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희망을 위한 찬가 - 방법은 있다!(5)
#
태양이 뿜어내는 열과, 대지가 품은 열과, 대양이 품은 열이 충돌하며 일구어내는 대기의 흐름은 평등이란 이데아를 향해 움직인다. 그 평등은 이데아였기에 결국 보장되는 것은 평등이 아니라 운동이다. 진보 없는 운동은 세상을 서서히 갉아먹을 뿐이었다.
그 흐름의 한 말단이 도천시의 한 곳에 이르러 갑갑하게 느려졌다. 그곳은 시에 있는 한 학교의 옥상이었다. 운동을 거절하듯 공간이 기이한 에너지로 꽉 들어차 있었고, 한 소년과 한 소녀가 묵묵하게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뺨을 스치는 나약한 바람결을 느끼며 역산을 계속하던 은결은 잠깐 손을 쉬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에 쿠로사카가 담겼다. 그녀는 유려한 동작으로 검무를 추고 있다. 자세한 것은 은결도 알지 못하지만 저 유려한 선의 동작이 키리야미와 함께해 적으로 돌아설 때 얼마나 흉험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지는 은결도 충분히 안다. 그녀는 적으로 삼고 싶지 않은 상대다. 그녀는 끊임없이 이어가던 선을 갑자기 멈추며 은결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왜 그래?”
쿠로사카가 일어로 물었다. 은결과 달리 그녀가 검무를 멈춘 것은 그의 시선 때문이었다. 은결은 뭔가 상당히 마땅치 않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기 말야, 혹시 요즘 도천시에서 기이한 기색 같은거 느낀 적 없어?”
은결은 어제 푸른 이빨에게 경고를 들은 이후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헛소리로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푸른 이빨이 헛소리를 해서 득 될 것이 없었다. 그리고 푸른 이빨의 경고를 듣고 나니 마음에 짚이는 게 있었다. 얼마 전 느꼈던 착각 같았던 시선. 그래서 은결은 자신보다 기에 대해 훨씬 예민한 쿠로사카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기이한 기색? 물론 느끼지.”
난데없는 은결의 질문에 잠깐 당혹한 표정을 지었던 쿠로사카는 이내 피식 웃으며 간결하게 답했다.
“저, 정말?”
은결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쿠로사카는 고개를 시원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말했다.
“그럼. 바로 눈앞에도 그런 기색을 내뿜는 사람이 있는걸.”
그리고 쿠로사카는 쿡쿡, 하고 작게 웃었다. 돌아온 대답의 허망함에 긴장으로 물들었던 은결의 얼굴이 단번에 실망으로 식어버렸다.
“으음, 장난치지 말고, 진지하단 말야.”
하지만 쿠로사카는 장난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얼굴을 진지하게 바꾸고 은결에게 말했다.
“이쪽도 진지해. 네 기운은 정말 기이하니까. 최초에 네게 카미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물론실수였지만, 그런 실수를 유발할만큼 네기는 기이한 특색을 지니고 있으니까. 신적인 것을 느끼게 한 달까.”
“그건 운용방식의 특징일 뿐이야.”
은결은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쿠로사카는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고 있어. 범신론인지 유출론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을 곧 신적인 지위에 두는 것이 너희 쪽의 기본적인 세계관이니까. 그래도 그런 착각을 했을 만큼 완성도가 높으니 기이하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지.”
“그거, 칭찬?”
은결이 조금 표정을 찌푸렸다. 과거에, 그리고 지금도 그 문제로 인해 은결네는 이쪽 세계 사람들에게 경원시당하고 있다. 조금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쿠로사카도 그런 사정을 알기에 괜히 말을 돌리거나 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답했다.
“그래. 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네 아버지에 대한 감탄이긴 해도. 그걸 제대로 정립한 게 네 아버지잖아?”
“응. 잘 아네.”
“그야...”
은결에게 푸른 이빨이 있다고 착각한 이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험하지 않다는 격언에 따라 열심히 조사했다고는, 역시 아무리 뻔뻔해도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쿠로사카는 어설프게 말을 죽이며 껄끄럽지 않은 화제로 넘어갔다.
“흠, 일전 관심이 있어 찾아봤는데 네 할아버지도 대단한 힘을 느끼겐 했지만 신적인 것은 느낄 수 없었어. 네 할아버지와 너 사이에 그런 균열이 있다면 그 균열을 연결하는 매개를 찾아보는 게 옳고, 거기 네 아버지가 있지. 사실 신도(神道)는 만물이 신적인 것을 품고 있다고 보는 면에서 그쪽의 세계관과 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개인적인 욕심이란 차원에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지.”
그 말을 듣고 은결이 조금 풀어진 얼굴을 했다.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 표정을 보고 쿠로사카는 되게 기분이 나빴다. 그녀는 냉랭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려 주변의 기온을 대충 20도 정도 떨어뜨리곤 냉랭한 한 마디를 던졌다.
“그래봐야 별로 강해지는 것 같지는 않지만.”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는 사항인지라, 완벽한 직격타였다. 은결은 정신적으로 좌절의 자세를 취하며 화제를 본래대로 돌렸다.
“읏... 하여간 정말 뭐 느낀 거 없어?”
“유감이지만 너 외엔 없어.”
쿠로사카는 즐거운 표정으로 담백하게 답했다. 그녀는 스스로 정체를 드러낼 때까지 은결이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만큼 능숙하게 기색을 숨길 수 있다. 이는 그만큼 기의 탐지에도 능숙하다는 말이었다.
“그런가...”
은결은 역시 기우였나 보다 하고 고개를 돌려 역산에 집중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만월이었다. 아름다운 달을 기대해도 좋으리라 싶었다. 만약 구름에 그 아름다움이 가려진다면 그 구름 위로 고독하게 올라가 보는 것도 흥취이리라.
