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74화 (74/300)

#   74-희망을 위한 찬가 - 파블로프는 우리의 미래일 수 있는가_(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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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그림자가 어두운 골목을 한 순간 갈랐다. 사소한 바람이 뒤를 이었다. 대기가 낮게 울었다. 대지의 깊은 곳이 흔들렸다. 그 그림자의 앞에서, 은결은 주먹을 길게 뻗었다.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흐름이 굴강한 물리력을 형성하며 그가 노리는 어둠을 향해 치달았다. 희끄무레한 사고의 집합체는 그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의 밀도를 낮추고 넓게 퍼졌으나, 뒤이어진 결계의 힘이 그 시도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파지직!

반투명한 감색 결계는 복잡한 기호의 운동을 보이며 웅웅 떨고, 사념체를 그것의 힘으로 속박했다. 그 기호의 율동 뒤로, 은결은 할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싱긋 웃어 이 성공적인 연계에 대한 감상을 할아버지에게 전달하고는 느릿한 걸음으로 속박된 사념체에게로 다가갔다.

-무서워, 미워, 싫어, 좋아. 가지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짓밟을 거야. 짓밟히기 싫어. 내일은? 모레는? 일주일 뒤는? 십년 뒤는? 늙으면? 아프면? 가져야 하잖아? 기억되는 것은? 잊혀지는 것은? 모두 거짓말하고 있잖아? 그것만이 선하잖아? 무능한 자는 죽어야 하잖아? 무능하잖아? 무능하지 않잖아? 그렇잖아? 그렇잖아? 그렇잖아? 그렇잖아? 그렇잖아?

그의 접근과 더불어 사념체는 명료한 두려움의 표현을 내보이며 복잡한 사념을 주변으로 퍼트렸다. 보통 사람이 그 사념의 영역권내에 있게 된다면 세상 만물에 대한 한없는 증오와 자신에 대한 끝없는 우울함을 느끼다 당장 자살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러나 은결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을 뿐, 작업을 속행했다. 어차피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보통 사람과는 다른 범주로 세상을 나누어 살아가고 있다. 타인의 일상이 그에겐 비일상이다.

이내 은결의 손바닥이 사념체의 물질 구성에 가 닿았고, 맞닿은 부분으로부터 금색 빛이 일며 사념체의 존재구성을 해체했다. 그러자 단말마 같은 사념의 덩어리가 토해졌다. 증오와 두려움과 허영과 사랑이 음습하게 뒤섞여 종래에는 무엇이라고도 정의할 수 없을 거시기(id)적인 감정의 폭발이었다. 마지막 감정의 흐름이 음습하고도 괴악하게 대기를 관통했고, 작업은 종료되었다.

“수고했다.”

할아버지가 결계를 해제하며 말했다. 반투명한 감색 결계가 사라지며 그 뒤에 있던 은결의 얼굴이 명확해 졌다. 그는 빙긋 웃으며 할아버지의 칭찬에 대답했다.

“뭘요. 그보다 아버지가 만든 송수신부는 정말 좋군요. 연계가 이렇게 부드럽게 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는데. 전술적인 측면에서 매우 유효한걸요.”

할아버지가 사념체를 몰고, 은결이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는 단순한 작전이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들어먹힌 것은 서로간의 소통이 원할 했다는 점에 기댄바가 컸다. 상황이 예측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제깍 연락함으로서 상대 쪽도 그 변화에 같이 대응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껄껄. 기만 못쓴다 뿐이지, 다른 부분에서도 녀석이 녹슨 건 아니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겠지. 다만 나와 네 기를 빌려 만든 것이니 만큼 제 녀석 자신의 힘을 주입해 만든 것에는 미치지 못하겠구나.”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거겠죠.”

비감이 깃든 어조로 은결이 말했다. 그 현실의 인정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는 할아버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은결에게 다가가 말없이 머리를 그냥 한번 쓰다듬었다. 은결은 그 손길에서 낮은 위로를 느끼며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요즘 사념체가 미묘하게 강해진 것 같지 않나요?”

“그렇구나. 방금 없앤 녀석만 해도 미묘하게 자의식이 강했지. 하지만 그것을 조장할만한 사회 현상 같은 것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구나. 어쩌면 이번 봄에 바람을 타고 이곳으로 쓸려왔던 사념체들 처럼 이 녀석 역시 타지의 사념인지도 모르지.”

