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희망을 위한 찬가 - 방법은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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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수업이 끝났지만 은결은 아직 집에 가지 않았다. 그는 교실 문 앞에서 등을 벽에 기대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가고, 당번만 남아 지루한 표정으로 교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이 녀석이 늦네...’
한산해진 복도를 바라보며 은결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헤어짐에 앞서 친구들과 아쉬움에 넘치는 수다라도 떨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은결과 달리 미래는 교우관계가 폭넓다.
‘그럴바엔 친구들과 함께 돌아가면 좋을 것을.’
은결은 혀를 차며 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 들었다. 수행의 사설이다. 원래는 오늘 순찰 돌며 심심할 때 읽으려 했는데, 미래가 오지 않으니 그냥 지금 읽어 두자 싶었다. 은결은 접혔던 종이를 펼치며 활자를 눈동자에 담았다.
-박정희는 5. 16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찬탈했으나 그 기반이 매우 약했다. 특히 정권 초기, 미국의 지지를 얻지 못했던 점은 치명적이었다. 이 점은 61년 당시 홍수에 대해 미 의회가 2천만 달러 상당의 곡물 지원을 하기로 했으나, 박정희 정권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정권을 시민에게 이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2년 이상 이를 지연시켰던 점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거기 더해 당시 북한이라는 경쟁상대 역시 정권 안정에 심각한 장애물이었다. 북한은 반공 헤게모니를 휘두르기 위한 적절한 이유였음으로 정권 유지에 유리한 측면이 있긴 했으나, 동시에 당시 북한의 경제 상황은 남한을 압도하는 것으로서, 미국의 충분한 지지를 얻을 수 없었던 박정희 정권 초기에, 북한은 체제의 우위를 주장하기 어려운 남한에게 불안한 경쟁 상대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은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경제개발에 주력하게 된다. 경제개발을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행히 당시 남한에는 남미와 달리 개혁에 반대할 수 있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전통적인 지주세력이 소멸한 덕분이다. 그로서 박정희 정권은 남한을 순조롭게 개발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시민의 다수를 도시로 몰아넣어 공업에 충분한 노동자를 투입했고, 농촌의 곡물 가격을 낮은 수준으로 동결시킴으로서 노동자의 임금을 마찬가지로 낮은 수준에 머물게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근대화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이 야기한 한국 경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재벌’이었다. 국가 주도의 근대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이 자국 시장을 철저하게 보호했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로,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해 높은 관세로 국내 기업의 상품을 보호했고, 특정기업에 대해 세금을 낮추고 막대한 대출을 해주는 등의 방법을 통해 몇몇 기업을 정권 차원에서 거대하게 성장시켰다. 이를 통해 한국 특유의 경제 시스템인 재벌이 성립되게 된다.
60년대 이후 한국의 산업화는 중소기업 위주로 나갔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과 달리, 그 폐해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에 있어 ‘재벌’위주의 경제정책은 적절한 것이라 평해야 한다. 이는 재벌이라는 시스템이 그 다각화된 사업을 통해 대자본이 필요한 산업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다른 사업의 수익으로부터 끌어오기 쉬웠기 때문이다. 남미지역과 달리 원자재가 풍부하지 않은 한국이 수출위주의 경제개발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미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외국의 기업과 경쟁해 이겨야 하는데, 이를 위해 필요한 자본 조달은 재벌이란 시스템 이외에 당시 한국에서 달리 생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국내 사정과 정권 차원의 필요가 겹쳐 국가위주의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해, 물질적인 부분에 한정된 것이지만 한국의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당시 국내 사정이 개혁에 적합한 무주공산과 같은 상태였으며, 박정희 정권의 정책 선택이 유효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내수 시장이 극히 취약했던 당시 한국에서 그와 같은 근대화가 가능했다고 설명할 수 없다. 특히 지금과 달리 당시 한국에서 철저한 보호정책을 펼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 배경과의 연계를 통해서만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브레턴우즈 체제로 설명되는 2차 대전 후 세계 경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은결은 종이를 접었다. 내용이 씁쓸했다.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에서 비롯된 그 많은 눈물과, 그 많은 고통과, 그 많은, 그 많은- 소외된 이들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 잔인한 독재 정권을 전면적인 악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그것이 쓰디썼다. 그것이 누군가가 지적한 대로 히로뽕 같은 발전에 불과했다 해도, 그 히로뽕 위에서, 지금이 이루어졌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아니, 전면적인 악을 설정하고자 한 내가 어리석었지.’
은결은 자기를 조소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애당초 세상의 악의가 단적으로 이해되거나 논해질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것이라면 은결이 텍스트의 늪에서 헤메고 있을리 없다. 모든 사태가 품고 있는 긍정성과 부정성은 끔찍하도록 복잡하게 교차하고, 거기서 피어나는 탄식과 침묵이 세상이 품고 있는 어려움의 가장 절절한 부분이다.
“신이 있다면, 한방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말야.”
피식 웃으며, 은결은 작게 중얼거렸다. 얼마 있지 않아 “오빠~” 하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결은 고개를 돌렸다. 총총 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은결은 다 읽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그녀를 향해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서와. 뭐 한다고 늦었어?”
“친구들과 얘기 쪼끔 하다 보니. 에헤헤. 미안.”