“그런데 쿠로사카.”
“왜?”
“평소에도 그 더러운 성질 드러내면 나를 굳이 히스테리 해소 대상으로 삼지 않아도--”
빛이 날았다. 은결도 진보가 없다.
밤이다. 여느 때와 같이 은결은 도천시의 상공에 역장을 펼치고 서 있었다. 그는 역장 위에서 허전한 앞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잡고 꼼지락 거렸다. 그 부분의 머리카락만 주변 앞머리와 어울리지 않게 짧았다.
“하여간 성깔하고는...”
은결은 궁시렁대며 주변을 검색했다. 별다른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 전에 고전했던 거대 사념체를 생각하면 평화스럽다는 게 조금 불안했다. 하지만 어제 하나 처리했으니 지난번과 같은 일은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은결은 고개를 들었다. 높게 떠오른 달이 고고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빛을 잡아먹는 도시의 빛에 별은 드문드문 쓸쓸하게 보이지만, 달만은 홀황하고 묵묵하다. 무엇으로도 훼손되지 않을 가치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러하기에 많은 불멸의 존재는 달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지도 모른다.
“헤헷.”
은결의 입가로 달을 닮은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이건?”
그의 심장이 강하게 두방망이질 쳤다. 은결은 식음 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등 뒤를 돌아봤다. 한 사내가 기분 나쁘게 웃으며 서 있었다. 금발의, 코가 오뚝한, 파란 눈의 사내였다.
“흑-?!”
은결은 대경실색하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자세를 다잡고 그는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지루함에 가득 찬, 자신만만한 눈이다. 은결은 그 눈동자 이면에 이글거리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해방된 키리야미를 쥐었던 쿠로사카와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느낀 감각과 흡사했다. 은결의 손이 불안하게 덜덜 떨렸다. 그는 한동안 은결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을 꺼내며 말했다.
“달을 좋아해?”
“......”
답할 이유는 없었다. 답할 여유도 없었다. 이런 거대한 힘을 대체 어떻게 숨겼던 것일까? 은결의 침묵에 대해 사내는 이죽거리며 다시 말했다.
“요 며칠간 너를 쭉 살폈는데, 되게 실망이더라. 그래도 달을 좋아한다니 그건 맘에 들었어. 달을 보고 취할 수 있다는 것은 진실로 미학을 안다는 것이니까.”
한국인으로 보이지 않는 외모였지만 한국어에는 놀랍도록 능숙했다. 혼혈로 이 땅에서 쭉 살아온 게 아니라면 그의 외견에서 읽어지는 시간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어학이었다. 이어 그는 잊은 것이 있었듯 오른손 검지를 치켜세워 보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역장 가지고 장난도 잘 치던데, 그건 솔직히 감탄했어. 이 신발이 아니었으면 너와 마주하기 꽤 힘들었을 것 같군.”
그러면서 사내는 신발로 허공을 툭툭 쳤다. 흰 빛이 신발을 중심으로 파동 쳤다. 착용자의 의사대로 신발바닥 주변에 역장을 발생시키는 물건 같았다.
“당신... 누구?”
“누구든 상관없잖아. 그보다, 며칠 전에 보낸 선물이 버겁던 모양이던데, 그 점은 사과하지. 널 너무 과대평가 했던 것 같아.”
그것으로 좋은 의도를 가진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은결은 뒤로 날았다. 전력을 다해 도망갔다. 금세 그는 대기의 벽을 꿰뚫었다. 지금의 자신으로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길 방법이 없었다. 사내는 피식 웃고는 은결이 날아오른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그의 발걸음마다 빛의 파동이 길게 퍼졌다.
“뭐, 조금은 즐겁게 해 달라고, 푸른 피의 후계자.”
사내는 조소했다. 어차피 이 주변으로 광대한 결계가 펼쳐져 있다. 은결은 탈출할 수 없었다.
달이 교교하다-
*천유마님이 추천해 주셨습니다. 지속적인 응원에 감사의 마음을~
*독자에 이끌려다니는 진행을 걱정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독자 의견을 받을 수 있는 부분과 받을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고, 독자 의견의 반영은 받을 수 있는 부분에 한한 것입니다. 가령 수행의 글이 지루하단 의견이 아무리 많이 나와도, 그래서 문체의 변화나 내용의 변화를 통해 좀 더 친절해지도록 시도하는 건 할 수 있어도, 그걸 없앨 수는 없습니다. 딱 잘라 말해, 그렇게 할 바엔 글을 중단하는 게 낫습니다.
*지금 가장 재밌게(고통스럽게?) 읽고 있는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정신의 기원입니다. 그는 정말 매혹적인 글을 쓰는 비평가죠. 초절정 검도 고수(?)의 품격이 느껴지는 글쓰기랄까. 이런 종류의 글 가운데 비교적 쉽게 쓰는 사람이기도 하고, 원전읽기에 강해서, 읽고 있으면 이런 방식의 이해도 가능하구나! 하고 가끔 황홀해집니다. 그렇지만 추천하긴 어려운 책입니다. 비교적 쉽게 쓰긴 해도 어디까지나 ‘비교적’이지, 절대 쉬운 글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그보다는 ‘앨저넌에게 꽃’을 이라는 장르소설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저는 ‘빵가게 찰리의 행복하고도 슬픈 나날’이라는 제목으로 읽었습니다. 올해 읽은 최고의 소설중 하납니다. 쉽고 재밌고 감동적! 먼치킨 좋아하시는 분들도 쉽게 매혹될 만한 ‘바보가 수술을 받아 천재가 된다!’ 는 내용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