“그런 것 치곤 관념을 구성하는 언어가 선명한 한국어 였습니다만... 하기야 지난번 황사에 쓸려온 사념체도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던 것이 있었죠. 그걸 고려하면 그렇게 생각해도 별반 무리가 없을 듯 하네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여 은결의 말을 긍정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일단 너와 같이 행동하는 것은 이번 주가 오늘이 마지막이 되겠다만, 언제든 힘이 필요하면 부르도록 하려무나.”

“예.”

“이만 들어가자.”

그리고 두 노소는 역장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섰다. 은결은 도시의 아래를 바라봤다. 도시의 무의미한 풍광은 도심지의 휘황한 빛을 중심으로 가지 치듯 뻗어나가며 점차 그 빛이 수그러들고 있었고, 방금 자신이 올라선 골목길에 이르러 겨우 쓸쓸한 가로등의 불빛만이 비춰들고 있었다. 은결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별이 보이지 않는 밤하늘 아래에서, 별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슬픈 어둠은 어떤 것일지, 생각해봤다.

“......”

다만 아득했다.

옥상에서, 은결은 수행의 사설을 읽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옥상의 공간은 건물의 외부라기보다 차라리 내부 같은 느낌을 주었다.

-1971년 8월 15일 미국의 금태환조치 중지발표는 고정환율제를 유지할 수 없었던 탓으로 일어났다. 미국이 60년대 세계 각국이 자국의 화폐가치를 회복한 이후로도 달러 유포를 그칠 수 없었던 때문이다. 당시의 냉전 구도 가운데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무리하게 베트남전을 지속했고, 그 결과 엄청난 양의 달러를 유포하게 된다. 여기 더해 제 3세계 각국의 민족의식과 독립의지가 고취되면서 그들 국가의 방위에도 많은 비용이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달러의 과도한 유포는 필연적으로 달러의 가치를 하락시키게 되고, 실제 달러의 가치와 미 정부에서 유지하고 있는 달러 가치와의 차이를 통해 금을 거래함으로서 이득을 취하는 투기꾼이 생겨나게 된다. 이에 대해 미국 정부는 달러의 고정가치를 조정함으로서 브레튼우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71년에 들어서 금태환조치는 중단되고 만다.

브레튼우즈 체제, 그러니까 당시 세계 경제 체제 그 자체가 미국의 헤게모니를 기반으로 한 달러 가치의 고정화로 유지되는 것이었기에, 브레튼우즈 체제의 폐지는 그렇지 않아도 저물어가고 있던 미국 헤게모니에 대해 중대한 일격이 되었고, 이는 세계 질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영향력이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은 세계 경제였다. 그제까지의 호황이 끝나고 장기 불황이 시작된 것이다. 70년대 까지 세계 경제의 청신호는 미국의 헤게모니 장악이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들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 시장의 개방과 원조, 군사적 보조가 각국에게 경제적 여유를 가능하게 함으로서 복지국가 건설을 가능하도록 했고, 이것이 시민들을 만족시킴으로서 공산화에 대한 정치적 열망을 제거하는데 성공케 했으나, 과도한 달러 지출로 미국의 패권이 흔들리게 됨으로 다른 국가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보조가 어려워지게 된다.

이 패권 유지의 실패는 케인즈 주의의 실패와도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케인즈 주의는 정부가 경제에 개입해 돈을 풂으로서 경제를 활성화하고, 그 국가에서 생산된 생산물을 모두 소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골자로 삼는데, 고정환율제의 중단과 더불어 초국적 자본을 위한 발판이 마련되고, 정부의 경제 개입은 돈의 가치가 유동적이 된 당시 상황에서 투기 자본의 좋은 먹잇감일 수 밖에 없음으로 그것은 스태그플레이션의 악화로 이어질 뿐,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여기 더해 73, 74년에 석유파동이 일어나게 된다. 석유를 태워 굴러가는 기계나 다름없는 세계 경제에 있어, 이것은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에 이은 심각한 사태일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만한 기술적 발전이나 시장의 확대는 이어지지 않아 자본의 이윤율은 저하된다. 장기불황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기불황에 대해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경제적 흐름이 도래하게 된다.

