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희망을 위한 찬가 - 역사의 끝에 선 영웅(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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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멀었다. 땅에 피어난 다채로운 빛의 대호는 하늘의 은빛 미리내를 잡아먹고 인간을(혹은 그들의 욕망을) 증명한다. 그러나 발밑에 펼쳐진 저 먼 다채색 빛의 혼탁한 응집물을 바라볼 때면, 은결은 언제나 상상력의 부족을 느낀다. 저 빛 하나하나가 자신의 의지를,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고통을, 자신의 행복을, 자신의 목적을,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안개 낀 아침에 실눈을 뜨고 막힘없는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처럼 희미하다. 풍경은 멀었고, 먼 풍경 속에 개인은 언제나 소거됐다. 그 소거가 설명하는 상상력의 부재에서, 은결은 언제나 희미한 절망의 냄새를 맡았다.
‘읏-!’
은결은 생각을 끊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사념체의 기운이 감지됐다. 은결의 발이 역장을 박찼다. 그의 옆에서 할아버지가 부드러운 발놀림으로 은결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곧 두 사람은 사념의 발원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두운 뒷골목이다. 그곳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뭉실거리고 있었고, 그 아래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결계를 부탁하마.”
“예.”
할아버지는 은결에게 간결하게 말하고는 곧장 사념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일흔을 넘은 나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정정함이다. 기를 운행시키는 술식의 완성도 자체는 수행을 거쳐 완성된 은결의 것에 비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의 연륜은 그 완성도의 차이를 어렵지 않게 메우고 있었다.
최초의 충돌이 있기 전에 은결은 서둘러 결계를 펼쳤다. 넓은 영역으로 최면효과가 발생했고, 대기의 운동이 제한되었다. 사념체와 대치한 할아버지는 은결의 결계를 느끼고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카미의 힘으로 능력에 제한을 받고 있다고 치기에 은결의 결계는 완성도와 효과가 대단히 높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사념체가 꾸륵꾸륵 대며 할아버지를 향해 덮쳤다.
“핫!”
할아버지는 짧은 호흡을 토하며 두 손을 모아 사념체와 충돌시켰다. 콰앙! 하고 깊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사념체의 안개 같은 육신이 뒤로 튕겼다. 그 곳에는 은결이 서 있었다. 그는 의심을 사지 않도록 힘을 조절하며 오른쪽 주먹을 사념체의 육체 속으로 쑤욱 집어넣었다. 기에 의해 반발이 일지 않도록 역장은커녕 기 그 자체의 운행도 제한했기에 사념체의 육신이 품는 음악한 기운이 그의 팔을 둘러싸며 침식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것은 계산했던 일이다.
“하압!”
은결은 기합성을 내지르며 꽉 쥐었던 주먹을 펼쳤다. 팔 전체에서 하얀 빛이 일었다. 사념체의 몸통 곳곳으로 선연한 빛줄기가 뻗어 나왔다. 동시에 역장이 발동하며 모든 음악한 기운을 튕겨냈다. 사념체는 단 일격에 산산조각이 났다. 인간과 달리 정형화된 육체를 가지지는 않지만 절단상태를 회복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이렇게 산산조각이 난 상태라면 사실상 소멸상태와 같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빌빌댔던 사람이란게 믿어지지 않는 담백함으로 사념체를 파괴하고, 은결은 느긋하게 근처에 떨어져 있는 사념체의 육신을 제거했다. 할아버지가 가세했다. 두 사람은 조각난 사념체의 육체를 차근차근 제거했다. 작업이 모두 끝나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 일을 모두 끝내고, 은결은 결계를 해체했다. 웅, 하며 공간의 현실성이 돌아왔다. 할아버지가 은결의 곁에 다가오며 말했다.
“그간 기술이 많이 늘었구나.”
“이제 기의 총량 문제로 고민해봐야 아무 소용없으니까요. 이왕이면 바닥 부수던 것도 좀 줄이고 말이죠.”
은결은 머쓱하니. 동시에 조금 긴장하며 답했다.
“하하. 그러고보니 그렇군. 하지만 이건 놀랍구나. 기술적으로 네가 진일보한 것은 명백하게 느껴진다만, 그래도 이건 네 기의 총량이 정상적이었을 때 보다 더 강해진 것 같으니.”
“서, 설마요.”
정곡을 찌르는 할아버지의 말에 은결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좁혀졌다. 기의 총량을 섬세하게 조절해 기술을 운용했지만 할아버지의 연륜 앞에서는 완벽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앞으로는 좀더 주의할 필요가 있을 듯 싶었다.
