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희망을 위한 찬가 - 파블로프는 우리의 미래일 수 있는가_(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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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토요일 오전 수업을 끝마치고, 교실을 나서자마자 은결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미래였다.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냅다 은결의 옆에 서며 그의 교복 옷깃을 잡았다. 기분이 무척 좋았던 듯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되게 차가운 눈길로 동물원 삼총사와 민성이 바라봤다. 더해서, 은결은 한기에 동반된 살기도 어렴풋하나마 느낄 수 있었다. 아, 고릴라는 그렇지 않았는데, 미래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의 표정이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미래야. 좀 떨어지지 않을래?”
그렇지 않아도 시스콘 소리 듣고 있는 판국에 그런 기묘한 소문을 더 강화할 해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을 느끼며 은결이 조심스럽게 동생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미래는 예정된 수순처럼 단박에 그 제안을 무시했다.
“뭐 어때! 사이좋은 남매의 우애를 사해에 과시하는 건데.”
그리고 “쿡쿡”하는 낮은 웃음이 이어졌다. 미래와 은결의 시선이 동시에 그 웃음의 출처로 향했다. 거기에는 쿠로사카가 고개를 숙이고 숨죽여 웃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느끼고, 그녀는 “고멘”하고 말했다.
“두 사람 사이가 너무 좋아서 생각지도 않게 웃음이 나왔네.”
그리고 밝은 얼굴로 두 손을 모으며 사죄의 모양의 취했다. 오른 손목의 소매가 내려가며 짙은 갈색의 팔찌가 드러났다. 통역하던 은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팔목을 쥐었다. 팔찌에 새겨진 십이간지의 감촉이 까끌까끌하니 선명했다. 미래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은결을 올려다보며,
“뭐 그래도 사실이니까. 그렇지 오빠?”
하고 되물었다. 은결은 다소 굳은 안색으로,
“으, 응.”
하고 답하곤 서둘러 일행과 헤어졌다. 쿠로사카의 팔찌가 마음에 걸려 일행의 시선에 대한 적당한 유화책을 고안, 실행할 시간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자기 팔목에 걸려 있는 것과 같은게 걸려 있는걸 보게 된다면 뭐라 변명을 해야 할지, 변명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걷는 은결의 등으로, 찌르는 듯한 시선이 ‘저 시스콘!’ 하는 맹렬한 사념을 품고 전달되었다.
하여간, 미래와 은결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 시복으로 갈아입고, 은사님께 드릴 선물을 챙긴 다음 K대로 향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할아버지야 가게에 가셨을 테고, 아버지는 아마도 오늘도 진경, 그 작자와 함께 무언가 할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문 밖으로는 서서히 따가워지는 햇살이 선명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날씨도 축제를 하기엔 딱 안성맞춤이었다. 6월 중순이면 대학 축제치고는 많이 늦은 편이었지만, 그 편이 준비에 할애할 실질적인, 심리적인 여유가 많아 5월에 하는 것 보다 결과물이 좋은 편이긴 했다. 그늘을 찾아 걸으며 그 햇살을 피하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얼마 있지 않아 서울로 향하는 버스가 도착했다. 안은 한산해서 어렵지 않게 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미래가 자리에 앉고 그 곁에 은결이 서서 손잡이를 잡았다.
“어, 오빠 팔찌 했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앉아있던 미래가 문득, 눈에 이채를 띄며 은결에게 말했다.
“아, 응. 어때? 괜찮지?”
“응. 근데- 그 일본 학생이 하고 있던 거 하고 좀 비슷한 거 같다.”
미래가 의뭉스레 말했다. 은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화급한 어조로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서, 설마. 만일 그렇다고 해도 뭐- 우연이겠지.”
“흐응. 그건 그렇겠네. 근데 어디서 샀어? 나도 같은 걸로 하나 했으면 하는데.”
미래가 다소 호기심 어린 눈길로 은결의 팔찌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충 잘 빠져 나간 듯 하다는데 안도감을 느끼며 은결은 답했다.