“뭘 읽고 있어?”

쿠로사카가 물었다. 은결은 종이에서 시선을 떼며 답했다.

“아버지가 신문에 간단하게 연재하고 있는 글.”

“좀 볼 수 있을까?”

수행의 글이라는데 흥미가 동한 듯, 쿠로사카가 눈에 이채를 띄고 말했다. 은결은 프린터를 내밀며 말했다.

“상관은 없지만- 봐도 별로 재미는 없을걸. 네가 기대하고 있을만한 내용은 아냐.”

은결이 내민 프린터를 받아들고 한동안 그 위에 시선을 주던 쿠로사카가 고개를 들고 다시 종이를 은결에게 내밀며 간소하게 답했다.

“흐음. 그렇군. 내 관심 밖의 내용이야.”

“하지만 일본도 이런 걸로 시끄럽지 않아? 우정국 민영화라던가.”

현재 일본 수상이 정치적 개혁을 구호로 걸고 수행하고 있는 최대의 현안이라면 틀림없이 우정국 민영화였고, 이에 대한 찬반으로 일본열도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고 은결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좀 거시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이 우정국 민영화란 결국 신자유주의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했다.

“뉴스나 신문에 자주 이야기 되니 나도 알긴 하지만 자세한 사정은 몰라. 관심을 가진 적이 없으니까. 나로서는 일본 우정국 민영화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한국인 고등학생이란 게 더 흥미로운걸.”

쿠로사카가 조소하며 답했다. 은결은 뻘쭘해져서 변명했다.

“으음, 그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일본 우정국에 쌓여있는 300조 엔이 민영화되면서 풀리면 바로 옆 동네인 우리나라에 영향을 안 미칠 수가 없으니까 말야. 그건 사념체의 형성에 관련해서도 상당히 영향을 미치게 될 거란 말이잖아. 그건 일본도 마찬가지잖아?”

세계 10위의 경제규모를 오가는 한국의 일 년 예산이 200조원, 엔으로 바꿔 20조 엔이란걸 생각하면 300조 엔이란 그런 돈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계 전체의 경제 질서가 재편될만한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 영향력이 작을 리가 없었다.

“그건 네 말이 옳겠지. 하지만 없던 관심이 그렇다고 생기진 않아. 안다고 해서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어. 너무 먼 곳을 바라보다 탈레스처럼 꼬꾸라지고 싶지 않으니까. 너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보다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게 어때? 그럼 더 강해질 거고, 그만큼 세상을 더 도울 수도 있을 텐데.”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의 연장에서 이런 것들을 주목할 뿐이야. 그리고-”

씁쓰름하게 답한 은결은 주머니를 뒤져 팔찌를 하나 꺼냈다. 나무로 된 것이었지만, 섬세한 십이간지의 조각이 보는 이의 마음을 끌었다. 쿠로사카는 그 팔찌를 받곤 높이 들어 태양빛 가운데서 한 동안 황홀한 시선으로 그것을 살폈다.

“...아주 좋은데. 놀라워.”

감정이 흘러넘쳐 말이 된 듯한 태도였다.

“십이간지를 통해 술식을 삽입했구나. 하지만 그 이상은 읽을 수가 없어.”

계속해서 팔찌를 살피던 쿠로사카가 알아챘다는 듯 말했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암호는 걸려있지 않지만, 기호에 대한 의미부여와 해석 방식이 이세와는 다를테니 술식 구조의 해명은 굉장히 어려울거야.”

쿠로사카는 팔찌를 오른쪽 팔목에 차며,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수식을 취하며, 은결에게 검 끝을 내밀었다.

“오늘도?”

“일상의 노력만이 배신을 않는 법이지.”

쿠로사카는 희미한 웃음과 더불어 간단하게 답했다. 검 끝에서 쪼개지는 햇살의 찬연함이 계절의 흐름을 증명하고 있었다.

*당근이지 님의 추천에 감사의 마음을 보냅니다.

*이 글이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보다 읽기 편해졌다니, 노력이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게 증명된 것 같아서 아주 기쁩니다. ^^

*성원해 주시는 분들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다음 화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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