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희망을 위한 찬가 - 역사의 끝에 선 영웅(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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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학교 수업이 끝나고 일당은 약속했던 대로 영화를 보러 가게 됐다. 미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심통 맞은 얼굴을 했지만 다음주말에는 같이 대학 축제로 가기로 하지 않았느냐는 말에 살짝 삐진 표정을 지으면서도 알았다고 했다. 물론 그녀는 같이 영화보러 가는 일당 가운데 쿠로사카가 끼여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영화관은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도착할 수 있었다. 내일이 주말이라 그런지 역시 사람이 많았다. 미리 표를 예매해 두길 다행이었다. 하교 시간에 맞춰 표를 샀기에 영화 시작까지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좌석 순은 당연하게도 민성이 쿠로사카의 옆이었고, 그 옆으로 은결과 동물원 삼총사가 배치됐다.
대기실에서 영화상영시간이 되길 기다리는 동안 지나가던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한 번씩 쿠로사카를 바라보고 지나갔다. 은결을 제외한 일동은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 민성은 커플용 팝콘 세트를 사서 쿠로사카에게 같이 먹자고 했는데, 그녀는 방긋 웃는 낯으로 좋다고 답했다. 새삼스럽지 않은 광경임에도 은결에게는 '헉!'하는 충격이었다. 여러 번 봐도 저 갭은 어째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알랑거리는 꼴이 은결은 제외하더라도 동물원 삼총사에게는 되게 꼴사납게 보였던 모양이다. 뒤에서 궁시렁궁시렁 말이 많았다. 하지만 은결은 솔직히 민성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녀의 신분을 생각할 때, 고원이 아니라 구름 위의 꽃이지만 젊은 날의 열정은 일단 존중될 가치가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니까.
곧 영화관 직원이 영화시작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알렸다.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이미 주변은 어두웠다. 시가지의 불빛이 다채롭게 길을 밝히고 있었다. 일행은 헤어지기에 앞서 간단히 저녁을 먹기로 하고 근처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갔다.
일행이 자리를 잡고, 민성이 주문을 정하고 돌아왔다. 곧 음식이 나왔다. 일행은 각자가 주문한 햄버거 세트를 입에 물며 담소를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는 화끈 안 해서 좀 실망이었지만, 그래도 재밌었지?"
대화의 화제는 역시 방금 본 영화였다. 민성의 말을 여우가 받았다.
"그보다 '돌아온 슈퍼맨'이 아니라 '안습의 슈퍼맨'이더라. 지구에 돌아와 보니 애인은 고무신 거꾸로 차고 애까지 놓고 살고 있질 않나, 실컷 고생해서 잡아넣었던 악당은 풀려나서 또 일을 저지르질 않나. 덕분에 뒈질 뻔 하고 말야."
"안습?"
쿠로사카가 고개를 갸우뚱 하며 물었다. 그녀로서는 생소한 표현이었던 모양이다. 은결이 대답하기에 앞서 민성이 이때다 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한국 개그맨이 눈물을 '안구에 습기찬다'고 말한 이후로 축약해서 쓰이게 된 유행어야."
그의 말을 듣고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인 쿠로사카는 방긋 웃으며 민성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민성의 표정이 무너졌다. 이번에는 고릴라가 말했다.
"그래도 사실 그럴만하지 않냐. 군대 간 애인 못 기다려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거면 몰라, 아무 말도 없이 5년이나 떠나가 있는데 누가 기다려 줄까. 기다린다는 것도 기약이 있을 때나 가능 한 거지, 이건 뭐 어디 간단 소리도 없었고. 그런 주제에 일은 또 저지르고 갔잖아. 차여도 할 말이 없다."
대한민국 청년들만의 페이소스가 담긴 비유를 하며 고릴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건장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은 섬세한 표정과 동작이라, 그 언밸런스가 어딘지 모르게 우스웠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안습의 슈퍼맨이긴 해도 따지고 보면 뭐 다 지가 자초한거지. 나는 그보다 시시껄렁한 인간들이 감히 슈퍼맨에 대항해 싸운다면 그만한 준비가 있을거라 생각을 해야지, 무작정 쳐들어갔다가 깨지는 거 보자니 그게 더 안습이던데."
