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희망을 위한 찬가 - 방법은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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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어요?”
은결이 어색하게 물었다. 요령부득이란 말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면 이런 모습이 된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거기에 짝을 맞추듯 세연은 어색하게 답했다.
“그게, 저기, 그냥... 이라고 하면 안 되나요?”
“---”
단순히 답만 말하자면 물론 안 된다. 하지만 그 말이 나온 상황의 무게에 짓눌린 은결은 거기에 대해 답을 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힌 채 세연을 바라봤다. 세연도 자기가 꺼낸 말에 눌린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들지를 못하고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진 그녀의 고운 손이 불안하게 꼼지락 거리는 것만이 유독 선명하게 시야로 들어섰다.
“오빠! 나 배고픈데!”
뒤에서 거실을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며 두 사람의 동태를 살피려 시도하던 미래의 목소리가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말에 가시가 돋은 것 같지만 어쨌든 간에 나이스 타이밍이다. 은결은 속으로 ‘미래 만세!’를 외치며 반갑게 고개를 돌렸다.
“어, 어 조금만 기다려.”
그리고 은결은 세연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이, 일단 함께 저녁이나 드시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예...”
세연은 부푼 기대와 긴장이 한꺼번에 허물어지며 스며드는 허망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맛보며 은결의 물음에 답했다. 은결은 바쁜 발걸음으로 부엌으로 갔다. 그의 방에 홀로 남은 세연은 어색한 열기에 전신이 달아오른 것을 식히듯 방을 새삼스레 둘러봤다. 별 다른 특별함은 없었다. 또래의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 좀 더 책이 많고, 좀 더 정갈하고, 그래서 좀 더 쓸쓸한- 그런 것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갑작스런 손님의 방문으로 원래 고등어구이가 되어야 했을 그날 저녁의 반찬은 고등어조림이 됐다. 4인 가족이 먹기에 은결이 사온 고등어의 마릿수가 적었던 탓이다. 어느 쪽이든 은결의 요리솜씨는 일품이다. 불평할 건덕지는 없었다. 그러나 대 놓고 불평을 하지 않았을 뿐, 미래는 상당히 부루퉁했다.
하지만 식사시간 자체는 무척 화기애애했다. 세연이 어른들이 좋아할 요조숙녀 타입의 소녀라 그런지 수행은 몇 번 보지도 않은 사이 벌써 그녀가 꽤 마음에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화제가 끊어짐이 없도록 계속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수행이 원체 박식하다 보니 화제거리에 곤란을 겪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두 사람의 문답만으로도 저녁 식사는 부드럽게 이어져 나갈 수 있었다.
다만 수행이 세연과 나눈 대화 가운데 ‘맛있어요?’로 시작된 수행의 말이 세연이 그렇다고 대답하는 순간 ‘음, 하기야 우리 은결이는 요리를 잘하지.’로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뿐만 아니라 가사 능력도 출중해서 이 집는 바퀴벌레가 한 번도 나왔던 적이 없지.’라는 연계가 되며 결론적으로 ‘은결이가 일등신랑감인데, 숫기가 없어서 그런가 아직 사춘기 소년다운 고민을 한 적이 없어서, 그게 참 유감인데-’로 완성되려 할 때는 정말 당혹스러웠다.
다행히 살짝 도끼눈을 한 미래의 “아빠! 손님한테 실례잖아!”라는 일갈이 그 연쇄의 사슬을 끊었지만,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박력이 있었다. 덕분에 은결과 세연은 따스한 쌀밥에 막 만들어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고등어조림을 먹으면서도 종합적으로는 시원하게 느껴지는 저녁식사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런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 네 사람은 사소한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원래 수행은 두 사람만 있게 자리를 좀 비켜주고자 했지만 은결이 말렸다. 이런 경험이 전무하다 보니 도무지 무슨 방도로 그녀를 접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남자 친구가 집에 찾아와도 같이 책 읽을 요량이 아니면 은결의 방에서는 뭔가 할 게 없었다. 그런데 무려 여자라니! 거기 더해 미처 답하지 못했던 세연의 처음 질문도 부담스러워서, 사실 좀 피해가고픈 마음이 있었다. 고맙게도 세연은 은결의 그 태도를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어쩌면 그녀 역시 대답을 듣기 무서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보니 금세 시간이 밤 9시 가까이 됐다. 고등학교 2학년의 여학생이 남정네의 집에 머물기엔 많이 늦은 시간이다. 세연이 조신한 몸가짐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은결이 서둘러 그녀를 따르며 배웅하러 나갔다. 집을 나설 때 수행이 “다음에 또 놀라오렴.”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미래는 수행 옆에서 불편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오빠도 언니 데려다주고 얼른 돌아와. 뉴스 보니까 우리 시에 또 바닥 부수고 다니는 놈들 나왔다더라.”
