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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72화 (72/300)

#   72-희망을 위한 찬가 - 파블로프는 우리의 미래일 수 있는가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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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옷을 내렸다. 등을 휘돌던, 친숙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타자인 수행의, 정확히는 할아버지의 힘은 이미 사라졌다. 그의 기맥으로는 본연의 힘이 맥박치듯 휘돌고 있었다.

“아버지, 굳이 이렇게 지속적으로 검사해야 하나요? 특별한 이상은 느낄 수 없었는데.”

옷매무세를 정리하고 은결이 수행에게 물었다. 오늘도 그의 몸에 이상은 있지 않은지 수행이 비정기적인 검진을 행했다.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현재 상태를 들키면 안 된다는 걸 생각하면 다소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현재는 괜찮다만... 그 술식에 대해서는 나 역시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않단다. 네 몸에 언제 어떤 일이 발생할지에 대해 나도 장담할 수 없지. 그러니 다소 귀찮더라도 자주 검진을 행하는 게 옳단다.”

수행이 걱정스럽게 대꾸했다. 그러고보면 자신의 어금니는 카미의 탓이라 치지만 그의 힘이 녹은 것은 명백히 술식의 영향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가 도출되기까지의 정확한 메커니즘은 은결도 역시 알지 못했다. 이번에야 그 힘이 좋은 방향으로 작동했다곤 하지만, 이런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힘은 언젠가 파국을 부르기 쉽다. 수행의 말은 옳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만... 한데, 그 술식을 통해 일어날 수 있는 결과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령, 술자의 힘이 해체된다거나, 하는 그런 방향으로도 작동할 수 있을까요?”

한동안 생각에 잠긴 다음, 수행이 말했다.

“글쎄다,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할 것도 없겠지. 원리적으로 그 술식은 모든 것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할 수 있으니까. 술자 자신의 힘이라면 한결 더 친화성이 높을테고. 그러나 그 해체가 좋은 방향으로 작동하기 힘들겠구나.”

역시. 하고 은결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행의 말에 따르자면 자신의 지금 상태는 그 술식의 힘으로 인한 것으로 보아 무방했다.

“그런데, 나쁜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가령 어떤 것들이 가능할까요?”

앞으로도 카미의 힘을 빌려할 할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자신의 힘이 예전 수준으로 돌아왔다곤 해도 지난번 싸웠던 라이칸 슬로프와 같은 경우 그 예전과 같은 수준의 힘으로도 상대하기 어려운 괴수였다. 어차피 주변에서는 그런 일이 생길 경우 은결을 전력으로 보지 않을 생각인 듯 했지만, 가능하면 자신도 전력으로서 참가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난번과 같은 모험을 다시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몰랐다. 때문에 어떤 위험부담이 있을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숙지해 두는 편이 좋았다.

“말했듯이 나도 이 술식에 대해 충분히 모른단다. 그런 것들을 알고 있을 수준이라면 이미 실전에 적용했겠지. 그것이 지닌 힘은, 선용한다면 정말로 세계의 구조를 근본부터 바꿀 수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아버지라면 사고실험(思考實驗)을 통해 어느 정도 추리는 가능하지 않겠어요?”

은결이 물었다. 누가 뭐라 해도 수행은 전 세계를 통틀어 그 술식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라면 만족할 수준까지는 아니라도 술식을 활성화시킴으로서 발생할 여러 결과에 대해 상당히 근접한 결과들을 도출해 낼 수 있을 터였다. 은결의 말을 듣고 수행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눈을 감았던 그가 눈을 뜸과 동시에 말했다.

“흠...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면, 술자가 술식에 동화되어 버릴 수도 있겠구나.”

“술자가 술식에 동화된다니요?”

수행은 시선을 하늘로 올리고 한동안 손가락을 허공에서 뱅뱅 돌렸다. 복잡하게 얽힌 말을 정리하는 모양이다. 곧 정리가 끝난 듯 수행은 입을 열었다.

“간단히 말하면, 해체된다는, 죽는다는 거지. 하지만 그 해체가 간단하진 않겠구나. 동화를 통한 해체이니, 거의 인신(人神)적인 힘을 발휘할 가능성도 아마 있을 성 싶은데... 글쎄다. 이 부분은 좀 더 정확한 계산이 필요하겠다만 꺼지기 직전의 불꽃이 가장 밝듯이, 강대한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적잖게 있다. 세계의 질서 그 자체와의 동화이니.”