"음, 나도 그 점은 동감."
"글쎄? 나는 꼭 그렇게 보지 않아. 그건 슈퍼맨이 멍청했다기 보다 슈퍼맨이기 때문에 피해갈 수 없었던 타자의 질곡이 아닐까?"
"에? 타자의 뭐?"
일당은 직감적으로 0.3% 모드의 은결이 발동했다는 것을 알았다. 은결의 주위의 긴장감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을 시작했다.
"흠, 영화에서 보면 슈퍼맨에게 거의 모든 물리적 공격이 통하지 않잖아. 사람의 힘이란 그에게 무력하기 짝이 없지. 그것은 물리세계가 슈퍼맨에 대해 존재감을 가진 객체로서 성립할 수 없다는 말이야. 그 무엇도 슈퍼맨에게는 자극으로서 성립할 수 없으니까. 공기와 같지. 너희들은 걸어다니면서 공기에 부딪힐까봐 조심해? 아니잖아. 마찬가지야. 슈퍼맨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언정 몸으로 그걸 체득하지는 못한 거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의 해석이었다. 꽤 그럴듯 했다. 모두 흥미롭게 은결의 이야기를 들었다.
"공산주의라는 타자를 잃어버린 자본주의가 그 승리의 구가를 통해 인간과 자신과 세계에 대해 거대한 재앙으로 전화하고 있는 것과 같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제한해 줄 수 있는 타자를 잃어버린 슈퍼맨도 그로인해 위험에 처하게 되는 거야. 명료한 타자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을 알게 해 줄 수 있으니까. 결국 제아무리 슈퍼맨이었다고 해도, 혼자 힘으로 설 수는 없었다는, 타자 없이 자신을 알 수는 없었다는 게 아닐까? 뭐 결국 내 해석일 뿐이지만,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런 정도의 의미를 파악할 수가 있겠지."
은결은 담담하게 말을 끝냈다. 쿠로사카는 묘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민성이 그것을 보고 위기감에 휩싸여 곧장 화제를 전환했다.
“그, 그런가. 근데 슈퍼맨씩이나 되면서 영웅 활동이랍시고 하는 게 시원찮아서 그것도 영 불만이더라. 그 힘으로 도둑이나 잡으러 다니고, 너무 규모가 작잖아. 물론 선행은 아무리 작아도 기뻐하며 실천해야 할 종류의 것들이지만, 슈퍼맨만큼 힘이 세다면 얼마든지 좀 더 커다란 규모의 선행을 할 수 있지 않겠어? 가령 미국 대통령이라던가, 그게 아니면 미국 시민들을 설득해 침략 전쟁을 그만두게 한다던가 말야. 그런걸 보면 슈퍼맨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 너무 없는 것 같아.”
민성의 말에 주변에서 ‘오오.’하고 말없는 탄성을 올렸다. 쿠로사카에게 점수 따려고 힘들여 은결의 말에 대항해 짜낸 감상이란건 뻔했지만, 그게 나름대로 쓸 만한 비판이었다. 하지만 은결이 다시 초를 쳤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달리보자면 너무나 근본적으로 고민을 했기 때문에 그의 선행은 그런 작은 것들에 국한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너무나 근본적으로?”
민성이 죽상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 왜 슈퍼맨은 미국의 선거인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걸까? 왜 그는 제 3세계의 무수한 기아와 곡물 값을 지키기 위해 남아도는 쌀을 바다에 처넣는 행위를 대조해 비판하지 않는 걸까? 왜 그는 이라크에 대량학살무기가 있었다던 미국 신보수의 ‘고귀한 거짓말’ 정책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걸까? 왜 그는 중국의 티벳 침략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왜 그는 강도에게 위협받는 한 사람은 걱정하면서 세상의 악의에 고통 받는 수백, 수천만 사람들의 고통과 그 고통의 구조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걸까? 왜 그는 그렇게나 철저하게 침묵하는 걸까? "
은결은 거기서 잠깐 말을 쉬었다가 설명을 이었다.
"나는 그것이 슈퍼맨이 역사의 끝에 선 영웅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역사의 끝?”