은결이 뜨끔, 하고 어깨를 좁히면서 동생의 말에 “으, 응.”하고 약하게 답했다. 집을 나선 두 사람을 맞이하는 것은 어두운 골목과 듬성듬성 늘어선 가로등의 황색 빛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그 길을 걸었다. 주변을 잠식하는 어둠이 바로 곁에 있는 서로의 존재를 강화하는 것 같았다. 은결은 세연의 손을 잡았다.
“아...”
세연은 신음 같은 말을 흘렸다. 은결은 다른 손으로 수인을 맺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순식간에, 주변 일대의 공간이 비현실적인 감각으로 충만했다. 은결은 노한 눈길로 세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하러 왔지?”
“에, 예.. 무슨...”
세연이 머뭇거리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급변한 은결의 태도에 심하게 당혹한 듯 그녀의 고운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장난치지마!”
분노한 은결의 기의 파동에 주변 공간이 진동했다. 조신한 두려움으로 가득하던 세연의 표정이 그 순간 일변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이다. 그녀는 혀를 차며 긴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망치로 막 깨부순 화강암의 단면처럼 거친 태도다.
“칫.”
“다시 묻지. 뭐 하러 왔지? 푸른 이빨.”
은결이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세연의 육체를 차지한 푸른 이빨에게 말했다. 푸른 이빨은 비릿하게 웃으며 은결을 꼴아봤다.
“내가 왜 답해야 하지?”
“왜냐하면, 만에 하나가 걱정되어 내가 못 견딜 것 같으면 작심하고 너와 같이 자폭해 버릴 수도 있으니까. 세연 양에겐 미안하지만.”
은결의 표정은 한결 더 굳어 있었고, 푸른 이빨은 그 말이 사실이라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야생의 감 같은 것이다.
“...미친 새끼.”
“고맙군.”
“쳇. 네놈이 약속을 잘 지키는가 알아보러 왔다. 네 아비가 나에 대해 아는가 모르는가를 알아보러 말야.”
푸른 이빨의 말을 듣고 은결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했다.
“...간도 크군.”
“흥. 쿠로사카의 후예인 그 계집이 아니고선 영적 본질만 분리되어 숨어든 나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하물며 네 아비처럼 반병신이라면 그 지식과 지혜가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나를 발견할 수 없지.”
“그렇다면 잘 알겠군. 나는 아무에게도 너에 관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
푸른 이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 세연이 그녀 답지 않게 수행과 함께 있는 것을 부담스레 여기지 않은 것은, 혹은 부담스럽지만 피하려 하지 않은 것은 푸른 이빨의 목적에 그녀의 정신이 종속당해 있었기 때문인 모양이다. 은결의 생각을 증명하는 끄덕거림과 더불어 푸른 이빨이 말했다.
“아아, 그런 것 같더군. 만족했어.”
“그럼 꺼져.”
“그럴 생각이다.”
그렇게 은결의 말을 받은 푸른 이빨은 은근하고 요염하게 젖은 표정을 하며 얼굴을 은결의 얼굴 가까이로 들이내밀었다. 차갑게 굳은 은결의 눈동자 속에서, 푸른 이빨의 저열한 태도가 세연의 기품을 무너뜨리고 있지만 그 반대급부로 발생하는 젖은 듯한 짙은 농염함이 솟으며 기괴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는 은결과 눈동자를 마주하며 끈적하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재밌는 사실을 하나 알려주지. 이 계집이 네 집에 온 것은 내가 무의식중에 부추긴 탓이긴 하지만, 분명히 그 자신의 의지도 강렬하게 작용한 거야. 너와 오늘 처음 만났을 때 내뱉었던 그 대담했던 말도 물론. 쿡쿡... 그러니 좀 더 다정하게 대해주는 게 어때?”
