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65화 (65/300)

#   65-희망을 위한 찬가 - 역사의 끝에 선 영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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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동안 기를 돌리며 제 내부를 검토하던 은결은 주먹을 폈다가 쥐었다. 근육의 움직임에 수반되는 에너지의 흐름이 명료하게 느껴졌다. 당장 술식에 투입할 수 있는 에너지는 과거와 같은 거의 같은 수준이지만 같지는 않았다. 약간이지만 더 강했다. 그렇지만 기맥(氣脈)은 여전히 답답했다. 카미의 힘은 고형체가 된 것처럼 똬리 튼 채 은결의 기맥을 장악하고 있다. 다만, 예전처럼 확고하지는 않은 듯 했다.

“현재 내 기의 총량은 카미를 흡수하기 전의 3배 정도, 인건가...”

그 외에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기맥을 장악하던 카미의 힘이 약간 느슨해진 듯한 느낌은 들었다. 그러나 그 느슨해진 틈에도 불구하고, 기의 흐름에 수반되는 답답함 자체는 여전했다. 좁은 구멍을, 뒤에서 억지로 미는 힘을 통해 빠져나가고 있는 듯한 감각이다. 병목현상이다. 여유가 생긴 만큼 압력이 증가했다. 그러니 힘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옳은 표현이 아니다. 힘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저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총량이 과거와 같은 수준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카미의 힘이 녹은 건가?”

은결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가 자신을 분석해본 결과 나온 결론은 그러했다. 그 이질적이고 확고하던 힘이, 그 분명한 타자적 정체성을 지니던 거대한 힘이, 녹아 자신의 힘으로 완전히 소화되었고, 그 탓에 기맥의 장악력도 일정부분 잃었다. 그 탓에 적어도 과거 수준의 전력은 회복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 거대하고도 확고하던 힘이 어떻게 녹을 수 있었던 것일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작고, 완전한 하나의 절대적인 질서의 원.

“기본 술식- 밖에 없겠지. 그거라면 카미의 힘이 아니라 더 한 거라고 해도 완전한 해체와 융합을 가능하게 할 테니까. 하지만, 지난번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왜 이번에만? 물질변환을 시행하기 전에 에너지 공급이 종단되어 내게 그 반동이 돌아온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치기엔 녹았던 에너지가 내 에너지로 치환된 건 어째서? 초고위 엔트로피 상태로 돌아가면 다행이고, 내 내부에서 폭발했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술식의 전개는 카미의 힘으로 했고, 마지막 에너지 공급이 중단될 당시에는 내 에너지가 공급되었기 때문일까?”

그는 방바닥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쓰읍- 역시 모르겠군.”

역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애당초 술식 자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겨우 암기나 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가 그 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식에 투입된 물질을 에너지 수준으로 해체하는 것뿐이다. 그 이상은 하지 못한다. 때문에 자폭 이외에는 쓸 곳이 없다. 그런 식이니 그 반동이나 변수 상황을 이해하고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것으로 한 가지는 확실해 졌다.”

은결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결의로 굳은 표정을 했다.

“현자의 돌이라면 세연양을 틀림없이 구할 수 있어.”

카미의 힘을 이토록 완전하게 녹여버린 술식이다. 제대로 전개된다면 카미의 본체 따위도 아무런 문제가 안 될 것이다. 상쾌한 결론이었다. 은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밝았다. 그간 쭉 은결을 괴롭혀 오던 힘의 문제로 회복됐다. 또 박살이 났던 이도 카미의 힘 덕분인지 다시금 나기 시작했다. 덕분에 한 재산 절약하게 됐음은 물론이다. 어제의 경험은 처참했지만 정리하고 보니 기뻐할만한 일도 적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내 계산이 아니라 우연이 부여한 선물이지만...”

은결은 쓴웃음을 지었다. 엊저녁의 암담한 기분은 많이 씻어낼 수 있었지만, 다만, 그 부분이 걸렸다. 사태의 장악력은 여전히 자신에게 있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우연에 가까운 결과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지만, 그 당연함을 받아들이기가 은결은 껄끄러웠다. 우연을 배제하는 세계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우연에 지배되는 세계는, 은결에게 마찬가지로 괴로웠다. 그런 세계는 모든 종류의 개선에 대한 시도와 열망을 비웃기 마련이다.

“하여간, 슈퍼에나 갔다 올까.”

은결은 잡다한 생각을 끊고 점심이 머잖으니 식사나 준비하기로 했다. 그는 먼저 쿠로사카의 분노에 가엽은 희생물이 된 방문을 뜯어 정리하고, 집안을 기웃거렸다. 쿠로사카가 보이지 않았다. 잔뜩 열 받아 밖에 나가버린 모양이다. 설마 이 시간에 학교에 갔을 리도 없고, 바람이라도 쐬러 간 모양이다.