은결의 말을 듣던 고릴라가 물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라는 우익 학자의 표현이지. 위대한 시대에 대한,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과 진전은 더 이상 우리의 시대정신(mentalita)이 아니라는 말이야. 지난 백년을 통해 우리는 위대함을 향하던 모든 고귀한 시도가 실패하거나 타락하는 것을 보았으니까. 승리하는 것은 고귀한 이념이 아니라 욕망이었지. 그런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는 1989년에 끝난 것일지도 모르지.”
은결의 말은 여전히 담담하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학우들은 모두 그 담담함이 이면에 품고 있는 끓어오르는 것 같이 큰 덩어리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 슈퍼맨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자신의 위대한 선의가 자신의 위대한 힘으로 실현될 때, 그 선의는 도리어 더욱 거대한 악으로 뒤바뀌어 세상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닐지, 그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악의의 구조는 어떤 강대한 힘으로도 상대할 수가 없어. 강도는 때려잡으면 되고, 불은 바람을 불어 끄면 되고, 지진은 마그마를 진정시키면 해결할 수 있겠지만, 이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악의의 구조는 도무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슈퍼맨은 제한받지 않는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침묵하는 거야. 슬픈, 현실의 논리지.”
그래. 괴물은 힘으로 때려잡으면 되지만, 그 괴물을 발생시키는 악의의 구조는, 상대할 방법은커녕, 그 구조조차도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은결은 담담함을 가장한 표정 밑으로 감정을 삭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되새겼다. 가슴에 찍혀진 화인이 다시 한 번 뜨겁게 달구어지는 기분이었다.
“쩝, 뭐 그렇다는 거야. 햄버거나 먹자.”
은결은 주변의 분위기가 약간 경직된 것을 느끼고 머쓱해하며 말했다. 모두 그 말에 따랐다. 분위기는 금세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가볍고 활달한 색조로 씻겼다. 좋든 나쁘든, 위대함은 이미 시대정신이 아니다.
가게에서 나온 일행은 극장 앞 사거리에서 각자 교통편을 향해 헤어졌다. 민성은 쿠로사카와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기색이었지만 “오늘 즐거웠어. 고마워.”하는 인사 한 마디에 모든 아쉬움을 털고 물러났다.
은결과 쿠로사카는 버스는 다르지만 정차하는 정류장은 같아서 함께 버스를 기다리게 됐다. 한 동안 두 사람은 타인처럼 묵직하게 침묵한 채 앞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쿠로사카가 은결을 바라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나는 그렇게 까지 심오한 영화는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멋진 영화평이었어.”
“아, 고마워.”
“...하지만 역사의 끝에 서있는 건 슈퍼맨이 아니라 너였던 거 아냐?”
쿠로사카의 말은 비난도 질책도 조롱도 아니었다. 그러나 은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메마른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하지만 말을 끝맺을 수는 없었다. 어떠한 대답도 자신의 속내를 대변하지 못할 것이란 점을, 은결은 알고 있었다. 언어는 언제나 가소롭다. 버스가 도착했다. 쿠로사카의 집 쪽으로 가는 번호였다. 그녀는 가벼운 발놀림으로 버스에 올랐다.
“다음에 봐.”
짤막한 인사말과 함께 그녀는 은결의 대답을 듣지 않고 멀어졌다. 그녀가 올라타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은결은 멀거니 작아지는 버스의 등을 바라봤다. ‘나는-’ 이후로 이어지려던 따가운 말의 덩어리는 이미 나올 수 없었다. 소화되지 못할 어떤 덩어리를 억지로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루시훼르님과 푸른이슬님이 추천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컴퓨터 고장나니 기뻐하시는 분들이 많아서(-_-) 오기로 한 일주일 잠적할까 했는데, 두 분의 추천해 마음을 다시 먹고 이렇게 올립니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역사적 텍스트로는 가치가 있지만 그 자체로는 거의 건질게 없는 텍스트입니다. 비추. 좀 심하게 말하면 미국인을 위한 자위물이죠.
*광복절입니다. 순국선열을 생각하며, 57년만에 발동되는 반민특위법이 공정히 실시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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