가 넘는 논쟁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면 굉장한거지. 상대도 다들 열심히 공부하는 녀석들이었으니까. 더구나, 듣기로는 교수도 몇 명 그 녀석이랑 논쟁하다 박살이 났다지. 그래서 크게 알려진 건 아니다만 이쪽에서는 아직도 전설 비슷하게 이야기되곤 하지.”
“헤에-”
미래가 감탄의 목소리를 흘렸다. 정영철 교수가 씨익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미래를 향해 말했다.
“사실은 그 중에 나도 있었단다.”
“정말요?”
미래는 눈망울을 크게 했다. 은결이 작게 얼굴을 찌푸리며 미래의 옆구리를 콕콕 쑤셨다. 실례되는 태도이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가벼운 태도로 말한다고 해도 학생에게 졌다는 건데, 쉽게 말하긴 어려운 내용일 터였다. 미래는 재빨리 그 의미를 이해하고, 얼굴을 붉히면서, 작게 혓바닥을 빼물고 ‘에헤헤...’하고 몸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교수는 신경쓰지 않고, 미소를 더 짙게 하면서 말했다.
“그래. 그래도 배운 가락이 있어, 상당히 깊이 알고 있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 커뮤니케이션 이론으로 논쟁했는데도 된통 깨졌지. 정말 대단하지? 되돌아보면 내가 그 녀석한테 가르쳐줬던게 있긴 하나 싶구나. 그렇지만, 그 녀석, 다소 소외된 위치에 있기도 했구나.”
“소외요?”
“일단 민족해방, 민중민주 가운데 어느 파벌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입장이었으니까. 다소 방관자적인 입장이랄까. 그리고 그때 종속이론과 그 이론에 따라 남한의 상황을 분석, 비판하는 게 보통이었는데, 네 아버지는 그 분석에 대해 크게 걸고 넘어졌던 적이 있기도 했고...”
“우- 모르겠어요.”
열심히 이야기를 듣던 미래가 울상을 지으며 교수에게 호소했다. 파벌이니 종속이론이니 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아니 그녀 세대에게는 딴 세상의 이야기였다.
“아, 이런 실수했구나. 아무래도 요즘 세대의 고등학생에게 이야기해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닌데...”
그러면서 교수는 은결에게 시선을 넘겼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던 그는 교수와 눈동자가 마주치자 깜짝 놀라며 허리를 바로 폈다. 그것을 보고 교수는 ‘흐응-’하고 어딘가 만족스러운 듯한 비음을 흘리며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하여간 그것 때문에 적을 상당히 만들기도 했었지. 네 아버지의 그 주장이 미국 제국주의를 인정하는 반동적인거라고 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그 주장이 한국의 일본과 미국 경제에 대한 종속적인 상황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었지만, 종속 자체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이라 볼 수는 없다는 것이었지.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요즘도 그 시각을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더구나.”
“아, 읽고 계셨군요.”
교수의 말을 듣고 은결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은 미국 헤게모니가 세계 경제 호황에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한국이 거기 큰 혜택을 입었다는 주장을 말하는 것으로, 그건 수행이 요즘에 연재하고 있는 사설의 내용을 알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교수는 은결의 놀란 얼굴에 도리어 자신이 놀란 얼굴을 했다. 은결이 수행의 글을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전체적인 맥락 가운데 소화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데서 다소 눈치 챘지만 그 정도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야 물론이다만- 흐음,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나.”
교수가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읽고 은결은 조금 얼굴을 붉혔다.
“그럼, 아빠도 학교에서 왕따였나요?”
은결은 아빠‘도’에서 자신을 향한 미래의 평가를 읽고, 옆구리를 살짝 쑤셔볼까 했지만, 아마 미래도 악의가 있어 한 소리인 것도 아닐테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설마. 다소 경원시되긴 했지만 그래도 ‘미친개’를 무시하거나 적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지. 다소 비판적인 입장에서긴 했지만 전략적으로는 아군이었고, 그 녀석이 아니었다면 잡혀 들어갔을 녀석도 한 둘이 아니었거든. 일단 그때는 학교 안에도 프락치니 수사관이니 해서 학교에서 찌라시 뿌리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때는 네 아빠의 도움이 정말 컸단다. 찌라시 뿌리려면 대형을 짜서 시간을 좀 벌어야 하는데 그게 여의치가 않았거든. 근데 네 아버지가 안 어울리게 정말 싸움을 잘했으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아버지 별명이 미친...개... 요?”
은결이 묘한 얼굴로 물었다. 은결이 말하는 미친개라는 단어를 들으며, 교수는 견디기 어려운 듯이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흘러내리려는 웃음을 막았다. 그는 한동안 그렇게 끅끅대며 웃음을 막다가, 겨우 진정된, 그래도 노안에 어울리지 않게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언젠가 거리 시위 나갔을 때 붙은 별명이란다. 아, 이건 웃으면 안 되는 건데. 하여간 지금은 웃으며 얘기한다만, 그때 백골단이라는 시위 진압대가 있었는데, 그 위용이 진짜 무시무시했단다. 근데 네 아빠가 시위나가선 백골단을 여섯 명인가 일곱 명을 때려눕혔거든. 그때 백골단 가운데 한 명이 네 아빠보고 ‘미친개 같은 새끼!’라고 했다더구나. 시라소니도 아니고 백골단 일곱 명이라니, 무슨 무협지 속에 나오는 고수 같지 않니? 처음엔 나도 그게 무슨 헛소린가 싶었단다. 그 이후로 붙은 별명이지.”