은결은 먼저 이것저것 정리나 좀 해 두자 싶어 동사무소에 전화했다. 문짝을 버리기 위해서다. 거기서는 따로 용역업체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그곳에 전화했다. 거기서는 위치를 말하니 아파트 입구 밑에 가져다 놓으면 수거해 간다고 했다. 은결은 부서진 문짝을 들고 아파트 밑으로 내려가 모아놓는 곳에 쌓아두고는 경비실에 지정된 요금을 맡겼다. 돈을 받는 경비원 할아버지의 눈길이 조금 의아스러워 보였다. 평일의 낮이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에 들린 은결은 점심 재료를 모두 사서 올라오고 있었다. 한산한 오전의 아스팔트길이 낯설었다. 길을 따라 올라가던 은결의 시야로 높게 올라단 아파트가 몇 동이고 계속해서 보였다. 사방을 둘러싸는 콘크리트의 군락은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위압하는 것 같았다. 언제나 느끼지만 불쾌한 광경이었다. 이 풍경에서는 사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풍경의 주체는 저들 높게 치솟은 아파트 건물 그 자체인 것만 같았다.

“ ‘심판’을 읽기에 최적인 곳이군.”

은결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응?”

다시 길을 오르던 은결은 중간에 보이는 놀이터에서 익숙한 인영의 모습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텅빈 놀이터의 그네에 앉은 긴 머리의 소녀가 어떤 작은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었다. 정겨운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 주변을 감싸는 쓸쓸함으로 인해 외부와의 단절을 한층 강하게 드러내는 장면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쿠로사카?”

꽤 멀긴 해도 알아보는데 지장은 없었다. 틀림없이 그녀였다. 어디 갔나 했더니 이런데 있었던 모양이다. 은결은 쿠로사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놀이터에 가까워지며 두 사람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였다. 은결의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놀라움이 스쳤다.

“에? 저 아이는...”

소년도 면식이 있었다. 은결은 발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소년이 그녀에게 무언가 이야기 하고 쿠로사카가 간혹 한두 마디씩 말하며 웃는 낯으로 그 말을 받아주는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그 한 두 마디는 모두 매우 어설픈 발음의 한국어였다.

“안녕. 오랜만이네.”

쿠로사카를 놀릴 겸 그녀의 뒤에서 갑자기 말을 걸었다. 쿠로사카의 몸이 번개처럼 반응했다. 그녀의 몸이 물처럼 흐르며 양 손으로 은결의 멱살을 노리고 날았다. 은결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을 느끼며 뒤로 도망쳤다. 간발의 차이로 은결의 목덜미는 그녀의 손을 피할 수 있었다. 쿠로사카는 자신의 손이 아무것도 잡지 못한데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상대가 은결인 것을 알고 노한 표정을 했다.

“무슨 짓이지!”

일어였다. 은결은 머쓱해져서 답했다.

“아니, 뭐 장 좀 봐 왔어. 삼계탕 하려고. 내가 사실 일본 요리는 아는 게 없고 일본 사람 입맛도 맞출 줄 모르는데, 너 저번에 닭죽은 잘 먹었잖아. 이런 건 간도 개인의 입맛에 맞출 수 있고 말야.”

“나는-”

쿠로사카가 얼굴을 붉히고 무어라 말하려 하는 순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소년이 은결 쪽을 보고는 환한 낮으로 “아, 형이다!” 하고 외쳤다. 그 말을 듣고 은결을 바라보던 쿠로사카의 안색이 다시 기묘해졌다. 은결은 해명을 요구하는 그녀의 눈빛을 받고 머쓱하게 답했다.

“지난번에 여기 오면서 웬 애들이 괴롭히고 있길래, 그게 사소한 인연이 됐지.”

“저기, 지난번에는 인사도 없이 떠나서 미안했어요.”

소년이 은결에게 다가와서 밝은 낮으로 말했다. 은결은 부드러운 얼굴로 그 대답을 받았다.

“아냐. 그 녀석들하고는 여전히 싸워?”

“가끔씩요. 그래도 전에 누나하고 같이 있는 거 보고 이제는 윗동네 자식들도 아무 말 못해요. 헤헷!”

소년이 가슴을 펴며 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이 소년은 누나가 어쩌고 하는 말을 했었다. 그게 쿠로사카를 지칭하는 모양이었다. 재밌는 우연이었다.

“흐응. 그런데 저 ‘무서운’ 누나랑은 잘 알아?”

은결은 핵심적인 질문으로 넘어갔다. 뒤에서 쿠로사카의 몸동작이 경직되는 것이 보였다. 은결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응. 아직 한 달도 안 됐지만, 가끔 여기 놀이터에서 같이 놀고 그래요. 헤헤.”

“헤에- 그래? 그러...”

그때 은결의 팔을 잡고 쿠로사카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놀이터를 빠져나갔다. 은결은 어, 어, 하면서도 결국 그녀의 손길에 글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얼굴을 돌려 상냥한 낮으로 소년에게 말했다.

“미안에. 오느른 이망 가바야 겟어.”

어색한 한국어였지만, 어딘가 정감이 있었다. 소년은 손을 크게 흔들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다음에 또 같이 놀아요-”

엘리베이터 안은 조용했다.