“...꺼져. 그녀와 나 사이의 유대를 강화해 그녀가 지닌 인질가치를 높이려 하는 거라면 아무 소용없어.”
은결은 사막처럼 메마른 어조로 푸른 이빨의 말을 잘랐다. 푸른 이빨은 재미없다는 듯 두 팔을 뒤통수로 돌리며 총총 걸음으로 은결에게서 멀어졌다.
“쳇, 메마른 새끼. 뭐 그런 것도 없다곤 말할 수 없지만 말야-”
“......”
“-흠, 관두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직 남았나?”
은결의 눈썹이 작게 찌푸려졌다. 그는 푸른 이빨이 끔찍하게 싫었다. 푸른 이빨은 그의 태도를 즐기듯이 킬킬대며 말했다.
“흘려듣지 마. 요즘, 이 동네 뭔가 기분이 나빠. 조심하는 게 좋을걸. 네 몸은 언제고 내께 되어야 하니, 아껴쓰라고. 특히 너, 얼마 전에 시시껄렁한 사념체 하나 처리 못하는 추태를 보였잖아.”
“...어떻게?”
흠칫 놀라는 은결의 태도가 푸른 이빨의 즐거움을 한층 강화했다. 그는 양 손을 입가로 모으고 어깨를 떨며 세게 웃었다. 비현실적인 공간에 지극히 잘 어울리는 비현실적인 소녀의 모습이다.
“킬킬킬, 네 신상에 일어난 일에 대한 정보 정도는 바로 내게 들어온다고. 네가 품고 있는 힘의 태반이 내거니까. 그렇잖음 내가 어떻게 그 재수 없는 계집과 싸울 때 네놈이 위험한걸 알고 싸움에 끼어들었을까.”
“으음...”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확인하고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자신의 모든 빈사상황이 푸른 이빨에게는 춤을 출 듯이 즐거운 기회의 순간이 된다. ‘목숨에 지장이 없는 부상’과 ‘죽음’ 사이에 걸린 ‘위험한 부상’의 범위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그럼, 더럽게 시건방진 새끼야, 다음에 보자.”
은결의 찌푸린 표정에서 그의 심경을 읽으며 즐기던 푸른 이빨은 이제 슬슬 질린듯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은결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빛이 깜박이듯 세연의 표정이 깜빡였다. 동시에 은결은 결계를 풀었다.
“아-”
“괜찮으세요?”
은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세연을 받았다.
“아, 예... 깜빡, 졸았었나 봐요.”
세연은 자기가 말해놓고도 그게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 이상함을 지적하려 하니 아무것도 지적할 게 없었다. 도무지 개운하지 못한 위화감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은결의 부드러운 태도가 그녀의 불편한 기분을 완전히 씻었다.
“피곤하셨던 모양이네요. 어서 가죠.”
“예.”
세연은 은결과 발걸음을 같이해 어두운 골목길을 걸었다. 처음부터 아무 것도 쥐고 있지 않았던 손이, 이상하게 허전했다.
*무한베기님이 추천해 주셨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챕터 둘, 셋 정도가 지나면 수행의 글이 이글 전체와 어떤 방식으로 연결이 될 것인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연결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몇 번이고 무의미한 정보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음에도 다시 설명해야 하다니... 으음, 제가 신뢰가 없군요. OTL
*수행의 글은 반응이 좋으면 월러스틴의 세계 체제론까지 가보고 싶었는데, 예상한대로 반응이 안 좋아서 역시 그만둬야 하겠습니다. ^^; 지금까지 나온 수행의 글을 다 합쳐도 A4 3장을 조금 넘기는 정도고, 비교적 철학적인 언술을 다 합쳐봐야 글 전체의 5% 이하 분량일 텐데 무려 절반 이상이라 느끼시는 분도 있고 말이죠.
*비교적 어렵다는 부분들을 좀 더 친절하게 쓰려면 페이지가 좀 더 많이 필요한데, 좋아하는 분들이 얼마 없어서 힘들 것 같네요. 쉬운 글이 되는 대신 지루해지면 말짱 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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