“글쎄- 할아버지가 노점상에서 사오신 거라서 나도 잘 몰라. 십이간지 조각이 섬세하고 예뻐서 나중에 조각 할 때 참고 하려고 사신거래. 두 개 사 오신 걸 하나 받은거 거든. 그러니 정히 마음에 들면 아빠나 할아버지한테 부탁해서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은결을 비롯해 수행이나 할아버지가 수공예를 한다는 것은 미래에게도 비밀이 아니다. 취미 수준에서 그 정도는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쿠로사카가 은결과 같은 팔찌를 하고 있는 걸 이후에라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하면 그 팔찌의 출처가 수행이라는 점을 알리기는 좀 꺼려졌던지라 노점상이라 거짓말을 했다. 미래는 유감스런 눈길을 하고 은결에게 말했다.
“그야 그렇지만, 그럼 왠지 재미가 없잖아. 오빠가 찬 거랑 만든 사람이 다르다는 게 너무 확실하게 알려지면 같은 거라는 감각이랄까- 그런 게 좀 없잖아. 커플링 같은 건 원래 태생이 다르면 모양이 같아도 흥이 안 나는 법이야.”
쿠로사카도 자신과 같은 팔찌를 하고 있는 걸 생각하고 ‘커플링은 무슨 얼어죽을-’ 이라 미래의 투덜거림에 속으로 중얼거린 은결이지만, 현명하게 입 밖으로 그 감상을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에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다소 학술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그거, 공감주술적인 생각인걸.”
“공감주술적?”
미래가 고개를 갸우뚱 하며 은결에게 되물었다.
“프레이져라는 학자가 세계 각지의 주술 방법론을 정리하며 붙인 이름이지. 공감주술은 사물의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나 그것에 닿은 사물이 닿았던 사물의 힘이랄까, 본질이랄까 그런 걸 함께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 말해. 지금 미래 네가 말하고 있는 게 그런 거잖아?”
미래가 은결의 설명을 듣고 알겠다는 듯이 손뼉을 작게 치며 말했다.
“헤에- 그러고 보면 시험기간만 되면 애들이 머리카락 한 가닥만 달라고 부탁해 오곤 하던데, 그런 거랑 비슷할까?”
은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딱 그거지. 그리고 그렇게 주술적인 것들이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걸 보자면 어차피 계몽의 이상은 인류에게 걸맞지 않았다고 할까, 그런 게 느껴지곤 하지.”
공감주술은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의 문제로서, 그런 주술적인 것들이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작동한다. 가령 결계를 구성하는 결계들은 공감주술 가운데 모방주술의 완전한 실례이고, 접촉을 통한 능력의 감염은 때론 본인이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에 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무런 힘을 가지지 않는다. 딱 잘라, 미신에 불과하다.
“그래서 벤야민이 말하던 사물의 아우라는 파괴되기는커녕 무수한 복제 가운데서 더 강화된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해. 원조와 진짜의 파괴로 인해 원조와 진짜를 갈수록 사람들이 더 갈구하게 되었으니까.”
말의 끝이 낮아지며 은결의 시선이 미래를 넘어, 버스 창문을 넘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건물과 사람의 풍경으로 향했다. 미래는 아련해져 가는 은결의 얼굴을 의자에 앉아 한 동안 바라보다가, 그 텅빈 시선을 채우려는 듯, 갑자기 부루퉁한 얼굴로 불만스레 말했다.
“아, 0.3%의 미래가 30%의 오빠한테 지금 바보 취급당했다!”
“에?”
갑작스런 미래의 항의에 은결은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미래가 화난듯 눈매를 세우며 은결에게 말했다.
“계몽의 이상이란 이성의 적극적이고 올바른 사용을 통해 합리적인 사고를 사람들이 하게 된다는 건데, 오빠는 계몽주의를 지나온 지금 시대에도 비합리적인 공감주술적 사고가 폭넓게 이루어지도 있는걸 보자면 그게 인류에게 걸맞지 않았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그런 걸 하는 놈들은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는 다소 모자란 사람들이고, 그럼 굳이 비합리적인 이유 때문에 같은 출처의 팔찌를 찾으려는 미래도 바보란 말이잖아. 안 그래?”