“인신(人神)적인 힘...”

되따라 중얼거린 은결의 말을 수행이 받듯이 말을 더했다.

“틀림없이 사람이 손에 쥐기엔 벅찬 힘이 될게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

“그렇군요...”

“네가 술식의 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나도 이해한다. 카미의 짓이라곤 하나 네게 그 기억의 단편이 남아있다면 그 술식이 활성화됨으로서 발생한 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겠지. 선의는 넘치지만, 힘은 부족하다고 자주 한탄하곤 하던 네가 그 힘 매료되지 않기는 어려울 게다. 그렇지만, 과도한 관심은 끊도록 하려무나. 다시 말하지만 사람이 손에 쥐기엔 벅찬 힘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다만, 딱 한번 아버지의 말을 거부하겠습니다. 이것은 말을 이루지 못한 은결의 이어진 대답이다. 수행이 화제를 바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구나.”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번 주 토요일 은결은 수행을 대신해 은사님을 뵈러 가기로 했다.

“선물이라던가, 잔 준비는 다 해뒀어요. 미래가 많이 좋아하던걸요.”

“하하. 그것 다행이군. 너도 간만의 가족 서비스니 열심히 하렴.”

수행이 웃으며 말했다. 은결이 뚱해져서 낮은 어조로 말했다.

“그거, 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더구나 가족서비스라고 하기엔 ‘간만’이란 수식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그거야 그렇다만, 유감스럽게도 미래가 나보다 널 더 잘 따르니 어쩔 수 없지. 적재적소라는 정명의 논리는 언제나 옳지.”

수행은 어깨를 슬쩍 들어 올리며 은결의 말을 받아넘겼다. 은결이 어깨를 들어 올릴 때와 많이 비슷한 느낌이었다. 은결은 한숨을 쉬며 부언했다.

“..기뻐해야 할까요?”

시동생 시집살이도 아니고, 여동생 시집살이를 하고 있으니, 그게 꼭 반갑지는 않다. 자신을 잘 따라주는 거야 기쁘지만, 아무리 귀엽고 예쁜 여동생이라도 그녀를 걱정해 만사를 조심해야 한다면 역시 부담이 된다. 수행은 껄껄 웃으며 답했다.

“그럼. 기뻐해야 하고말고. 하물며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할 거다. 지나고 보면 다 추억이니 지금 잘 해주려무나.”

“하기야, 그건 그런가요.”

은결도 마주 웃으며 납득의 뜻을 담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살짝 어깨를 들어올렸다.

다음 날 점심 학교의 옥상에서 은결은 언제나 그러하듯 술식을 해체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동안 검식을 연습하던 쿠로사카가 은결을 향해 도발적인 목소리로 곧장 말했다.

“대련하자.”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말이었다. 은결은 말문이 막혀 ‘에?’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쿠로사카는 냉랭한 신색으로 다시금 ‘대련하자.’하는 말을 반복했다. 다행이라면 이번에는 그것만으로 끝내지 않고 나름대로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졌다는 점이다.

“이제까지는 네가 너무 약해서 적당한 대련 상대가 아니었지만, 기의 총량을 생각할 때 지금이라면 꽤 쓸만한 대련 상대니까. 기초 수련은 빠짐없이 매일 하고 있지만 역시 일본에 있을 때 처럼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기 위해서는 실전적인 훈련을 빼놓을 수 없잖아. 너도 갑자기 늘어난 힘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을 테니, 이건 네게도 꽤 도움이 될 거야. 지금 네 상태를 다른 사람, 가령 너희 아버지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이제까지는 너무 약해서 적당한 대련 상대로 부적합 했다니, 대놓고 사람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 약한 힘으로도 은결은 과거 키리야미를 해방하지 않은 쿠로사카를 압도한 적이 있다. 물론 심리적인 틈을 파고든 일종의 기습공격 덕분에 가능했던 승기(勝機)긴 해도 어디까지나 승리(勝利)였다. 그걸 생각하면 이렇게 대 놓고 무시를 당하면 그게 과히 기분이 좋진 않았다.

“좋아.”