“너 말야...”

“아무것도 말하지 마! 말하면 죽여 버릴 거야!”

은결이 말을 붙이려 하자 쿠로사카가 새빨개진 얼굴로 단호하게 잘랐다. 독 오른 고양이 같은 기색이다. 은결이 얼굴 입술 양 끝머리로 웃음을 피식피식 흘리고 있었다는 것도 그녀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많이 창피했던 모양이다.

“어흠, 아니, 별게 아니라 어떻게 저 아이랑 친해지게 됐나 싶어서.”

은결은 숨을 가다듬어 속내를 겨우 감추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제서야 쿠로사카가 성마른 태도를 거두고 답했다.

“한국어를 좀 익힐까 해서.”

“그런 것 치곤- 아냐.”

무언가 말하려던 은결은 고개를 젖고 말았다. 그녀가 소년과 함께 있을 때 말하던 양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고 의아하게 여기고 지적하려 하다 만 것이다. 그녀도 알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말하고 싶지 않은 속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 아이가 나랑 비슷했던 것뿐이야.”

그것은 쓸쓸한 대답이라고, 은결은 느꼈다. 그리고 땡 하고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아마도, 오늘 점심은 쓸쓸하지 않을 것 같다고, 쿠로사카는 생각했다.

*선학초님이 추천해 주셨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닷!

*‘그리고 세계는 멸망했다.’ 는 20세기 소년이 출처입니다. 그리고 한쓰님의 ‘세계는 반물질의 화염에 휩싸였다’ 읽고 한참 웃었네요. 북두의 권도 북두의 권이지만 아니메 점장이 떠올라서.

*제가 책읽기를 위해 외국어 공부를 하는 거라서 영절하, 이런 책의 주장하곤 친해지기가 힘듭니다. 1500단어로 대화는 되도 책은 못 읽죠. 읽으려는 책이 쉬운 것도 아니고. 쩝.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에서 두 주인공의 강함에 역사적인 설명을 배제한 것은 전략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설명을 마련은 했지만 일부러 다루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그 글에서 강하다는 것은 이면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클라우스의 중요한 갈등국면에서 무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무력은 무대를 마련하는 것일 뿐, 그것 자체가 갈등 해결의 요소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특히 데일의 경우 강하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그 글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데일은 중요한 국면에서 언제나 패배하거나 무력해집니다. 이는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의 주제 상 전투가 사태해결의 열쇠가 된다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 할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국면에서 데일의 무력이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은 마왕의 알에서 깨어난 괴물을 물리치는 순간일 뿐이었죠. 그러나 마왕의 알에서 나온 괴물은 글 전체로 볼 때 별 의미를 가지지 않는 소소한 돌출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무대의 하나였지 작품의 중심주제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 봉사하는 바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전투가 해결의 중심 열쇠로서 작동할 수 있었죠.

그래서 그렇지 않아도 독자의 눈길이 가기 쉬운 전투적 요소에 과도한 관심이 부여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그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차단했던 겁니다. 먼치킨적 요소는 실질적으로 무의미한,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같은 것이었으니, 지나치게 시선을 장악하면 곤란하다고 여겼죠. 아, 물론 실패했습니다만(...)

그러나 이렇게 전투, 강함이 클라우스의 이면구조상 무의미한 요소라면 하렘적인 요소는 실질적으로 매우 중요했습니다. 글 전체가 주장하던 자유에 대한 의지, 개념을 단순한 글의 주장이 아닌, 소소하지만 실천적인 영역으로 변환시키기 위한 거였으니까요. 다시 말해 누구랑 누가 엮어져 잘 먹고 잘 살 건가에 대한 해석의 선택권을 독자에게 넘김으로서 독자에게 ‘자유’를 ‘실천’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클라우스의 히로인은 모두 성깔이 세고 강렬하게 데일을 욕망하죠. 착해서 양보하고 하면 그런 게 안 되니까. 음, 다만 리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안합니다. 흑흑. 제가 클라우스의 2부를 쓸 수 없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었습니다. 2부를 쓰면 중심 주제를 배반하게 되죠. (데일라뷰알렉은?)

후, 클라우스가 이런 짜잘한 시도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애착이 많이 가는 걸지도. 이런 측면에서는 희망을 위한 찬가가 클라우스 보다 구성 같은 게 훨씬 널럴합니다. 저런 종류의 계산은 되도록 배제하고 쓰이도록 하고 있으니까요. 쌈박질이 가장 중요한 갈등해결의 요소이기도 하고. 덕분엔지 쓰기도 좀 더 쉬운 것 같기도 합니다. 큼.

*데일과 알렉이 너무 쎄삼! 에 대한 답변이 너무 길었습니다. 반성. 내일 컴터가 올 예정이다 보니 흥분했군요. 하여간 읽으면서 저런 걸 발견하는 것도 클라우스 학원 읽기의 한 방식이라 여깁니다. 심심하신 분들은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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