“껄껄. 하여간 잘하면 앞으로 뉴스에서 도천시의 도로를 부수고 다니는 괴인에 관한 소식을 듣지 않아도 좋겠구나. 그게 제일 기쁘군.”
“아, 하하...”
은결의 웃음이 건조했다. 할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한 내용이 그로서는 전혀 웃기지 않은 내용인 까닭이다. 덕분에 도천시에서는 괴상한 소문도 많이 돌았었고, 사념체에 공격받은 사람을 미처 구하지 못하고 싸웠던 때도 종종 있었던 탓에, 어차피 잡힐일은 없지만 살인자라는 오명도 뒤집어 쓴 적도 있다.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손자의 그러한 태도를 정겹게 바라보며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럼 한 두어 시간 더 돌아보고 이만 돌아가도록 하자꾸나.”
“예.”
은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은결도 뒤따라 올라가려다 뒤를 바라보고 멈칫, 동작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쓰러진 남자를 향해 있었다. 할아버지가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왜 그러느냐?”
“...아무것도 아녜요.”
은결은 고개를 가로젓고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길에 쓰러진 사람을 문득 쳐다보았을 때 슈퍼맨이 생각났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것도 침묵한 슈퍼맨의 선행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도.
“......”
역장을 밟을 때마다, 다시 미세한 풍경이 작아지며 거대한 빛의 덩어리로 뒤바꼈다. 사방의 허허로움이 그 빛의 존재감을 강조했다. 도시의 먼 풍경이었다. 혼탁한 빛의 다채로움만큼, 혼탁한 욕망이 슬프게 뒤엉켜 있을 광경이다. 그 혼탁에서 발생하는 악과 싸우면서, 자신은 혼탁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마음이 쓸쓸했다. 그 공허에 재촉 받는 쿠로사카의 질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역사의 끝에 서 있는 것은 슈퍼맨이 아니라 너였던 거 아냐?’
은결은 입술을 물었다. 폐부를 뒤흔드는 질문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은결은 슈퍼맨을 보며 거기 자신을 투영하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은 슈퍼맨만큼 강하지 않지만, 그와 같이 세상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만큼 무지하다는 데서 동일하다. 그래서 은결은 여전히 그녀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대신에, 은결은 석가를 생각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석가가 태어나며 외쳤다는 이 한 마디 신화적 선언은, 물자체(物自體)를 접할 수 없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간명하게 설명해낸 유아론적 선언의 한 극치다. 어떠한 인식의 체계도 세계의 분명한 실재성을 증명할 수 없다면, 그 세계의 실재성은 다만 개인의 믿음으로 환원될 뿐이고, 세계가 개인의 마음으로 환원될 뿐이라면, 모든 개인은 하늘 위, 하늘 아래를 통틀어 독존하는 세계의 창조자이자 유지자로서 존귀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러나 그 존귀함이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진정으로 타자를 생각하기 어려운 그 상상력의 한계는 다시 인간 존재의 저열함을 동시에 표상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은결은 역사에 끝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서 이념은 욕망에 패배하고, 현실은 이상을 짓누른다. 그곳은 인식의 로도스 섬이다. 그곳에서 뛰어야만 했다. 그러나 뛰어오를 수 있을까? 이제까지 모두 실패했다. 은결은 고개를 들었다. 밤이 허허로웠고, 도시는 휘황했고, 달은 쓸쓸했다.
“-나는, 역사의 끝에 서 있고 싶지 않아.”
생각의 끝에서, 은결이 그렇게만 읊조렸다. 그것만이, 은결이 명료하게 주장할 수 있는 자기의 내용이었다. 달이 쓸쓸하다. 마음이 쓸쓸하다. 그럼으로, 마침내 밤이 쓸쓸하다.
*추천해 주신 샤브샤브님께 감사의 마음을. 추천 검색은 내용 검색을 하면 간단히 체크 가능합니다. 제가 게시판 죽돌이도 아니고 일일이 다 볼 리가 없겠죠.
*아, 되게 우울합니다. 컴퓨터도 문제고, 글도 잘 안 적히고... 올해 초에 액댐은 액댐도 아니었군요. 흑흑흑...
*저 같은 찌질이한테 책 추천해 달라 하시면 난감합니다;;; 그리고 책을 질문하실 때는 가능한 상세하게 범위를 좁히시는 게 좋습니다. 그냥 인문서적이라고 말하시면 뭘 추천해야 할지 감히 안 잡힙니다. 인문서적이라고 하면 범위가 좀 넓은 게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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