하지만 은결은 담백하게 답했다. 거기엔 아무런 감정의 잔재가 묻어 있지 않았다. 디지털화된, 인간의 깔끔한 기계음 같은 목소리다. 그는 굳이 자신이 그녀가 생각하는 것 만큼 약하지 않았다던가, 하는 그런 점을 들어내고 싶진 않았다. 자신의 자존심이란 결국 시시한 문제일 뿐이었고, 이런 기준에서 강하거나 약해봐야 결국 침묵만이 예비되어 있다는 점에서 동일했다. 은결의 이상 앞에서 그 두 힘은 아무런 격차가 없는 가소로움의 한 표상으로 환원될 뿐이니까.

“...너.”

쿠로사카가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하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할 말은 분명하게 혀끝에 맴도는데 그걸 선뜻 언어로 전환시킬 수가 없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은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

“아냐. 네가 좋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겠지.”

그리고 쿠로사카는 검을 고쳐 꼬나 잡았다. 은결이 당혹스런 표정을 보이며 물었다.

“벌써?”

“굳이 장대한 준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

“그것도 그런가.”

그리고 은결은 키리야미의 예리함에 맞서 자세를 취했다. 양자의 힘이 반발하며 설명하기 힘든 긴장감을 이끌어냈다. 두 사람 사이 존재하는 공간을 진공으로 만들고 모든 종류의 타자를 배제함으로서 가장 격렬한 존재 투쟁이 벌어지는 관념적 기의 충돌. 그곳에서 의도와 의도가 형상화 되고, 기척과 기척이 되마주치며, 한 순간을 노리는 무수한 동작들이 사고 속에서 실현되었다가 스러졌다.

정신이 점차 집중되며 세계의 무수한 다른 것들을 지워나갔고, 결국 각자의 인식 속에는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상대 밖에 남지 않았다. 황홀하도록 깨끗한 세계였다. 그곳에는 세상이 원래 그러하듯 비참하도록 무수한 변수가 존재하지 않았다. 순결한 사람의 의도만이 이 세계를 결정했다. 은결은 작게 ‘아아-’하는 신음인지 경탄인지 판단하기 힘든 소리를 흘렸다. 작은 틈이 발생했다. 그 틈을 따라-

바람처럼, 물처럼, 번개처럼-

부드럽고, 빠르고, 아름답게-

쿠로사카가 움직였다.

*니나노 님과 하이문 님이 추천해 주셨군요. 감사의 마음을. 요즘 되게 불모스런(찌질스런) 기분이라서 이제까지 해온 게 다 헛되고, 앞으로 할 것도 다 헛될 것 같다는 기묘한 좌절감에 휩싸여 있었는데, (전도서 1장 2절~3절) 덕분에 조금은 나아졌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찌질함에는 좌절하고 있습니다만.

*수행의 사설이라던가 은결이 인용하는 텍스트와 사건, 글 전체를 일관하는 분위기, 이런 것들을 종합하면 어떤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습니까? 뭐 안 보여도 상관은 없습니다. 조금 더 가면 어차피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날테니까요.

*쩝. 이 글의 인용이 다소 거친 것은 사실인데, 독자 여러분에게 연결고리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선 좀 불가피한 면이 있습니다. 현재 장르문학의 문법에 익숙한 독자분들에게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사건을 통해 의미를 드러내려 했다간 더 불친절한 글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건 클라우스 학원을 쓰면서, 특히 자아 개념의 불확실성을 드러내기 위한 사건전개를 하면서 뼈저리게 느꼈던거죠. 드는 품에 비해 성과가 너무 처참합니다.

그리고 저는 포스트모던 안 좋아합니다. 이 글도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해 다소 적대적이죠. 취할만한 점이 없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만.

*저 같은 찌질이에게 책 같은 거 추천 바라시면 안 된다고 했는데 계속 바라시는 분들이 있군요. 그럼 정석적인 거 하나만 추천하겠습니다. 램프레히트나 힐쉬베르거, 코플스턴 서양철학사 중 하나를 택일해서 우선 정독하십시오.

램프레히트는 그냥 적당히 관심만 있는 사람, 힐쉬베르거는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은 사람, 코플스턴은 아주 뽕을 뽑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합니다. 각자의 수준에 맞춰 한번 정독하고, 연습장을 하나 사서 정리해가면서 두 번째로 읽으십시오. ‘아주아주’ 열심히 하면 렘프레히트는 한 3개월, 코플스턴은 3년 안에 한번 정도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찌질한 기분은 여전히 전신을 장악합니다만, 뭐 노력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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