“아니, 계몽주의의 이상이 인류에게 걸맞지 않았다는 게 굳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은결의 가슴 한 구석이 뜨끔, 하고 뛰었다. 그는 서둘러 말을 되돌리려 했지만 아직 미래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미래는 은결이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꼭 그런 방식으로 볼 필요는 없잖아. 정말 그런걸 진지한 마음으로 믿는 사람도 거의 없을 거고, 있다고 해도, 가령 모나리자 같은 위대한 예술작품은 충분한 해상도로 디지털화하면 원본과 꼭 같은 수준의 그림을 볼 수가 있겠지만, 그래도 원본은 만일 거래가 된다고 하면 그 가격은 어마어마할 거 아냐. 레코드 판 나올 때 비평가들은 실황공연 다 망할 줄 알았다는데 요즘도 활발히 하고 있고 말야. 그런 거랑 같은 정도의 감각이라고 나는 생각해.”
은결의 의견을 부정하는 미래의 말은 어딘가 절절했다. 때때로 어딘가 허망하고 차가운 의견을 말하는 은결을 볼 때면, 그녀는 그가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기 때문이다. 뿌리 없는 나무처럼, 줄 끊어진 연처럼, 세상에 대한 은결의 모습은 위태하고, 초조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그 허망한 시선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그녀는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미래의 말을 들으며 은결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녀의 말을 부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비를 통해 자신의 계급을 증명하려는 인간의 본원적 허영심이야 말로 예술품의 가치를 그토록 높게 만들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고릴라의 낙서가 비평가들에게 훌륭한 추상화로 판단되는 것을 보자면 예술을 예술로서 존립시키는 본질적인 요소는 없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은결에게는 지금 미래의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수백 가지 사례들과 수천가지 논리들이 있었다. 그것의 어느 한 가지도, 아마도 미래는 반박할 수 없을 터였다. 조용한 마음으로 은결은 그것들을 차분하게 훑었다.
곧 은결은 마음을 결정했고, 그것을 미래에게 말했다.
“그건 그렇겠구나. 하기야 예술은 인간의 가장 완전한 자기표현의 한 방식이기도 하지. 때로 거기엔 스스로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예술가 개인의 진실되고도 고귀한 부분이 반영되기도 하고 말야. 소외를 넘어, 자기 자신의 진실 된 반영조차 넘어, 풍부해지고 강력해지는 자기 자신을 예술은 성취하게 해 주기도 하고. 그런 걸 생각하면, 미래 네 말이 옳겠구나. 소외가 일상이 된 이 사회에서, 소외를 넘어서는 자기실현의 예술은 합리를 넘어 소중하겠지. 그렇기에 원본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주술적 시도는 굳이 부정될 것만은 아닐지도 몰라. 아니, 그것은 메타적인 방식에서 더욱 합리적인 것인지도 모르지. 하핫, 이거 미래한테 한 방 먹었는걸. 과연 0.3%!”
다소 불안하던 미래의 얼굴이 긍정적이던 은결의 대답에 확 펴졌다. 그녀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콧대를 높게 세웠다.
“에헴.”
그 태도가 은결은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로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이 작은 여동생의 순결한 시도를 굳이 상처 입히면서 자신의 태도를 고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은결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그럴 만큼 가치 있는 생각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치 있는 생각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계속 고수하는 자신 역시 비합리적이기는, 생각해보면 마찬가지였다.
그러고도 은결과 미래는 대화를 지속했다. 곧 버스가 멎었다. 정류장 앞에서부터 이미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다. 버스 안으로 방송이 흘러나왔다. K대의 앞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클라우스나 이거나 그게 그거다. 가 되겠군요. 핫핫.(...) 어렵다는 분들은 대게 이 글의 행간을 읽기 위해 노력하시는 것 같은데, 이야기의 호흡은 길고, 인용은 잡다하고, 완결도 안 된 글인지라 다소 어려움이 있겠죠. 그렇지만 문장은 확실히 단문위주로 나가고, 장문인 경우는 단문처럼 읽을 수 있도록 효과를 많이 배려했는데, 그런 부분은 편해지지 않았습니까?
*알렉은 여자를 좋아해서 오입질을 한 게 아니라 개인의 개인에 대한 정복의 수단으로서 사랑이란 방법론을 택한 겁니다.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가 카사노바하곤 다릅니다. 그리고 알렉은 자기 시대의 패러다임을 넘어선 캐릭터이기 때문에 카사노바와는 위상도 다르죠. 알렉은 그 시대를 지배하는 관념과 철저하게 대결했고, 그로인해 피폐해진 캐릭터니까요.
*아웅 힘드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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