그리고 해맑은 미소와 함께 미래는 은결의 옆으로 갔다. 은결의 키가 미래보다 머리 반개 정도 더 큰 덕분에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복도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햇살을 맞아 그림자를 드리우며 학교 밖으로 나갔다. 자전거 주차장에서 자기 자전거의 열쇠를 끄르며 은결은 지나가는 어조로 미래에게 말했다.
“다음 달 17일에 아빠 심부름으로 K대에 가야 하는데, 같이 갈래? 그때 대학 축제라던데.”
“왓, 정말? 갈래!”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 예상한 대로다. 은결은 자물쇠를 정리하고 자전거를 조금 뒤로 뺀 다음, 그 위에 올라서며 웃음기를 섞어 말했다.
“가서 멋진 남자라도 한 명 건져봐. 거기 나름대로 다 엘리트잖아.”
미래가 잠시 부루퉁한 표정을 했다. 그녀는 금세 냉랭하게 표정을 바꾸며 은결 뒷자리에 올라타곤 그의 말을 받았다.
“음, 하긴. 그 진경 오빠 같은 사람 있으면 한번 노력해 볼 건데. 그러고 보니 그 오빠도 K대 였지?”
진경이 화제에 오르자 은결은 거북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으음, 그건 좀...”
“이상하게 오빤 그 오빠 싫어하더라?”
그 태도에 미래가 상큼발랄하게, 놀리는 어조를 섞어 은결에게 말했다. 은결은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마땅찮은 표정과 함께 그녀의 말을 꺼리는 어조로 받았다.
“싫어한다기 보다-”
‘보다’가 아니라 그냥 싫어하는 거 맞다. 그는 말의 틈을 찾듯이 쭉쭉 자전거를 앞으로 밀었다. 미래가 관성에 밀리지 않기 위해 등 뒤에서 은결의 몸을 꽉 잡았다. 곧 자전거의 속도가 일정해지며 안정적으로 길 위를 달렸다.
“-뭐, 그냥 좀 안 맞는 거 뿐이야.”
“그럼 이유가 안 돼네.”
“윽...”
애매한 은결의 대답에 대해 미래가 심술궂게 딱 잘라 대답했다. 은결은 할 말이 곤궁했다. 미래는 승리감에 가득 찬 얼굴로 뒤에서 V사인을 펼쳐 보였다. 은결은 가재 눈으로 그 사인을 바라보며 툴툴거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화제를 바꿔 오늘 저녁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가리는 게 없기 때문에 뭘 만들어도 상관없지만 미래는 좀 가리는 편이었다. 그래서 은결네 식단은 기본적으로 미래에게 주로 맞추고 있었다. 결국 격렬한 토론 끝에 오늘 저녁 반찬을 고등어로 하기로 결정했고, 도중 대형할인마트에 들려 간단히 반찬거리를 사서 집으로 향했다. 할인마트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 탓에 하늘은 많이 어두웠다.
집 앞에 도착한 은결이 자전거를 정원 한 쪽에 세워두고, 두 사람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하는 맑은 미래의 목소리가 집안 가득히 퍼졌다. 수행의 방문이 열리며 그가 얼굴을 내밀었다. “어서오너라.” 그는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시장하시죠? 곧 식사 준비할께요.”
은결은 웃는 낮으로 교복 윗도리를 벗어 옷걸이에 걸치며 말했다. 그 말에 수행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구나. 시간이 꽤 됐으니. 손님도 제대로 대접해야하고 말야.”
“어? 손님요?”
“도원 스님이라도 오셨어요? 아니면 그 진경이라는 오빠?”
수행은 유쾌한 낮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은결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감이지만 두 사람 다 아니란다. 은결 네 방에 있으니 가서 인사해라.”
“에, 예. 그러죠.”
은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어딘가 불안한 낮으로 앉아 있는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간단한 음료와 과자를 쟁반이 놓여 있었지만 과자 주변이 깨끗한걸 보아 한입도 먹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소녀는 은결을 보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세연양이 집에 찾아온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항인지라, 은결은 조금 당황하면서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그는 여전히 놀람이 정리되지 못한 상태로 그녀의 인사에 응대했다.
“예... 안녕, 하세요.”
늘상 그러하듯, 어색한 대화였다. 누가 찾아왔나 싶어 졸졸 은결 뒤를 따르던 미래는 세연의 모습을 보고 작게 도끼눈을 떴다.
*천유마 님이 추천해 주셨습니다. 꾸준한 관심에 감사의 마음을~
*지난 화 6월 15일을 17일로 바꿉니다.
*이 글에 과학을 자주 원용하는 것은 서술과 세계관의 설득력을 담보하기 위한 수단이지 이념적 선택과는 무관합니다. 제가 모든 종류의 인식과 이념은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죠. 이걸 지키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 마는’ 꼴이 될 테니까요. 그렇다고 객관성을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메타적으로 들어가면 ‘모든 종류의 인식과 이념은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자체가 하나의 이념이기도 하고, 그것을 엄격하게 추구할 수 있을 만큼 제 앎이 폭넓은 것도 아닙니다. 다행히 이 글은 소설이지 학적(學的) 텍스트가 아니죠. 어쨌건 아는 한에서는 이 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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