교수가 웃으며 한 말에 은결은 억지로 ‘아하하.’하고 웃었지만 지어낸 웃음 뒤로는 웃을 수 없었다. 그야 수행이라면 백골단 일곱이 아니라 칠백 명이라도 거뜬히 상대했겠지만, 그걸 그렇게 드러냈다는 건 다소 부주의한 일이었다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과는 상관없는 미래는 흥이 동한 듯 한층 눈망울을 반짝였다.
“헤에, 아빠 그러고도 안 잡혀갔네요.”
교수는 껄껄 웃으며 답했다.
“도망을 귀신같이 잘 다녔거든. 그리고 어째선지 네 아빠에 대해서는 수사관들의 기억도 대부분 희미했고... 존재감이 희미했달까. 수배도 된 적이 없었지. 활약에 비하면 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만 덕분에 자기도 무사했고, 그 외에도 잡혀갈꺼 안 잡혀간 녀석이 많으니 다행이지 뭐냐.”
물론 은결은 왜 그런지 안다. 지금의 자신도 가능하다. 당시의 수행이라면 어지간한 범위의 기억을 합리적으로 조작하는 것은 간단했을 것이다. 인간 인식의 한계상 기억의 명증성이란 가소로운 문제다. 하지만 수행이 조직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지 않았던 것은 지나친 광역 최면을 피하기 위한 것도 이유의 하나이지 않았을까.
“그런 녀석이 지금은... 쯧.”
밝게 시작한 교수의 말이 과거와 지금을 살피고 비교하며 슬픔에 젖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던 은결과 미래도 같이 숙연한 분위기에 젖었다. 특히 은결의 마음 한구석은 여리게 저려왔다. 교수가 알고 있는 사정은 틀림없이 사실이 아닐 테지만, 그렇게나 강하던 수행이 지금은 폐인이 되어있다는 지점에서는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리고 무거운 분위기에 젖어 있던 교수가 그것을 떨치듯 밝은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위로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래도 나는 네 아버지가 정말로 대단했던 건 역시 글이라고 생각한단다. 요즘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글은 읽는 이들과 그 신문의 성격을 고려한 탓인지 건조하게 억제된 채 상당히 무미건조하게 정보를 나열하고 있는 느낌이다만, 그때 적었던 글들은 정말 하나같이- 뭐랄까, 뜨겁고, 파워풀하고 음, 하여간 굉장했지.”
“뭐가 그렇게 굉장했나요?”
미래가 물었다.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길에 끌리듯이 교수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레토릭, 인용, 논리전개- 뭐 흠잡을 데를 찾기가 어려운 수준이었지. 특히 논쟁적인 성격의 글 같은 경우는 같은 입장에 선 사람이 읽으면 그만큼 즐거운 글이 없지. 진짜 통쾌하게 까버렸거든. 그런 만큼 까이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읽고 있으면 원수를 하나 만나게 되지. 그래서 운동하던 애들한테도 좀 경원시 된 것도 있을 거다. 네 아버지가 그때는 좀 다혈질인데다 많이 시니컬해서, 맘에 안 들면 그쪽도 냅다 까버리곤 했으니까. 종속이론 논쟁도 크게는 안 번졌다만 그래서 일어난 것도 있었고.”
거기서 교수는 등허리를 펴며, 문장의 구두점을 찍듯이 말했다.
“하지만 많이 쓰지도 않았고, 널리 퍼뜨릴 생각도 없이 쓴 것이라서 독자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만, 읽어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 시절 쓰여진 어떤 주옥같은 글들에 비해도 떨어짐이 없겠구나. 그리고 나는 그 가운데서도 최고였던 것은 역시 ‘파블로프는 우리의 미래일 수 있는가?’라고 생각한단다.”
‘파블로프는 우리의 미래일 수 있는가’ 은결은 그 말을 속으로 작게 중얼거려 봤다. 어딘가 가슴 한 구석에 싸, 하고 가라앉는 양, 차가운 제목이었다.
*지석님이 추천해 주셨습니다. 충고는 새겨듣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오해를 정정하자면 이 글은 불만이나 분노의 산물이 아니라, 경탄과 흠모의 산물입니다. 이 글이 얌전하다는 것은 제가 경탄하고 흠모하는 작품들에 비할 때 얼마나 얌전한가, 라는 뜻이죠.
*은결의 생각을 저의 생각이라 보시면 매우 곤란합니다. 간단히 증명하겠습니다. 제가 만일 저의 생각이나 사상을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었다면, 왜 이 글 전체를 뒤질 때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상가에 대한 언급은 없거나 극히 억제되어 있을까요? 클라우스부터 읽어오신 분은, 아마 이 글도 처음부터 세심히 읽어보신 분은 알겠지만 한 사람은 흔적조차 이 글에 나타난 적이 없고, 한 사람은 단 한 번 저작의 이름이, 다소 무의미한 방향으로 언급되었을 뿐입니다. 은결은 자신의 논리와 기준에 따라 인용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자기 공부하기 바쁜 찌질이가 가르치긴 누굴 가르칩니까. 큼.
*귀찮은 설명을 피하기 위해 본문을 다소 수정했습니다. 광역 최면은 기초 중의 기초인게 이 글에서도 여러번 나왔는데 이런 설명이 필요했다는게 다소 의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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